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수동과 냉소에 반대한다

2014/11/28 by 손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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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애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초빙 교수


 

언제부턴가 우리네 삶이 퍽 수동적이란 생각이 든다. ‘행동 자체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무슨 행동을 해도 별다른 확신이 없고 그 행동이 가져올 효율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란 뜻이다.

남자의 등에 태엽이 박혀 있고 머리에 톱니바퀴들이 자리잡은 이미지로 수동적인 인간에 대해 의미하고 있습니다.

“투표? 했지. 딱히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고 개중 덜 싫은 사람 찍었어.” 선거 직후면 으레 이 같은 대화가 오간다. 세월호 비극 이후 잇따른 후속 조치와 관련 법안의 진통 끝 통과를 지켜보면서도 이 같은 대책이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나마 대부분은 말이나 글로 된 지적일 뿐, 문제 해결을 위해 선뜻 행동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 전반에 냉소적(cynical) 말과 행동이 정상인 양 취급되는 것 같다면 심한 표현일까.

 

작은 시민 운동, 미국 전역 움직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일을 많이 겪는다. 낯선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저런 모험을 하다보면 종종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린다.

미국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막내딸이 다니고 있는 중학교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다. 여러 교사가 학부모들에게 다양한 교내 프로그램을 소개했는데 일명 ‘26개의 친절한 행동(26 acts of kindness)’도 그 중 하나였다. 이 프로그램은 2년 전 미국 코네티컷주(州)에서 발생한 총살 사건으로 희생된 26명을 기리는 시민 운동이다.

2012년 12월 14일, 20세 미국인 청년 아담 란자는 샌디훅(Sandy Hook)초등학교에 총을 든 채 침입해 평화롭게 공부하던 초등생 20명과 교사 6명을 사살한 후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그의 범행 동기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이 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유명 기자 앤 커리(Ann Curry)는 총기 사건 직후 자신에게 반문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번 사고로 희생된 26개 생명을 위해 친절한 행동을 한 가지씩 하겠다고 상상해보세요. 여러분도 동참하실래요?”

노인의 손을 잡아주는 아이의 손입니다.

커리의 트위터를 접한 사람들은 자신의 계정에도 앞다퉈 ‘내가 한 친절한 행동’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이 운동은 미국 전역에 퍼졌고 비극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이후 커리는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실천한 ‘친절한 행동’을 알리기 시작했다. 터널 통행료를 낼 때 뒤 차 것까지 내기, 내 차 주변에 세워진 승용차의 주차비까지 정산하기, 손수 끓인 커피를 동네 소방서에 갖고 가 나눠주기… 반향은 컸다. 커리의 트위터를 접한 사람들은 자신의 계정에도 앞다퉈 ‘내가 한 친절한 행동’을 올리기 시작했다. 참가자 수는 몇 주 만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후 이 운동은 미국 전역에 퍼졌고 비극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개인도, 기업도 “무슨 친절 베풀지?” 고민

참가자는 비단 개인에 그치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기업도 ‘친절한 행위’ 실천에 뛰어들었다. KLM항공사는 지난 2011년부터 자체적으로 진행해 오던 ‘친절한 행동들(Acts of Kindness)’ 캠페인을 한층 강화했다. 이 기업이 친절을 베푸는 대상은 다름아닌 ‘고객’. 자사 항공기에 체크인한 고객의 SNS 게시물을 관찰, 해당 고객에게 필요한 물품을 선물로 건네는 형태였다. 실제로 이 캠페인을 통해 KLM 항공기로 영국 여행을 떠난 한 젊은이는 항공사 측에서 만보기를 선물로 받았다.

선물을 건네는 손입니다.

인터넷 네트워킹 서비스 업체 링크드인(LinkdIn)은 최근 신입사원 대상 오리엔테이션 현장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를 4명씩 짝 짓게 한 후 그룹당 100달러를 주고 무작위로 친절한 행동(random act of kindness)을 하게 한 것. 그 결과는 한데 모여 서로 발표하게 했다.

