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이슬람 문화의 이해: 편견과 오해를 넘어

2015/04/07 by 이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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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지식 강국이다. 하지만 특정 분야, 이를테면 중동(이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도는 OECD 평균은커녕 제3세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팔레스타인 중심의 중동·이슬람 문제를 (팔레스타인의 반대 축인) 유대 중심 언론 보도와 학문 자료로 대부분 접해온 탓이다. 극심한 지적 편식이고 정보 편중이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중세 마녀사냥 때나 접할 법한 ‘이슬람=테러리스트’식(式) 부정 담론이 폭넓게 회자된다. 그런 광경을 접할 때마다 아연실색한다.

 

이슬람과 테러리스트가 동의어?

2015년 4월 현재 전 세계 이슬람 인구는 약 15억 명이다. 국제연합(UN) 가입국 중 57개가 이슬람 국가로 등록돼 있다. 최근 중동 전역에 한류 열풍이 몰아치면서 중동 사람 대부분이 ‘코리아(Korea)’ 브랜드에 열광한다. 사실과 다른 편견 때문에 지구촌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세계 최대 단일 문화권을 적(敵)으로 돌릴 필요가 있을까?

이슬람 문화권의 한 가족이 함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알 카에다(Al-Qaeda)와 이슬람국가(IS) 같은 반(反)인륜적 급진 테러조직에 대한 이슬람 내부 인식에도 오해가 있다. 단적인 예로 ‘이슬람권의 UN’으로 불리는 세계이슬람협력기구(OIC)는 알 카에다와 IS를 ‘궤멸돼야 할 테러 조직’으로 공식 규정한다. 최근 카타르 민영 위성TV 방송국 알 자지라(Al Jazeera)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전 세계 무슬림의 약 99%가 IS를 반이슬람적 테러 조직으로 간주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슬람=아랍’ 등식 역시 이슬람 문화를 둘러싼 대표적 오해다. 이슬람과 아랍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부다처·여성할례·명예살인·폭력성·여성차별 등은 사실 이슬람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오아시스 사회의 남성 중심 가부장적 유목 구조가 갖는 아랍 전통의 문제다. 아랍 사회가 이슬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목적 토착 전통과 종교적 가치가 뒤섞이며 혼란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과 아랍을 혼동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규모나 지역 분포를 기준으로 할 때 전체의 25%가량이다. 나머지 이슬람 인구의 대부분은 아시아 지역에 집중돼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전역도 이슬람권으로 분류된다. 심지어 중국에 분포한 무슬림 인구도 5000만 명 이상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슬람은 아랍과 뚜렷이 구분되는 ‘아시아의 대표 종교’로 정의되는 게 옳다.

 

이슬람교가 예수 모독 종교?

이슬람교는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가장 유사한 종교다. 두 종교 모두 유일신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섬기는 점이나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를 수용하는 모습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이슬람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즉 신격(神格)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두 종교는 본질적 갈래를 달리하게 됐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예수를 ‘오류를 범하지 않는 최고의 인격체이자 최상의 예언자’로 추앙한다. 실제로 쿠란(Quran, 이슬람교 경전)엔 “성녀 마리아의 몸에서 남자와의 접촉 없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3:47). 예수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행한 기적도 세세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돼 있다. 기독교와 관점은 다르지만 ‘최후 심판일이 다가올 때 예수가 재림할 것’이란 사실도 언급돼 있다(43:61, 4:159). 이 밖에도 쿠란 전체 6226절 가운데 93절, 15장에 걸쳐 예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데도 일부에선 여전히 이슬람교를 ‘기독교와 가장 적대적인 종교’로 치부한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종교’ ‘기독교와는 도저히 한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종교’로 대하기도 한다. 쿠란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인식이다.

 

무함마드와 예수는 어떤 사이?

이슬람교에선 무함마드를 아담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은 ‘마지막 예언자’로 본다. 또한 유일신인 ‘알라(하느님)’에 대한 절대 복종과 우상 숭배 금지를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만인의 평등과 형제애를 가르침으로써 하층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함마드는 메카의 지배층인 귀족들의 박해를 받아 622년 포교의 중심지를 북쪽 상업 도시인 메디나로 옮기게 됐다. ‘히즈라(Hijrah)’ 혹은 ‘헤지라(Hegira)’로 불리는 이 이주 행위는 이슬람력(曆) 원년 설정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슬람교도들이 예배하고 있습니다. 두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팔을 뻗는 모습입니다.

이슬람에서 알라의 예언자들은 특별한 시대, 특별한 지역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보내졌다. 모세와 예수 역시 시·공간적 제약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처럼 알라의 예언자들은 각 나라와 사회, 시간, 민족 등에 잇따라 출현했지만 하느님의 계시는 시대 흐름에 따라 인간 손에 의해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며 점차 오역, 변질돼갔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예언자가 새로운 계시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무함마드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 ‘완전한 마지막 계시’가 내려졌다.

