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빵과 오븐에 얽힌, 고소하게 군침 도는 이야기

2015/10/23 by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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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 에세이] 빵과 오븐에 얽힌, 고소하게 군침 도는 이야기

박찬일 셰프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니까 1973년이나 1974년쯤의 일이다. 동네마다 가전제품을 월부(月賦)로 파는 장사치들이 돌아다녔다. 당시 한창 유행했던 게 빵 굽는 기계였다.

아마도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이었을 텐데 그 기계로 구워지는 결과물은 빵이라기보다 떡과 빵의 중간쯤 되는 음식이었다. 말하자면 단단하고 쫄깃한 떡보다 술빵(증편)에 가까웠다. 밀가루를 반죽해 (커다란 사각형 토스터처럼 생긴) 기계에 넣고 좀 기다리면 노란 빵이 덩어리째 나왔다. 설탕이 적절히 섞여 달콤한 빵이었다. 시내에 빵집이 있긴 했지만 특별한 날에나 들를 수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언제든 빵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집에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금세 시들해졌다. 당시만 해도 이유를 몰랐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기계로 만든 게 ‘빵’이 아니라 ‘찜’에 가까운 탓이었다. 빵은 구워야(bake) 제맛이다. 누룽지처럼 굽는 과정에서 그을리며 구수한 곡물 맛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 집에 있었던 기계는 (굽는 기계인) 오븐이 아니라 그저 찜통이었다. 당연히 구워질 리 없었다.

 

1970년대, 아련한 ‘술빵’의 기억

빵은 ‘물이 섞인 반죽을 불에 그을려 익혀 먹는’ 음식이다. 이스트가 사용되기 전 빵은 대부분 납작했다. 그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빵, 이를테면 피타브레드∙피자∙포카치아가 특히 그랬다. 그 원형은 중동 지역에 있다. 납작한 중동식 빵 차파티(chapāti)가 빵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빵을 만들 땐 이스트를 쓰기도 하지만 원래는 그냥 밀가루를 구워냈다. 이때 사용한 화덕은 납작한 돌이었다. 제인 하워드는 자신의 책에서 “빵 굽는 돌 밑에 불을 때서 그 위에 반죽을 구웠다”며 이집트인의 빵 굽기 동작을 묘사했다. 이 빵은 이스트를 써서 부풀리는 빵이 아니라 그저 그을려서 먹는 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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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는 빵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발효를 통해 부푼 반죽을 발견한 인류는 그걸 굽는 과정에서 더 부드럽고 맛있는 빵의 세계를 알게 됐다. 하지만 열을 가한 돌 위에 굽는 빵으론 이스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빵이 이스트의 영향을 받아 더 커지고 부드러워지려면 밀폐형 오븐의 존재가 절실했다. 이런 오븐은 기원전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했던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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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폐형 오븐은 열을 쓰는 원리가 다르다. 돌 위에 빵을 굽는 건 ‘전도열’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 밀폐형 오븐은 ‘대류열’을 이용한다. 뜨거운 열이 위로 치솟고 그게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워 재료를 익히는 방식이다. 일종의 건열(乾熱)이다. 반면, 습열(濕熱)은 물에 삶는 방식을 말한다. 뜨거운 오븐에 들어가면 반죽 속 이스트가 만들어낸 공기층은 더 팽창한다. 그 덕에 인류는 딱딱하고 납작한 빵에서 탈출,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유럽 빵은 왜 하나같이 딱딱할까?

내 경우, 동서양의 조리 방식 차이를 빵과 밥에 각각 비유해 설명한다. 서양에선 밀폐형 오븐에 부풀어오른 빵을 넣어 굽는다. 이 과정은 상당히 입체적이다. 밀폐형 오븐이 반(半)밀폐형, 혹은 개방형으로 기능할 때면 난방을 겸한다. 그래서 서양 집들은 하나같이 공기를 데워 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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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동양(특히 한국)에선 난방 수단으로 구들과 온돌을 쓴다. 전도열을 활용, 집을 따뜻하게 만드는 형태다. 바닥이 뜨끈뜨끈해지며 추위를 견디게 하는 식이어서 엉덩이는 뜨거운데 공기는 차가워 툭하면 코가 빨갛게 얼곤 한다. 예전 한옥의 난방 구조가 그랬다. 이런 방식은 입체적 서양 난방과 달리 평면적이다. 구들처럼 음식도 전도열과 습열에 의해 평면적으로 조리된다. 한국에서 오븐을 이용해 난방하는 건 별장 벽난로 등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뿐이다. 좀 억지스럽지만 서양 의복은 입체 재단, 한복은 평면 재단을 통해 각각 탄생하는 것도 영 다른 얘기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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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에 머물던 시절, 동네에 빵 굽는 오븐이 있었다. 남부 이탈리아는 집에 난방시설 자체가 없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 때문이다. 그래서 오븐은 대개 야외에 설치되곤 했다. 그런데 옛날엔 연료(나무)가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오븐 가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료와 빵 구울 재료가 완벽하게 모인 후에야 오븐에 불을 켰다. 한 번 불을 켤 때면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빵을 구워냈다. (벽)돌로 지은 오븐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빵을 굽는 풍습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이탈리아 빵은 대개 딱딱하다. 가끔 모여 구워내기 때문에 쉬이 상하지 않도록 물을 최대한 적게 넣었다. 자주 구울 수 있다면 수분을 더 많이 함유해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을 구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실제로 토스카나 지역의 빵은 상온에 몇 달을 방치해도 상하지 않는다).

