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먹방 프로 레시피’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2015/08/28 by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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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 에세이] ‘먹방 프로 레시피’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김연수 푸드테라피스트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먹는 즐거움에 빠져있다. 일명 ‘먹방(먹는 방송) 프로그램’이 방송가를 장악하고 있는 건 물론, 외식 시장은 대기업 진출이 활발해지며 날로 커지는 추세다. 실제로 우리나라 외식 수준은 한 끼 식사부터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인생에서 ‘먹는 낙(樂)’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긍정적 변화일 수도 있지만 건강 음식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식구 먹일 음식엔 못 쓰겠어요”

얼마 전 서울 강남의 유명 쿠킹 클래스에 다니는 지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요즘 어떤 요리를 배워요?” 돌아온 그의 대답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맛은 있어요. 근데 소스나 인공 조미료가 엄청 들어가요. 그런 게 안 들어가면 절대 그 맛이 안 나죠.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해 그런지 실제 우리 식구 먹을 음식을 만들 땐 잘 활용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요즘 화제를 모으는 요리 프로그램 레시피를 살펴봐도 ‘결정적 맛’을 내는 비결은 대개 설탕이나 간장처럼 미각을 자극하는 첨가물인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건 유명 셰프 레시피에 열광하는 이들도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결코 작지 않단 사실이다. 실제로 대중 강연을 나가보면 “건강에 좋은 음식을 콕 집어달라”는 주문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 내 대답은 한결같다. “그전에 평소 중독된 것처럼 자주 먹는, 몸에 해로운 음식부터 멀리하셔야 합니다.”

설탕 알갱이 사진

해로운 음식일수록 맛이 있다. 중독성도 강해 단번에 끊기가 쉽지 않다.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요구된다. 맛을 느끼는 감각과 뇌 기능 간 유기적 관계가 그 원인이다. 인간이 맛을 느끼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음식의 미세한 분자가 코∙입∙목 등 신체기관에 분포해 있는 일정 세포를 자극한다. 이들 특수 감각 세포는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이 과정에서 뇌가 맛을 식별하게 된다.

어린이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모든 음식은 일단 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미각세포’란 메모리칩에 저장된다. 미각세포는 대부분 7세 이전에 ‘세팅(setting)’돼 그 사람의 평생 미각으로 자리 잡는다. 쉽게 말해 어릴 때 맛본 음식과 그 경험에서 각인된 맛이 기억 체계로 바뀌어 뇌에 장기간 저장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탕이나 케이크 등 단 음식에 쉽게 빠져드는 것도 미각세포에 일찍 단맛이 저장된 탓이다.

 

6개월도 못 간 ‘하얀 국물 라면’ 인기

단맛과 짠맛, 매운맛은 오미(五味, 신맛∙쓴맛∙매운맛∙단맛∙짠맛) 중에서도 유독 중독성이 강하다. 단맛과 짠맛에 익숙해진 입맛은 어른이 돼서도 버리기 힘들어진다. 이 때문에 자녀에게 좋은 식습관을 길러주고 싶다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식을 고루 경험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짠맛처럼 자극적인 맛에 오랫동안 깊게 중독되면 자칫 나이 들며 맛에 관한 균형 감각을 잃을 수도 있다. 치매의 전조(前兆)로 ‘미각 상실’이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각이 뇌 신호 체계에 따른 것인 만큼 맛을 느끼는 균형이 사라졌단 얘긴 곧 뇌가 망가지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비만∙당뇨∙고혈압∙영양실조∙파킨슨병∙알츠하이머 등의 예상 증상엔 하나같이 ‘미각 기능 이상’이 포함된다.

국물이 하얀 라면 사진

‘맛에 대한 뇌의 기억’을 설명할 때 내가 자주 인용하는 사례가 있다. 한때 국내 라면 시장을 휩쓸었던 ‘하얀 국물 라면’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몇 년 전 한 국내 식품기업이 ‘웰빙(well-being)’ 콘셉트로 출시한 이 라면은 순식간에 최고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소비자 입장에서 하얀 라면 국물은, 이전까지 당연시돼온 ‘빨간 국물’에 비해 어쩐지 건강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당시 라면 회사들은 경쟁하듯 하얀 국물 라면 출시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 인기는 6개월도 안 돼 시들해졌고, 이후 라면 시장은 다시 ‘빨간 국물 라면’이 평정했다.

빨간 국물이 있는 먹음직스러운 사진

하얀 국물 라면의 ‘반짝 인기’ 이면에도 혀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 라면이 처음 등장한 건 지난 1963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라면은 ‘꿀꿀이죽’으로 대표되던, 주린 배를 채울 음식의 대체주자였다. 이전까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맛, 여기에 끓는 물만 있으면 한 끼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편리성 덕에 라면은 이후 50년 이상 한국인의 혀를 길들여왔다. 요컨대 한국인 식생활에서 라면이 차지하는 위상의 배경엔 고된 삶에 찌든 속을 얼큰하게 풀어주던 국물 맛과 거기에 중독된 혀의 기억, 그리고 라면 맛 자체의 중독성 따위가 자리하고 있다.
 

매운맛이 짠맛보다 중독성 강한 이유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할 때 과자처럼 단 음식을 찾는다. 단맛이 뇌 시상하부에서 (쾌감을 증대시키는)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단맛 외에 짠맛과 신맛, 쓴맛도 뇌세포와 직결된 미각세포가 인지하는 맛이다. 특히 김치와 얼큰한 찌개를 즐겨 먹는 한국인에게 짠맛과 매운맛은 유독 중독되기 쉽다.

햄버거와 감자칩이 놓여있는 사진

현대인은 다양한 의학 정보 덕분에 짠 음식이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에 치명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길들여진 입맛을 단번에 싱겁고 덜 매운 음식으로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체내 염분 농도가 갑자기 낮아지면 담배나 술을 끊었을 때처럼 일종의 금단 현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매운 소스가 가득 뿌려진 치킨 사진

매운맛이 지니는 중독성과 금단 증상은 짠맛의 그것보다 심각할 수 있다. 매운맛은 엄밀하게 말하면 미각이 아니라 통각(痛覺)의 일종이다. 따라서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우리 뇌는 입과 혀의 통증을 보상 받기 위해 ‘행복 바이러스 유발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다량 분비한다. 결국 매운 음식을 먹으며 느껴지는 잠재적 행복감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새 엔도르핀이 더 많이 분비되길 갈구하며 점차 ‘더 강한 매운맛’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혀가 짠맛이나 매운맛에 중독되면 미각세포에 강한 내성이 형성돼 점점 더 자극적인 맛을 원하게 된다. 이는 십중팔구 ‘과잉 섭취’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음식을 섭취할 때마다 ‘내 혀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을 거듭하다보면 누구나 바람직한 식습관의 바탕 위에서 음식의 참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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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테라피협회장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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