식물로 CSR을 표현한 사진입니다.

어쩌면 CSR은 생각만큼 그리 거창한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사례 하나로도 얼마든지 CSR을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한 그룹은 웨딩드레스숍을 찾아 돈이 부족해 원하는 드레스를 못 사고 있는 예비 신부에게 100달러를 보탰다. 돌아 나오는 길,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룹원들은 사비를 털어 그 드레스를 아예 사줬다. 복귀 후 당시 경험담을 들려주는 그들의 얼굴이 어찌나 밝았던지 다른 신입사원들은 그 발표를 들으며 절로 애사심이 생겼다는 후문이다. 이 사례를 접한 후 최근 각광 받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을 떠올렸다. 어쩌면 CSR은 생각만큼 그리 거창한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사례 하나로도 얼마든지 CSR을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내 힘으로 세상 바꿀 수 있다” 가르치는 미국 학교

학부모 회의 직후 26개 친절 운동을 설명해준 교사에게 학교 차원에서 이런 캠페인에 동참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샌디훅초등학교 총기 사고 같은 비극이 발생하면 아이들도 TV 등 미디어를 통해 관련 소식을 접합니다. 아직 어린 만큼 적잖이 충격을 받겠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나도 뭔가 해서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내 힘으로 이런 비극이 재발하는 걸 막아보자’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번 운동은 바로 그런 취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의 차를 닦고 있고 아버지가 아이의 곁에 함께 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서양 명언 중 “Never Waste a Good Crisis(값진 위기를 허비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때론 위기가 창의적·효율적 해결책 마련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실제로 교사에게 캠페인의 취지를 전해 들은 아이들은 각자 나름대로 친절한 행동을 하나씩 실천한 후 자신의 SNS 계정에 그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만난 할머니 차에 물건 옮기는 일을 도왔고, 다른 아이는 감기에 걸린 이웃 아주머니 집 청소를 거들었다. 이들이 올린 사연은 더없이 밝다. 함께 올라온 사진 속 표정도 하나같이 환하다.

서양 명언 중 “Never Waste a Good Crisis(값진 위기를 허비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때론 위기가 창의적·효율적 해결책 마련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어쩌면 이 말은 2014년 초겨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될는지 모른다. 지금 우린 ‘세월호 참사’란 비극을 마냥 허비하고(waste) 있는 건 아닐까? 그 일을 겪으며 얻은 교훈은 뭘까? 비극을 극복할 창의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묘책은 없는 걸까? 단지 ‘(재발 방지용) 법안’을 새로 만드는 것만이 최선일까? 사실 이런 질문은 그간 역시 수동적으로 지내 온 나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위기의 ‘교훈’ 되새기는 대한민국 꿈꾸며

얼마 전, 한국에 잠깐 다녀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기침을 심하게 하는 공항 카운터 직원에게 레모네이드와 목캔디를 살짝 건넸다. 고마워하는 직원을 바라보는 내 얼굴엔 더 큰 행복이 깃들었다. 그러곤 오랜만에 트위터에 접속, ‘acts of kindness #1(첫 번째 친절한 행동)’으로 시작되는 글을 남겼다.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해 친절한 행동을 한 가지씩 실천해보면 어떨까.
하나 둘 동참하는 이가 늘수록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근사해질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지금이라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해 친절한 행동을 한 가지씩 실천해보면 어떨까. 하나 둘 동참하는 이가 늘수록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근사해질 것이다. 단, 수동과 냉소는 저 멀리 던져버릴 것. 이 캠페인의 성패를 좌우하는 첫째 요인은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을 반드시 바꿀 수 있다’는 능동적 자세니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의 또 다른 칼럼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문가 칼럼] ‘케이팝(K-pop) 열풍’이 한국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

by 손지애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초빙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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