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2015/08/25 by 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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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국내 최고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 보세요. 매주 화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판사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10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로라 베이츠 글, 덴스토리)란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 때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쿡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쳤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30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책의 모습입니다.
(출처: 덴스토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2003년 가장 위험한 죄수를 장기간 격리 수용하는 ‘감옥 안 감옥’ 슈퍼맥스(Supermax)에서 독방에 갇힌 죄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10대에 살인죄를 저질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무기수 래리 뉴턴을 만난다. 이후 10년간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대부분의 범죄는 ‘멍청하게’ 저질러진다

이 책은 법관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 흉악범도 교화될 거야.’ 어쩌면 이 역시 지식인의 선입견에 불과할 수 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지? 영문학에서 그가 갖는 위상 때문에 막연히 선택된 것 아닐까? 더구나 무기수라면 비단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줄기 통로’인 교수의 관심을 받기 위해 관심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트루먼 리포터, 인 콜드 블러드 책의 모습입니다.
(출처: 시공사/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교수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라도 ‘죄수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쪽으로 애써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사형수와 지식인 간 미묘한 관계 형성 과정을 다룬 문학도 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트(Truman Capote)가 실제 사형 선고 받은 살인범을 장기간 인터뷰해 쓴 걸작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1966)가 그것. 이 작품은 지난 2005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카포티(Capote)’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의심 많은 성격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체에서 벽을 만났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데 난 너무 선하고 건전하며 훌륭한 글엔 금방 지친다. 독실한 종교인이나 진실한 상담전문가, 열정에 불타는 사회운동가의 좋은 글을 접하면 박수는 치면서도 재밌게 읽진 못한다. 내 취향은 살짝 삐딱하고(이때 포인트는 ‘살짝’이다, ‘열심히’ 삐딱하면 지루하다) 느긋하며 가끔 비루한 글이다.

그래도 분명 참고할 만한 내용이었으므로 죽 읽었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런 구절들이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빠져들게 될까?’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대다수 살인은 열정적으로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멍청하게 저지른 행동일 뿐이에요.”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약간의 영향만 있어도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책 속 경찰관 살해범의 말이다. 이는 내 재판 경험에 비춰봐도 틀리지 않다. 특히 ‘멍청하게’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악마 같은 흉악범이 계획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드물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분쟁에 휘말려 순간 울컥해 저지르는 범행이 더 많다. 심지어 동네에서 막걸리 값 내기 윷놀이 하던 50대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훈수하는 이웃을 때려 숨지게 한 경우도 봤다.

교도소 철창과 그 그림자의 모습입니다.

 

이 책엔 ‘비행청소년이 많은 한 고교에서 10대 때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의 충고를 녹화한 동영상이 상영되자, 그 어떤 교사 얘기도 듣지 않던 소년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해당 동영상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이랬다.

“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어떤 교사도 그 말을 더 낫게 얘기하진 못할 것 같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얼마나 신세를 망칠지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거죠. 당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난 잠을 잤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막가는 소년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엔 귀 기울인다. 공감의 힘이다.

 

일곱 살 때 경험이 평생 행동 좌우한다면?

저자는 살인 등으로 종신형을 받은 소년 죄수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색 작업을 맡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사랑 얘기가 아니라 (로미오처럼 착한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압박하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각색 희곡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되는 걸로 끝난다. 이 희곡으로 연극을 공연한 후 소년수들은 말했다. “전 열네 살에 살인죄를 저질러 199년형을 살고 있습니다.” “전 열일곱 살에 교도소에 들어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린 여러분이 로미오의 잘못에서 뭔가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에서도.”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거나 칭찬 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소속감이 청소년 범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외 계층 청소년이 그리도 쉽게 범죄에 빠지는 주요 이유는 결국 ‘내 소속 집단에서 인정 받고 싶은 욕구’에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이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킬, 보다 나은 집단에의 소속감을 제공해주지 못한 결과가 곧 청소년 범죄인 것이다. 소년범들과 대화를 나누던 베이츠 교수는 그들의 범죄 경험이 대부분 7∙8세 때 시작된다는 얘길 듣고 놀란다. 한 소년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의 경험이 그 사람의 10대, 그리고 성인이 됐을 때의 행동을 결정해요.”

실제로 베이츠 교수가 가르치던 소년수 한 명은 전학을 자주 다니던 아이였는데 가벼운 장난 몇 건 때문에 교사의 미움을 샀다. 교사는 그를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세워둔 채 한 학기를 보내게 했다. 이후 소년은 거리로 나섰고 그의 인생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 소년수는 말했다. “학생을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두면 그는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거예요.”

한 소년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공감의 힘, 팩트의 힘, 그리고 문학의 힘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형벌의 목적과 방법에 관해 많은 걸 시사해 이곳에 그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위해 우리가 왜 선행을 베풀어야 할까요? 나쁜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단 얘긴 곧 나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죄를 짓고 격리된 집단의 사람들에게 굳이 나쁜 일을 하려고 찾아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그보다는 선행의 수혜자가 누구든 간에 선한 일을 찾아서 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중략) 수많은 죄수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곤 우리의 이웃이 될 겁니다.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팩트(fact)’의 힘이다. 실제 죄수가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이야기의 힘 말이다. 교수나 셰익스피어는 그저 그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촉매제일 뿐이다. 물론 내가 처음 가졌던 까칠한 의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죄수들의 말 뒤에 자기합리화 등 여러 기제가 작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해도 뉴턴의 말엔 생생하고 분명한 진실의 조각들이 느껴진다.

셰익스피어의 초상화입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란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줄거리만 요약한 4대 비극 따위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희곡 원문을 읽어야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 난 고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을 발견, 탐독하며 ‘현란한 언어 유희의 묘미’에 빠졌었다. 그래 봤자 ‘그저 평온하게 자란 책벌레 소년’이었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 그 정도였다. 반면, 소년 시절에 폭력∙마약∙살인을 저질러 지하 독방에 갇힌 무기수들은 교육 수준에 관계 없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천국에서 무간지옥 바닥까지 경험했다. 이게 ‘위대한 문학의 힘’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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