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무작정 여행’을 찬양함

2015/07/10 by 양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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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철 GQ코리아 에디터


장 콕토는 ‘셀럽(celebrity)’이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20세기 초반에 활동하며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여행을 특히 좋아했다.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를 건너던 중엔 찰리 채플린을 만나기도 했다(실은 콕토가 채플린의 탑승 사실을 알고 접근한 거지만).

둘의 만남은 훗날 서로의 기억에서 다르게 적혔다. 콕토는 자신과 채플린이 동갑이어서 잘 통했다고 기록한 반면, 채플린은 그의 자서전에 “우린 서로 너무 껄끄러운 사이가 되고 말았다”고 남겼다(‘헬로 굿바이 헬로’, 크레이그 브라운, 2015). “지구는 계속 회전하지만 목적지가 없다. 중요한 건 이 순간뿐이다.” 콕토는 자신의 말처럼 여행지에서 느낀 충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한 여행을 최대한 긍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여겼다(여기엔 자신의 여행을 자랑하려는 심리도 일부 깔려 있었다).

 

‘파리행 항공권 충동구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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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말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12월 21일, 연말 행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1일까지 회사 전체가 휴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는데 마냥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뒹굴 보내던 중 문득 비행기가 타고 싶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표를 알아봤다. 운 좋게 사흘 후 파리로 가는 항공권을 ‘너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명분은 결제 후 만들었다. 단지 ‘유럽 가는 비행기 표 중 파리행이 제일 싸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표 값은 할인해도 비쌌고, 11시간이나 비행해야 했으며,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여행 짐 싸기까지 감당해야 했다. 무엇보다 현지 날씨가 의외로 추웠다. 여러모로 기회 비용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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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파리에 가야만 하는’ 근사한 논리를 찾았다.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1월 6일까지 열리는 ‘프랑스 입체파(큐비즘) 미술 거장’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전시! 가끔 파리에 갔을 때 접했던 브라크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후 책에서 (사진으로 찍은) 그림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알아갔지만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그랑 팔레 전시 소개문은 브라크의 모든 그림을 싹쓸이한 듯한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오호라, 명분과 논리를 얻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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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순간은 경유지에서 찾아왔다. 성탄절 아침 도착한 그곳엔 캐럴도, 트리도, 크리스마스 인사말도 없었다.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완벽히 피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기독교와 가장 먼 곳이자 이슬람 국가의 중심, 아부다비였다. 급하게 떠나느라 예기치 않게 ‘성탄 아닌 성탄’을 접하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단 몇 시간이었지만 우주여행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물론 파리행 비행기를 타자마자 승무원이 내게 건넨 첫마디는 내가 여전히 ‘익숙한 지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건 흡사 꿈을 깨우는 ‘킥’, 영화 ‘인셉션’의 팽이가 멈출 때의 기분 같았다.

 

뜻밖의 여정이 선사한 ‘새로운 순간’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브라크 전시장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끝까지 새로움을 추구한 화가가 또 있을까?’ 새삼 생각했다. 1907년, 브라크는 피카소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입체파에 도전했다. 그의 작품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춘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브라크의 1911년작 ‘바이올린과 정물(Nature morte au violon)’은 커다란 잉어 같았다. 붓이 지나간 자리는 조명을 톡톡 튕겨내며 시선을 살짝살짝 옮길 때마다 좌우로 헤엄쳤다.

