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쌀쌀한 날엔 로맨스 영화가 당긴다?

2015/04/10 by 여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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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소비자행동 분야 전문 학술지 ‘소비자연구저널(Journal of Consumer Research)’ 2012년 8월호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 하나가 소개됐다. 세계적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Netflix)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기온이 떨어지는 날 유독 로맨스 영화 다운로드 횟수가 올라가더라는 것. 액션·코미디·드라마·스릴러 등 다른 장르에선 나타나지 않던 기온과의 상관성이 로맨스영화에서만 두드러졌다. 왜 그럴까?

 

‘몸’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각’

연구를 진행한 지웬 홍(Jiewen Hong) 홍콩과학기술대 교수와 야쳉 순(Yacheng Sun)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에 대해 “신체적으로 차가운 기운을 느끼면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반발 작용을 일으켜 심리적 따뜻함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추울 때 보는 따뜻한 영화 한 편’이 ‘추울 때 마시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 못잖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파란색 패딩점퍼를 입고 털모자, 털장갑을 착용한 여성이 손을 호호 불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몸이 느끼는 내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인체는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그 과정에서 특정 동작이나 감각기관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느낌은 은유적으로 연결된(metaphorically linked) 특정 인지, 즉 사고나 판단을 일으킨다. 소비자행동학에선 이를 ‘체현인지(embodied cognition)’ 혹은 ‘체화된 인지’라고 명명한다. ‘몸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란 뜻이다.

전통적 인지과학에선 사고(思考) 자체에 초점을 뒀다. 인간의 생각을 컴퓨터 같은 기계적 처리 과정에 비춰 해석하는 ‘계산주의적 접근 방식(computational approach)’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비전통적 인지이론이면서 ‘환경주의적 접근 방식(environmental approach)’이라고 할 수 있는 체현인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인지 과정에서 ‘몸’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생각’이었고, 이에 따라 뇌의 기계적 작동과 그 결과로 도출된 사고가 관심 대상이 됐다.

하지만 생각의 근원엔 (그 생각을 가능케 한) 주변 환경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런 만큼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 결과로 받게 되는 몸의 의식적 느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느낌이 오랜 세월 학습과 진화 과정을 거치며 은유적 사고를 일으켜 사고와 판단, 행동 체계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원형 탁자 회의’, 이유 있었네

최근엔 체현인지와 관련, 학제 간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심리학·의학·철학·신학·교육학·경영학은 물론, 체육·미술 등 예술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학문에 걸쳐 ‘몸(에 대한 관심의 결과 생성된 은유적 생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고 있다.

예부터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마음이 중요하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을 종종 써왔다. 하지만 마음을 어느 한쪽으로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일으키려 하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반발과 마주치게 마련이다. 억지로 특정 생각을 지시, 강요한다 해서 그 생각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해당 생각이 떠오르도록 외부 장치를 가동시키는 편이 낫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환경의 영향에 의해 특정 생각이 일어나도록, 그로 인한 특정 판단과 행동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도록 자극을 만들고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특정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먹을 쥐어 오렌지색 복을 꽉 쥐는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 그간 행해진 연구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체 동작(bodily movement)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주먹을 꽉 쥐거나 종아리나 팔 근육에 힘을 주면 식초 음료를 잘 견디며 마시거나 초콜릿과 사과 중 (건강에 좋은) 사과를 고르는 등 인내심이 증가한다. 근육을 순간적으로 강화시키며 그와 은유적으로 연결된 의지력이 덩달아 높아지는 체현인지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체현인지는 몸의 자극, 그리고 그와 연결된 인지 간 ‘쌍방향적(bidirectional)’ 성격을 띤다.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의지력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력을 높이고자 할 때 무심코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을 참을 때 주먹을 꽉 쥐거나 이를 악문다. 이 같은 습관은 오랜 세월 인류가 진화적으로 체득한 몸과 마음 간 ‘연결고리’의 흔적일 수 있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여성들의 사진입니다.

