[마스터 칼럼] 제1화. “두려워 마라, 거기에 길이 있다”_고관협 마스터 편

201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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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뉴스룸이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마스터칼럼 두려워 마라, 거기에 길이 있다. 고관협 마스터(반도체 연구소 차세대 기술개발팀)

<연재를 시작하며>


마스터(Master)는 삼성전자가 사내 연구∙개발(R&D) 분야별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신설한 직책이다. 마스터가 되면 본인의 전문 분야 연구에 전념하며 특허 출원과 논문 발표, 학회 참석 등 다양한 대내외 활동에 참여한다. 말하자면 ‘기술 부문 리더’인 셈이다. 삼성전자가 치열한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기술 중시 기업 철학,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유감 없이 발휘 중인 마스터의 활약 덕분이다. (참고로 올해 새롭게 선임된 마스터는 여섯 명. 2016년 4월 현재 활동 중인 마스터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58명이다.)

삼성전자 뉴스룸은 이달부터 월 1회 ‘마스터 칼럼’을 연재한다. 마스터 본인이 자신의 전문 지식과 경험을 직접 풀어내는 이 기획을 통해 보다 많은 독자가 삼성인의 영감(insight)과 도전 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제1화. “두려워 마라, 거기에 길이 있다”

고관협 마스터(반도체연구소 차세대기술개발팀)

“마스터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난 19년간 삼성전자에서 경험한 시간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끄적이다보니 어느새 모니터에 이런 말이 띄워져 있었다.

절벽처럼 보이는 곳에도 오솔길이 있다 지금 안 된다고 해서 영원히 안 되는 일이란 없다

 

제1장. “10년 후가 두렵다”는 한 후배의 질문

곰곰이 생각해보니 위 두 문장은 지난해 말 회사 후배 하나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뒤늦은)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후배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마스터님, 반도체 산업은 앞으로도 유망할까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연구는 10년 후에도 존재할까요?”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자기 일에 대해 이런 고민 한 번 안 해본 직장인이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실제로 "반도체 기술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얘긴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존재해왔다. 요즘은 우려의 강도가 한층 높아졌다. 올 2월엔 “반도체 미세 공정 기술은 더 이상 개발되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고관협 마스터

하긴, 후배에게서 이런 유(類)의 질문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내 대답도 늘 준비돼 있다. 대략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우린 지금 한 사람이 1년간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총량이 1테라바이트(TB, 1테라바이트는 1024기가바이트에 해당한다)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규모는 점점 커질 게 분명하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저장하려면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 스토리지(storage)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새롭게 떠오르고 성장하는 기술 역시 그 기반은 결국 반도체다. 10년 후, 20년 후의 반도체 제품이 지금 형태를 유지할진 알 수 없지만 반도체 기술 자체는 시장 요구에 맞춰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니 10년 후에도 살아남으려면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 습득이나 경험 축적에 안주하지 마라. 기본기를 확실히 다진 후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를 주도해라.”

 

제2장. 세계 최초 P램 양산, 그 벅찼던 순간

삼성전자에 몸담았던 19년간 난 운 좋게도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다. 특히 반도체연구소에 소속돼 신(新)메모리 연구에만 15년 가까운 시간을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더없는 행운이었다. 삼성전자가 신메모리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한 건 지난 2002년, 비록 10명도 안 되는 자원자가 모여 팀을 꾸렸지만 각자 품은 꿈만큼은 남부럽잖게 원대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반도체 업체는 말할 것도 없고 IT 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들까지 앞다퉈 M램[1]∙P램[2]∙R램[3] 등으로 명명된 신메모리 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있었다. “D램과 낸드플래시의 단점을 극복하고 각각의 장점만 부각시킬 수 있다”는 평가와 함께 일부에선 이들 메모리에 ‘꿈의 메모리’ ‘유니버셜(universal) 메모리’란 애칭을 붙이며 반도체 업계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메모리 시장 1위 업체였던 우리조차 신메모리 기술의 성공 가능성을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다. “남의 얘기만 듣고 무슨 제품이 유망한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우리 손으로 직접 연구해본 후 어떤 기술에 집중할지 결정하자!”

일단 의기투합했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본격적 개발에 착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 상황에서 가장 ‘유니버셜’한 신메모리는 M램이었다. 하지만 막상 연구를 거듭해보니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났다. 일단 양산(量産)하기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았다. 특히 고집적화 단계에서 뚜렷한 한계에 부딪쳤다. 고심 끝에 우린 한발 물러섰다. 핵심 문제를 극복하고 양산 수준의 신기술을 확보할 때까지 기초연구 수준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개발 방향을 변경한 것. 돌이켜보면 수많은 반도체 기업이 신메모리의 가능성에만 주목하던 시기, 삼성전자의 발 빠른 결정은 단호했고 또 현실적이었다.

이후 우리 팀은 P램 기술 개발에만 집중했다. 그 작업 역시 역시 만만찮은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우린 단계별 문제를 하나씩 극복해가며 P램의 고집적화 작업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2008년, 우여곡절 끝에 “양산을 시작해도 되겠다”는 내부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양산 라인에서 물량을 크게 늘리며 관련 공정을 조기에 안정화시켜야 하는 이슈에 직면한 것이다. 연구소에서 소규모로 개발한 후 평가했을 땐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다.