사실 입체파에 도전하기 전 브라크의 초기작도 무척 아름답다. 마티스와 세잔의 영향을 받아 색상은 쾨켄호프 튤립 농장처럼 화려하고 구성은 타이거 탱크처럼 안정적이다. 하지만 브라크는 자신만의 예술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래서 2차원 캔버스에 3차원을 그렸고(입체파) 종이를 풀로 붙였다(papier collé). 카네포르(canéphore, 제물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처녀)에 탐닉하는가 하면 당구대나 작업실 같은 공간을 집요하게 해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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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그때 화가 공성훈의 말이 떠올랐다. “아름답기만 한 건 파렴치합니다.” 브라크의 후기작들을 보며 그가 참 도덕적 예술가란 사실을 깨달았다. 브라크는 회화를, 미술을, 그림을 아무런 편견 없이 여행했다. 그 덕에 나는 ‘두려움 없이 새로움을 추구한 결과’가 쌓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했다. 파리 여행의 명분이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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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지겨워졌다. 익숙해서 선택한 곳이긴 했지만 ‘잘 안다’는 건 ‘새로운 충돌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튈르리공원에서 몇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 숙소로 왔다. 들어오는 길에 옆 방에 묵고 있는 자동차 연구원 A와 마주쳤다. 몇 마디 나눈 후 그가 보르도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무작정 합류했다. 이후 우린 보르도를 비롯해 숲과 바다 사이에 있는 거대한 모래 언덕 ‘뒨 뒤 필라(Dune du Pyla)’, 몇 달이고 머물러도 좋을 것 같은 아르카숑(Arcachon)까지 동행했다. 준비한 건 전혀 없었다. 음식점은 현지에 도착한 후 알아봤다. 사진은 (아주 조금만)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결정한 건 단 하나, ‘새로운 순간을 찾겠다’는 A의 진심에 동감하자는 것뿐이었다. A는 파리 파견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프랑스의 새로움을 찾고 싶어 했다. 난 그를 믿었다.

 

다행이야, ‘전혀 새로운 여행’이란 없어서!

해를 넘겨 1월 1일,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뭐든 시작하기 마땅한 날, 막연하게 생각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이전까지 내 여행의 목적은 ‘일상 탈출’이었다. 종종 ‘새로운 경험이 견문을 넓힌다’는 말로 자신을 설득하며 돈을 모으고 카드를 긁었으며 어렵사리 시간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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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이 너무 좋았다면 그 이유는 뭘까? 혹시 여행이 ‘너무 안 좋으면 안 되기 때문’은 아닐까? 투자한 돈과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는 욕심에 계획은 점점 많아진다. 찍을 사진이, 들러야 할 맛집과 박물관 목록이 마구 쌓인다.

알랭 드 보통은 2004년 펴낸 책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에서 “훔볼트 같은 탐험가는 구경하려는 목적을 지닌 여행자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다”고 말했다. 독일 탐험가 훔볼트는 19세기 초 남아메리카를 탐험했다. 그는 자신이 본 ‘신기한 모든 것’을 기록, 채집했다. 새로운 사실을 독일로 가져가고 싶어 했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사실은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몰랐던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게 궁금했던 청중은 따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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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훔볼트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지 200년이 흐른 지금, (화성이라면 몰라도) 지구상에 더 이상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대륙은 없다. 훔볼트가 ‘미지의 땅’ 남아메리카를 예상했듯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상상력만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지 역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극도, 남극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칠레도, 완벽한 원시를 보존하고 있다는 마다가스카르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어떤 여행도 새로운 사실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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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덕분에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한다면 어떨까? 대륙을 발견할 탐험가도, 사명감으로 사실을 발견할 과학자도 아니라면 ‘여행을 위한 준비’는 과연 어떤 의미일는지. 언제 어디서나, 혹은 여행지에 막 도착해서도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어렵다. 런던에 대해 ‘알기’보다 ‘모르기’가 훨씬 어렵다. 파리는?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니스가 가깝다는 건? 그런데도 우린 그 흔한 정보를 알아내려 발을 동동거린다. 하이드파크로 가는 길, 맛있는 파에야를 만드는 식당, 가장 ‘힙(hip)’한 쇼핑 장소를 찾기 위해 검색을 거듭한다. 무작정 새로움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른 채.

 

“마지막은 없다… 중요한 건 이 순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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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간중간 앉힌 사진들은 전부 작년과 올해 무작정 떠난 장소에서 찍은 것이다. 어떤 곳인지 완벽하게 모른 채 마주한 공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다시 볼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느껴진다.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뭘까? 장 콕토의 말을 다시 꺼낸다. “지구는 계속 회전하지만 목적지가 없다. 중요한 건 이 순간뿐이다.” 맞다. 지구는 목적지 없이 회전만 하므로 우리가 어디로 가든 그곳은 절대 마지막 도착지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다. 여행이 ‘매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탐사’로 남으려면 무작정 떠나는 게 오히려 정답일 수 있다. 장담하건대 이때 ‘지극히 개인적인 탐사’는 ‘훔볼트의 남아메리카 발견’만큼이나 소중하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양승철

아르스프락시아 팀장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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