쭈그린 자세(slumped posture)일 땐 방어적이고 부정적이며 스트레스와 연관된 표현이 늘어나는 반면, 꼿꼿한 자세(upright posture)일 땐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며 관대한 표현이 늘어난다. 몸을 곧게 펴는 동작이 자신감과 자기긍정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자신감을 드러내고자 할 때 저도 모르게 어깨가 펴지고 등이 곧아지는 것 역시 두 요소의 상관관계를 역(逆)으로 보여준다.

기울어진 자세(unbalanced posture)일 때 인간은 반사적으로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 양쪽을 적당히 반영하는 타협안 선택(compromise choice) 비율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사람들은 일상에서 타협을 시도할 때 무심코 상대와 균형을 이루려는 몸짓을 취한다. 한쪽이 서 있고 다른 쪽이 앉아 있을 때 “같이 앉아서 얘기하자”고 하는 것, 양자 간 거리가 너무 멀 때 탁자에 바싹 붙어 대화를 나누는 것, 원형 탁자처럼 균형이 확보된 공간이 회의 장소로 선호되는 것 등이 대표적 사례다.

 

‘불황 모르는 커피전문점’의 비밀

공간과 관련된 실험 결과 중에도 흥미로운 게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의 천장이나 폭이 좁아지면 두 가지 극단적 양상을 보인다.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느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성을 추구하는 행동이 하나, 그 안에 스스로 갇혀 자신의 감정을 오히려 더 봉합해버리는 행동이 다른 하나다. 특히 감정을 가두는 사람일수록 밖으로 나서지 않고 집안으로, 구석으로 숨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시각 체현인지에 관한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람들은 심미적으로 뛰어난 물건을 옆에 두거나 지니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커진다. 반대로 스스로 확신을 키우려는 무의식적 행동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취하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커피전문점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하는 여성의 모습입니다.

청각 관련 실험 중에선 주변 소음과 창의성 간 연결고리를 주제로 하는 게 있다. 이 실험에 따르면 적당한 소음에 노출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창의력·문제해결능력 테스트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 같은 현상은 커피전문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트북족(族)’을 통해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할 땐 적당한 소음이 있는 커피전문점이 최적의 장소’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터득한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커피전문점 소음을 들려주는 애플리케이션 ‘커피티비티(coffitivity)’는 뉴욕타임스 등에도 소개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후각이나 촉각도 인간의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후각의 경우 깔끔한 향(香)을 맡으면 대상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뿐 아니라 상대에게 미덕을 베푸는 행위도 증가한다. 향 관련 시장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는 것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촉각에 관한 여러 실험 중 대표적인 건 일명 ‘온기 프리미엄(warm temperature premium)’이다. 온기 프리미엄은 촉각적 따뜻함이 유발하는 각종 긍정적 효과를 일컫는다. 실제로 소비자학에선 따뜻한 촉감이 고객과의 신뢰를 증가시키고 제품 평가를 좋게 하며, 심지어 해당 제품의 가격을 높아 보이게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옷가게 점원이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엔 ‘고객을 안심시키고 점원인 내게 신뢰감 갖게 하려는’ 수요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기업환경·도시계획 등 활용 가능성 ‘무궁무진’

체현인지 효과는 기업 경영을 포함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켜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성이 중요한 연구개발(R&D) 부서의 경우, 창의성이 자연스레 발현될 수 있도록 시청각적 자극 요소를 공간 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다. 교육(훈련) 공간에서도 해당 교육의 목표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거리·높이·각도 등 다양한 시·공간적 체화 자극을 개발할 수 있다. 마케팅 측면에선 서비스 제공자와 고객 등 양쪽 측면에서의 접근이 모두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서비스 제공자라면 인내심을 키우거나 긍정과 관용의 마음을 갖도록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다. 고객 입장을 고려해 자사 제품과 서비스를 보다 긍정적이고 신뢰감 있게, 친근하게 보도록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다.

연필로 도시계획 그림을 그리는 모습입니다.

사회적 측면에선 범죄 예방과 안전의식 고취, 심적 여유 등의 효과를 고려해 도시계획을 세우고 공간을 설계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도록, 무의식적으로 안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보다 멀리 내다보며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감각적 자극 요소를 개발하는 것이다. 요컨대 체현인지 기술은 우리 사회가 좀 더 품격을 높여 선진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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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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