512Mb P램 공정의 경우, 한 개의 칩을 구성하는 5억여 개의 셀(cell) 가운데 단 한 개라도 결함이 발생해선 안 된다. 따라서 메모리 생산 단계에선 관련 규정이 빠짐없이 충족되는지 평가(test)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돼 있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초기 평가 절차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 '무결함 제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부서 담당자들이 매일 회의실로 집결했다. 머리를 맞대고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시도했다. ‘우리가 이 평가 방법을 완벽히 구현하는 게 가능할까?’ ‘과연 제때 512Mb P램을 양산할 수 있을까?’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같은 길을 함께 걸어온 동료들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새로운 메모리를 완벽히 평가해 양산 기준을 당당히 통과한 것. 우린 이 같은 기술 성과를 바탕으로 생산 수율도 대폭 높일 수 있었다. 2009년, 마침내 우린 512Mb P램 양산에 성공했다. 신메모리 연구 개발 착수 7년 만에, 세계 최초로 거둔 쾌거였다. 이듬해인 2010년엔 세계 최초로 P램 메모리를 탑재한 휴대전화를 출시하며 시장 창출 가능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제3장.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할 줄 아는 여유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교훈을 주는 고관협 마스터의 모습

P램 양산 성공 경험을 거치며 날 비롯한 개발진 모두 많은 교훈을 얻었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물론이다. 돌이켜보면 비단 P램 양산 과제뿐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난제에 부딪쳐왔다. ‘아, 이건 근본적으로 안 되는 기술인 모양이다!’ 낙담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보고, 좀 묵혀뒀다 상황이 좀 바뀌면 다시 끄집어내 관찰하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제멋대로 엉켜있던 실타래가 어느새 거짓말처럼 풀리곤 했다.

대학 시절, 난 한동안 정신적 문제에 골몰했었다. 심리학과 불교, 명상 등에 부쩍 관심이 갔고 세상을 바라보는 현인(賢人)들의 시선에 감탄하기도 했다.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경험은 훗날 내가 사회에서의 크고 작은 난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상당한 영감을 제공했다. 당면한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조(觀照)할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관조하는 사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절벽’과 ‘오솔길’ 이야기. 멀리서 봤을 땐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던 절벽에도 오솔길이 제법 존재한다. 비록 좁고 가파르지만 사람 한 명, 동물 한 마리 정도 거뜬히 통과할 수 있는 길이다. 오솔길 따위 없는 절벽이라면? 그땐 장비를 갖춰 암벽 등반이라도 해 오르내리면 된다. 그게 세상이다.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 매진했던 지난 1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 동안 내가 배운 한 가지 명제는 ‘영원히 안 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곁에서 지켜본 삼성전자의 D램과 낸드플래시 개발 과정만 해도 그렇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수도 없이 접했기 때문일까? 요즘도 난 후배들에게 “반도체 분야에 종사하며 섣불리 ‘안 된다’는 말을 꺼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불가능, 물론 존재한다. 현재의 조건과 방법에서 안 될 수밖에 없는 일은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지금 ‘안 되는’ 일은 ‘지금’ 안 되는 일일 뿐이다. 주변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생각의 틀이 약간이라도 달라지면, 관찰의 시선을 단 몇 도만 틀면 해결의 열쇠는 반드시 나오게 돼있다.

 

제4장. 두려우니까 한 번 해볼 만한 거야!

고관협 마스터가 삼성전자 역사가 펼쳐진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대 공포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소설가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 1890~1937)는 “두려움은 인간의 감정 중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두려움은 미지의 존재(the unknown)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세계를 파고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두려움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 당신을 두렵게 한다면 한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If it scares you, it might be a good thing to try).” 21세기를 대표하는 비즈니스 전략가 중 한 명인 세스 고딘(Seth Godin)의 말이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요즘 후배들에게 자주 들려준다. 실제로 일을 하다보면 뒷걸음질 치고 싶을 때가 있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과제, 가능하면 모른 척 넘겨버리고 싶은 기회와 마주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도전에 맞닥뜨렸을 때, 맥 없이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세상을 굉장히 도전적으로 살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이런저런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응수했던 순간, 그 과정에서 겪은 성공과 실패의 시간이 모여 나도 모르는 새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지금도 난 굳게 믿고 있다, 도전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사실을. 그 가치는 도전 과정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단번에 잊히게 할 만큼 달콤하며, 때론 세상을 널리 유익하게 만들 결과물까지 선사한다는 사실을.

 


If it scares you, it might be a good thing to try. 고관협 마스터의 메시지

고관협 마스터는

1996년 대학에서 ‘고온 초전도체’ 분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이듬해인 1997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P램∙M램 등 신메모리 개발 분야에 주력하고 있다. 2014년 12월 마스터로 선임됐다

 

 

 

 

 


[1] Magnetic RAM. 자석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2] Phase-change RAM. 상(相) 변화 물질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3] Resistive RAM. 금속 산화물의 저항 변화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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