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릴루미노가 선사한 빛, 그 빛으로 마주한 무대

주소복사

공연중인 장애인 무용수들
(사진 출처 : 주한영국문화원)

무대 위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구분되지 않았다. 휠체어나 보조도구에 의지한 채 무대에 오른 무용수들. 하지만 예술 안에서 그들은 한껏 자유로웠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선보인 몸의 대화는 낯설지만 아름다웠다. 다르지만, 아니 달라서 더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무대 아래, 그들을 ‘좀 다른’ 방법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기반 시력 보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릴루미노’로 공연을 관람한 저(低)시력 시각장애인들이었다. 앞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공연은 그저 ‘듣는’ 문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지난 18일, ‘굿모닝 에브리바디’가 상연된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종로구 동숭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얽히고설킨 사회, 다들 안녕하신가요?

굿모닝 에브리바디는 늘 파격적 무대를 선보여온 현대무용가 안은미<아래 사진>씨와 영국 칸두코댄스컴퍼니(Candoco Dance Company)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장애인·비장애인 무용수로 구성된 칸두코댄스컴퍼니는 ‘한-영(韓-英) 상호교류의 해’(2018)를 맞아 ‘다양성 존중 사회’를 응원하기 위해 이번 내한을 결정했다. 공연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모두에게 “지난밤 안녕하셨느냐”는 인사를 건네는 게 주된 메시지.

해당 공연을 기획한 안은미 안무가(사진 출처 : 주한영국문화원)

이번 공연을 연출한 안은미씨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각자 균형을 찾아가는 모습이 그려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안녕을 묻는 일은 결국 살아있는 순간을 확인하는 거잖아요. 크고 작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에너지가 투입되는지 표현하려 했습니다.”

▲릴루미노를 개발한 조정훈 CL과 김용남∙이찬원(왼쪽부터, 이상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씨는 이날 공연장 입구에 부스를 마련, 저시력 관람객에게 삼성 기어 VR과 릴루미노 앱을 제공했다

▲릴루미노를 개발한 조정훈 CL(Creative Leader)과 김용남∙이찬원(왼쪽부터, 이상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씨는 이날 공연장 입구에 부스를 마련, 저시력 관람객에게 릴루미노 앱이 탑재된 삼성 기어 VR과 갤럭시 노트8을 제공했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기획 의도에 공감, 저시력 시각장애인을 공연장에 초청해 함께 관람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사물이 왜곡되고 뿌옇게 보이는 시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미션’은 삼성전자 C랩(Creative Lab) 과제 중 하나이기도 한 릴루미노가 맡았다. 최소한의 시력만 남아있는 이에게 빛을 선물하는 릴루미노는 이날 과연 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배우 얼굴 볼 수 있다니… 꿈같아요”

▲공연 전 릴루미노를 착용한 채 함께 온 아들을 바라보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임삼자씨

▲공연 전 릴루미노를 착용한 채 함께 온 아들을 바라보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임삼자씨

공연 시작 30분 전. 아들 손을 꼭 잡은 저시력 시각장애인 임삼자(71)씨가 릴루미노 부스를 찾았다. “예전에도 릴루미노를 체험해본 적이 있다”는 그는 제법 능숙하게 삼성 기어 VR을 착용하고 초점을 맞췄다. 그런 다음, 옆에 서있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들, 수염이 이렇게 길었었어?”

임씨는 첫 체험 때보다 업그레이드된 릴루미노의 기능에 만족스러워했다. “지난번보다 훨씬 더 잘 보여요. 초점이 고정돼 굉장히 편안하네요. 평소 오페라나 뮤지컬을 좋아하는데 보러 오기가 어려웠거든요. 배우들의 얼굴은커녕 자막도 잘 안 보이니 공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죠. 오늘은 릴루미노 덕에 공연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관람객 권도연(15, 위 사진)양에게 릴루미노는 “맨 앞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 보는 게 유일한 문화 생활”이란 그에게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봐야 하는) 공연 관람은 한낱 허무한 꿈이었다. “공연장 제일 앞쪽 좌석에 앉으면 그나마 좀 보이는데 목도 아프고 많이 불편해요. 이제 릴루미노가 있으니 공연 보는 것도 한결 수월해지겠죠?”

시각 신경 위축[1]이란 장애를 예술혼으로 극복 중인 심규철(39, 위 사진)씨도 이날 공연장을 찾았다. 심씨는 안은미씨와 함께 무대에 선 적도 있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가. “요즘도 무용과 연극을 계속하며 자유와 부자유 간 경계를 넘나듭니다. 오늘 릴루미노를 만나 다시 한 번 ‘본다’는 행위가 얼마나 기쁜 건지 깨달았어요. 희망을 봤다고 해야 할까요?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계속, 오랫동안 무대에 서는 게 제 꿈입니다. 그 꿈, 릴루미노가 이뤄줄 수 있을까요?”

