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푸드 디자인, ‘먹는 경험’까지 바꾼다

2015/05/19 by 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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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음식을 담는 자루다.” 조지 오웰은 소설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1937)’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에게 식(食)문화가 없다면 그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실제로 SF영화나 미래 사회를 그린 시나리오 등에서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설정이 종종 등장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자루’로 생각한 데서 나온 발상이 아닐까? 음식 자체의 쾌락과 식문화를 둘러싼 즐거움을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 활동에 필요한 칼로리만 얻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기계적 해결책인 셈이다.

오웰식(式) 규정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다면 ‘절대 그럴 리 없다’에 한 표를 던지겠다. 한 끼 식사를 알약 몇 정으로 때우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설국열차를 타고 바퀴벌레 양갱으로 겨우 연명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의 나락이 아니라면야! 사람들이 죽기 전 꼭 하는 후회 중 하나가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어볼 걸’이라니 살아 있을 때 좀 더 열심히 분발해 먹을 필요가 있다.

 

인간이 ‘음식 담는 자루’일 뿐이라고?

식문화가 발달한 곳 하면 역시 프랑스를 빼놓을 수 없다. ‘미슐랭 가이드’ 별 3개짜리 식당을 운영하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요리사가 별 하나 떨어졌다고 자살하는, 미식에 관한 한 살벌한(?)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나라답게 루이 14세 때도 연회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한 요리사가 한 명 있었다. 케이크 장식에 쓰이는 휘핑크림을 처음 만들었다고도 알려진 프랑수아 바텔(Francois Vatel)이 그 주인공이다.

꽃이 놓여있는 테이블 세팅

바텔은 왕에게 바치는 연회를 준비하던 중 생선이 늦게 도착해 연회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롤랑 조페 감독은 이 비운의 요리 장인 얘길 ‘바텔(2000)’이란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영화 속 바텔은 그저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다. 무대 미술, 인테리어, 테이블 세팅 등 연회에 관한 온갖 설계를 도맡는 ‘아트디렉터’였다.

음식 관련 디자인이라고 하면 흔히 식기나 식사 장소 정도를 떠올리지만, 여기 아주 다른 관점을 지닌 디자이너가 있다. 정작 요리엔 무관심한 푸드 디자이너 마르티 귀세(Marti Guixé)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먹을 수 있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을 뿐, 요리를 하는 건 아니다. 푸드 디자인은 음식을 오브젝트(object)로 취급하며 어떤 기능을 가질 수 있는지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의 말은 ‘푸드 스타일리스트’과 헷갈리기 쉬운 ‘푸드 디자이너’의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귀세의 주장에 따르면 스페인 최고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는 훌륭한 요리사이긴 해도 푸드 디자이너라곤 할 수 없다.

 

신종 직업 ‘푸드 디자이너’의 등장

귀세의 푸드 디자인은 이런 식이다. 드로흐 디자인(Droog Design)과 함께한 ‘오라니엔바움 캔디(oranienbaum candy)’는 씨앗이 들어 있는 오렌지맛 막대사탕인데, 다 먹고 난 후 입속에 남은 씨앗을 툭 뱉는 행위로 끝이 난다. 사탕을 먹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식물까지 심겠다는 의도의 디자인이 담긴 음식인 셈이다. 이런 발상이 가능한 건 음식을 제품처럼 ‘대량 생산 오브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길거리 벤치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면 몇 분 뒤 바로 그 벤치로 음식을 배달해주는 ‘푸드뱅크’ 같은 사업 아이디어도 많이 갖고 있다.

플레이팅을 하는 요리사

귀세는 “음식은 소비량이 가장 큰 대량 생산품인데도 푸드 디자인은 음식 관련 디자인 분야에서 아직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으므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가 자신의 푸드 디자인이 본격화된 시기를 1990년대 중반, 한국을 다녀온 후부터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귀세는 “한국처럼 음식과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곳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귀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페란 아드리아는 실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엘 불리의 ‘스타 셰프’ 아드리아는 디자이너와 협업하거나 직접 디자인한, 레스토랑에 필요한 식기와 조리 기구를 만들어 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발명’한 분자 요리를 모든 스태프가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도록 모형과 그래픽 아이콘으로 만들어 훈련시키기도 한다. 영국의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 역시 한때 주방용품을 개발했다.

 

눈길 끄는 한국 푸드 디자이너 2인

한편, 나라마다 식문화가 다르듯 음식 관련 도구 역시 다양하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나 기술 수준과도 관련이 있다. 분자 요리나 퓨전 요리처럼 새로운 음식이 우리의 눈과 혀를 사로잡듯 도구를 통해 먹는 방법과 경험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디자인이 최근 등장, 눈길을 끈다.

젓가락

이를테면 디자이너 전미선씨는 음식 종류에 따라 바꿔 쓰는 젓가락을 제안한다. 중국 음식은 뜨겁고 기름지며 면류가 많기 때문에 젓가락이 길고 통통해야 뜨거운 김에 데지 않고 잘 먹을 수 있다. 반면, 젓가락만 사용하는 일본에선 그릇을 들고 먹기 때문에 길이가 짧고 생선살을 발라내기 쉽도록 끝이 뾰족한 젓가락이 널리 쓰인다. 전씨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일일이 쥐어보며 120여 종의 젓가락을 개발했다. 어떤 건 두부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쉽게 집을 수 있도록 설계됐고, 어떤 건 물미역처럼 얇고 미끌거리는 음식을 집는 데 특화됐다. 하나같이 ‘어떤 음식을 집어 올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디자인이다.

흰 접시

디자이너 전진현씨의 작품 ‘공감각 식기’는 도구가 ‘먹는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파고든 결과물이다. ‘식사 도구가 우리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자극하는 매개체가 된다면 어떨까?’란 생각에서 출발한 그는 오감 중 하나가 다른 감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감각(synesthesia)에 주목했다. 전씨는 김광균의 시 ‘외인촌’의 마지막 시구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서처럼 소리를 색으로 보는 등 교차된 감각을 경험하는 이들, 혹은 사고로 시력을 잃어 촉각·후각 등 후천적으로 감각이 강화된 공감각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실감하는 다채롭고 풍부한 세상에 매료됐다.

‘일반인도 공감각을 경험해볼 수 있는 도구를 디자인해야겠다!’ 그의 결심은 ‘입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숟가락 디자인으로 구체화됐다. 돌기가 난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면 숟가락을 입에 오래 물게 돼 후각이 강화된다는 식이다. 그는 ‘적당히 붉은빛을 내는 도구가 식욕을 더 돋울 것’이란 생각으로 식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공감각 식기를 이용해 음식을 먹어본 이들은 “먹는 행위에 더욱 집중하게 됐고 식사 속도도 2배가량 느려졌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활동 중인 전씨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셰프들과 함께 공감각 식사 이벤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음식, ‘디자인’ 없인 ‘문화’도 없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오감을 가장 총체적으로 자극하는 감각적 경험이다. 음식 문화가 발전하며 먹는 방법과 도구도 함께 발달한다. 알약 하나로 식사가 끝나는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음식에 대한 탐닉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음식 관련 산업 역시 진화를 거듭할 전망이다. 그리고 변화하고 있는 우리 음식 문화, 그리고 음식 자체를 둘러싼 디자인은 ‘먹는다’는 경험마저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디자인이 없다면 음식 ‘문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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