 

때 아닌 ‘간식빵 vs 식사빵’ 논쟁

밥은 기본적으로 물을 넣고 짓는다. 그래서 그 자체로 윤기가 흐르고 맛도 있다. 하지만 밀가루는 다르다. 밀은 입자가 살아 있지 않고 가루 형태로 빻아져 있어 물로 반죽해 밥처럼 찌면 별로 맛이 없다. 밀가루 자체도 쌀만큼 맛있는 곡물이 아니다. 이래저래 불에 그을리는 오븐에 더 맞다. 맛을 더 좋게 하려면 ‘기름’이 동원된다. 기름을 배합하기엔 쌀보다 밀가루가 더 좋다. 기름과 반죽이 서로 잘 섞이고 그 상태로 오븐에 구우면 더 맛있어진다. 이때 소나 돼지, 오리 따위의 동물성 기름을 쓰면 맛이 더 좋아진다. 오늘날 빵을 구울 때 버터 등의 유지를 넣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당분이나 기타 맛을 더하는 요소들이 더해져 비로소 맛있는 빵이 완성된다. 한국의 빵은 대개 이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크림빵과 팥빵, 크루아상, 버터빵 등이 특히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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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유럽에선 빵에 유지를 섞되 설탕을 넣진 않는다. 이스트의 발효를 도우려는 목적 외엔 당분을 넣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식사용 빵은 특히 그렇다. 이 때문에 최근 국내에선 ‘식사빵 대 간식빵’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블로거를 중심으로 “한국인이 예부터 먹어온 간식빵(당분과 고명, 충전물이 많이 들어간)은 저급하며 당분 없이 구워진 유럽식 식사빵이 우월하다”는 논리가 퍼져나간 것이다. 물론 바게트나 치아바타 등의 식사용 빵이 거의 인기를 끌지 못했던 한국 특유의 빵 문화가 낳은 일종의 해프닝이다.

한국에서도 오븐은 이제 흔한 요리 도구가 됐다.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대개 오븐을 ‘빌트인’ 형태로 갖춰놓고 있다. 간혹 이 오븐 때문에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한다. 오븐을 난생처음 사용하는 주부가 그 안에 있는 설명서와 오븐 장갑 등을 꺼내지 않고 스위치를 켜는 바람에 연기가 피어 오른 탓이다. 실제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 오븐은 ‘잘 안 쓰고 쓰더라도 활용도가 제한적인’ 가전이었다(심지어 “이사 와서 이사 갈 때까지 빌트인 오븐을 한 번도 켜지 않았다”는 집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오븐 사용 인구가 꽤 늘었다. 그만큼 서양 음식이 널리 보급됐다는 얘기다. 오븐은 재료의 속까지 고루 익혀주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음식을 조리할 수 있으며, 조리 시 발생하는 열과 연기를 효율적으로 배출시켜준다. 반면, 예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에너지 소모가 많으며 열기도 (전도열에 비하면) 낮아 조리 과정이 더딘 건 단점으로 꼽힌다.

 

‘만능 조리 가전’ 오븐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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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오븐을 써서 만든 요리가 진짜 고급 요리’란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탈리아에 처음 갔을 당시 현지인이 오븐을 쓰는 광경이 퍽 신기했다. 늘 켜져 있는 식당 오븐은 아주 다양한 요리에 쓰였다. 해동은 물론이고 요즘 인기인 저온 요리에도 활용됐다(습도를 유지해주는 고급 오븐은 그 자체가 훌륭한 저온요리 도구다). 즉석에서 팬으로 익혀 완성되는 요리보다 미리 익혀뒀다 데워지는 요리가 많다보니 주방 일손도 한결 덜어졌다.

빵을 굽고 고기를 익히며 재료를 끓이기도 하는 게 오븐이다. 그런 오븐이 기술 발전의 혜택을 입으며 점점 ‘고급 가전’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요즘 어지간한 레스토랑에선 대당 1000만 원을 호가하는 오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븐이 요리를 다 해주는 건 아니지만 좋은 오븐이 요리 수준을 높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박찬일

셰프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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