▲심규철(사진 맨 오른쪽)씨는 연극∙무용 등 다양한 공연 활동을 펼치는 현역 예술가이기도 하다. 사진은 심씨가 출연했던 연극 장면들

▲심규철(사진 맨 오른쪽)씨는 연극∙무용 등 다양한 공연 활동을 펼치는 현역 예술가이기도 하다. 사진은 심씨가 출연했던 연극 장면들

“릴루미노, 늘 약자 입장 헤아려주길”


(사진 출처 : 주한영국문화원)

이윽고 한 시간여간 계속된 공연이 막을 내렸다. 공연장은 이내 커다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만나 빚어내는 몸의 대화, 그리고 불가능을 향한 도전 정신에 매료된 관객들의 호응이었다. 김민솔(33)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공연장에선 세세한 장면까지 보지 못해 공연 관람 후 늘 놓친 부분을 찾으려 유튜브를 뒤지곤 했다”는 그는 이번 공연에서 릴루미노를 통해 색다른 경험과 마주했다.

▲공연 직후 김민솔(사진 오른쪽)씨가 김용남씨에게 릴루미노 착용 소감을 들려주고 있다

▲공연 직후 김민솔(사진 오른쪽)씨가 김용남씨에게 릴루미노 착용 소감을 들려주고 있다

“공연을 볼 때마다 늘 ‘배우나 무용수의 섬세한 동작이나 표정까지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극이 전개되며 바뀌는 감정을 하나하나 읽고 싶었거든요.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 바람을 이뤘어요. 공연 중반부, 휠체어를 타고 있던 무용수가 상체 힘만으로 바닥에 내려와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 공간에서 여럿이 함께 공연을 보고 무용수 감정에 몰입했던,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습니다.”

공연 직후 릴루미노 개발진을 만나 소감을 공유하기도 한 그는 “좀 더 많은 시각장애인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전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엄마는 제게 늘 ‘네가 조금이라도 더 잘 볼 수 있다면 뭐든 해주겠다’고 말씀하시거든요.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릴루미노 같은 기기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이 많아요. 언제나 더 불편한 사람의 입장에서 릴루미노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장애인과의 교감, 계속 이어갈 것”

사실 김민솔씨의 주문은 릴루미노 개발진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용남씨는 “오늘도 공연 내내 체험자들의 옆 자리에 앉아 모두가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은 물론, 무대와의 각도 등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많더라”며 “오늘 겪은 일을 꼼꼼히 기록해뒀다 릴루미노 성능 업그레이드 작업 시 적극 반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저시력 시각장애인의 릴루미노 체험기는 개발진에게 더없이 유용한 자산이다. 피아니스트 노영서씨와의 협업 과정을 거쳐 ‘다초점 기능’을 추가한 게 대표적 예<관련 기사는 여기 참조>. 이찬원씨는 “요즘도 릴루미노 사용자의 체험 후기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다”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기기를 활용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도 잦다”고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죠. 그래도 릴루미노는 계속 발전할 겁니다. 그러려면 보다 많은 시각장애인과의 교감은 필수예요.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릴루미노를 실제로 착용해본 저시력 시각장애인은 “릴루미노 덕분에 늘 나와 함께하는 가족의 존재를 한층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됐다”고 입을 모은다

▲릴루미노를 실제로 착용해본 저시력 시각장애인은 “릴루미노 덕분에 늘 나와 함께하는 가족의 존재를 한층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됐다”고 입을 모은다

칸두코댄스컴퍼니는 25년간 공연을 통해 장애와 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꿔온 세계적 무용단이다. 안은미씨는 “아직 국내엔 이렇다 할 장애 예술 단체가 없고 관련 환경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면서도 “(칸두코댄스컴퍼니와 함께한) 오늘 공연이 성사된 것만으로도 큰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칸두코댄스컴퍼니가 공연을 매개로 장애와 예술 간 경계를 허물었듯 릴루미노도 이 땅의 시각장애인이 직면한 장벽을 조금씩 낮춰갈 수 있길 기대한다.


[1] 시각 신경 섬유가 죽어서 시각 신경 원반이 작아지는 질환. 염증이나 종양에 의해 시력이 떨어진다

Samsung Newsroom Newsletter

구독 신청폼
닫기
SAMSUNG NEWSROOM
댓글

인기 기사

삼성전자 뉴스룸이 직접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단, 워터마크 적용 사진은 제외)

Samsung Newsroom Newsletter

구독 신청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