요컨대 종전의 모든 계시를 종합해 종교적 통일성을 갖추게 된 계시가 이슬람이고, 이 계시를 간직한 게 쿠란이며,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다. 따라서 이슬람에선 아담을 비롯해 노아·아브라함·모세·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를 추앙한다. 예수 역시 신이 보낸 훌륭한 예언자 중 한 명이다.

 

이슬람교도는 무엇을 믿고 따를까?

이슬람(Islam)의 언어학적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 의미는 ‘복종’이다. 역시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살롬(shalom)’과 어근도, 의미도 같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슬람 사상의 요체는 알라(Allah·유일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내면의 평온과 지상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한 사람이 종이에 예언을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교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느님은 같은 존재일까, 다른 존재일까? 쿠란에 따르면 알라는 적어도 네 가지 기본 속성(“절대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유일하시고, 우주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다”)을 지닌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속성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일치한다. 지금도 절대 다수의 아랍 크리스천은 하느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하느님을 알라로 표기한 아랍어판 성경 번역본도 적지 않다.

이슬람은 기독교처럼 십자가 대속(代贖)이나 중재자를 두지 않으므로 인간과 신의 직접 교통을 통한 현세의 삶과 내세의 구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신(神)과의 직접적 관계를 통해 선행을 쌓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이룬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살라트) △한 달간의 단식(라마단) △순수입의 2.5%를 가난한 이와 나누기(자카트) △평생에 한 번, 재정과 건강이 허락할 때 ‘하느님의 집(바이트 알라, Bayt Allah)이 있는 성지(聖地)’ 메카를 순례하는 기본 의무(하즈) 등이 대표적 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같은 생활을 통해 쿠란과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록), 이슬람법으로 정해놓은 하느님의 길을 위해 자신과의 투쟁을 이어간다. 현세에서의 모든 선행은 천사에 의해 낱낱이 기록돼 최후의 심판일, 즉 하느님 앞에 불려갔을 때 판단 자료가 된다. 살아 있을 때 베푼 선악의 경중에 따라 심판을 받은 후 선을 행한 자는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구원을 받고 악을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짐으로써 영원히 응징당한다는 게 이슬람의 기본적 구원관이다.

단순한 구원관은 무수한 이들을 이슬람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신과의 관계에 의한 개인적 구원관의 영향으로 이슬람 신앙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식이나 형식보다 철저한 자기 의무를 강조한다. 투철한 신앙과 엄격한 계율은 이 과정에서 생성됐다. 또한 무슬림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뿐 아니라 이전 선지자들이 받았던 성서와 천사의 존재도 믿고 따른다. 나아가 ‘삼라만상의 모든 움직임과 사건은 신의 의지대로 일어나지만 인간이 부여받은 이성과 자율 판단의지에 따라 일정 부분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정명론(定命論)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이라고?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이란 말이 있다. 일찍이 서구인이 무슬림 정복 사업을 설명하며 사용했던 이 표현엔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압적 종교 전파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이슬람 세력 확산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구호인 셈이다.

이슬람을 전파하고 예언자의 본보기를 따르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쿠란의 정신과 배치된다. 오히려 쿠란엔 “종교는 어떤 강요도 있을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전쟁을 용납한 건 메디나에서 외부 공격을 물리칠 필요성이 대두됐을 뿐 아니라 무슬림 사회를 위협하는 메카인에 맞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카펫 위에 쿠란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창시(610년) 직후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비잔틴과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300년 전쟁과 그로 인한 경제적 착취 등이 맞물리며 이슬람 진출은 당대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당시 이슬람 정권은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제도를 도입, 25%가량의 토지세를 내는 조건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개종자에겐 약 10%의 인두세를 추가로 면제해줬다. 이 같은 정책은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던 주민들에게 ‘대량 개종’의 길을 열어줬다.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개종자가 급증하자 이슬람 정부는 한때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개종금지백서’를 발효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납 액수 역시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시대의 강제 징수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으므로 이슬람제국 아래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은 상당한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이 일단 진출했던 지역은 해당 세력이 후퇴한 이후에도 예외 없이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아 있다. 이는 세계사의 대표적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 만약 이슬람이 ‘무력에 의한 전파’를 일삼았다면 이슬람 세력이 후퇴한 지역의 이슬람 인구는 즉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이는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담론이 성립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 문화의 급속한 전파를 두려워한 나머지 내뱉었던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은 오늘날 서구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교과서에서도 사라졌다. 지금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논쟁의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가 인식의 주체가 돼 관념적이고 명분을 앞세운 국익이 아닌, 냉철하고 실용적인 실체를 고려하며 이슬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봐야 할 때가 아닐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이희수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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