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트윈’, 제4차 산업혁명의 방아쇠 당길 수 있을까?
20세기엔 똑같은 모양의 검정색 자동차 단일 모델만 수십만 대 찍어냈던 일명 ‘포드(Ford)’ 공정이 대세였다. 하지만 ‘생산 라인 하나 만들어 두고두고 쓰던’ 시대는 진작 지났다. 21세기 기업은 정반대 방향으로 뛰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다양성을 앞세운 인터넷 세상에 걸맞게 점점 더 새로운 걸 추구하는 소비자 기호를 맞춰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대량 생산 공정으로 그걸 제대로 공급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이 난제를 해결할 돌파구, 있긴 한 걸까?
몇몇 호기로운 기업은 이 같은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한다. “생산 공정을 (고정된 기계 라인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처럼 만들면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기본적 자재와 생산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변 환경 변화에 적응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생산하고 그 결과물을 사용 가능할 때까지 돌볼(care) 수 있다면, 제품의 수명이 다한 후엔 재생(recycling) 궤도에 진입시켜 이를 다시 태어나도록 해줄 수 있다면 ‘한 번 해볼 만한 게임’이란 설명이다. 물론 이 같은 시나리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기기(device)뿐 아니라 공정(process) 자체가 똑똑하게(smart), 그리고 지능적으로(intelligent) 바뀌어야 한다.
생산 공정, ‘고정형’에서 ‘생장형’으로
만약 당신에게 ‘디지털 쌍둥이(digital twin)’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캐드(CAD, Computer Aided Design)로 구현된, 당신과 비슷한 모양의 3D 그래픽을 떠올릴 것이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의 쌍둥이를 만들어내는 일쯤은 오늘날 생산공정에서 그리 어렵잖게 실현 가능하다.
디지털 트윈은 ‘신개념 생장(生長)형 공정’을 한마디로 요약한 개념이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기민하게 대처해 성공적으로 살아남으려면 디지털 방식으로 구성된 제품의 ‘쌍둥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는 논리에서 처음 등장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가상 목업’의 사례
혹시 ‘목업(mock-up)’이란 단어를 아는지. 제품 디자인 과정에서 심미적 판단을 위해, 혹은 어느 정도의 기능을 예측하기 위해 일단 외관만 실물과 비슷하게 만든 모형을 일컫는다. 20세기의 목업은 나무나 플라스틱 등 가공하기 쉬운 소재로 완성됐다. 하지만 오늘날 목업은 대부분 캐드 따위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작된다. 이 ‘캐드 목업’은 실제 물건과 겉보기엔 다를 게 없지만 3D 기술을 적용,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 자유자재로 틀어서 볼 수 있다. 원하는 부분을 확대해 관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물이든 가상이든 현재까지의 목업은 처음 만들어진 상태 그대로 멈춘 채 존재한다. 디자이너가 특정 의도를 갖고 별도 요소를 투입하기 전엔 결코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반면, 디지털 트윈은 생산과 소비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가상각이나 돌발변수 같은 ‘예측 불가 요인’에 반응하고 그에 맞춰 신호를 보낸다. 시장에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변수들에 적절히 대응, 사후 조치한 후 다음 번 제품 생산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흡사 살아있는 인체가 환경 속 돌발 요인으로 손상을 입으면 통증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어딘가 아플 때 해당 부위를 응급 처치해 회복시키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디지털 트윈 체제에선 이미 시장에 나와 쓰이는 제품이라도 소비자의 요구나 환경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유연하게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이런 구조를 가능케 하는 원리는 뭘까? 생명체의 환경 변화 반응 기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의 몸은 부단히 변화하는 환경에서도 체온과 혈류(血流) 등 모든 조건을 평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체 표면과 내부에선 무수한 센서 세포가 끊임없이 활동 중이다. 이 세포들은 크든 작든 이상(異常)이 감지되면 다른 세포에 신호를 보내 해당 이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추가 피해도 막는다. 익히 알려진 면역 기능의 작동 과정이다.
생산 공정, 혹은 이미 생산된 제품의 사용 과정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가상 목업과 비슷한 방식으로 디지털 트윈을 만들고 △공정 관리자의 태블릿에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심은 후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에 센서를 설치해 △거기서 발생하는 신호가 태블릿 속 디지털 트윈에 실시간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정 제품(혹은 공정)의 디지털 트윈 프로그램 공유자는 언제 어디서나 제품 관련 문제 발생 여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들의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최적의 솔루션이 도출, 현장에 곧장 전달되고 가장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다. 모든 제품이 이런 방식으로 제작, 관리되면 생산 공정 오류로 인한 비용 손실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 요구에도 한층 더 완벽에 가깝게 부응할 수 있다.
비쌀수록, 진입장벽 높을수록 효과적
마이클 그리브즈(Michael Grieves) 미국 플로리다기술연구소(Florida Institute of Technology) 생애주기·혁신경영센터(Center for Lifecycle and Innovation Management, CLIM) 공동대표는 디지털 트윈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고 적극적으로 알려온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2014년 펴낸 ‘디지털 트윈 백서’에서 디지털 트윈 콘셉트 모델의 구성 요소를 △실제 공간에 존재하는 물리적 제품(physical products in Real Space)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가상의 제품(virtual products in Virtual Space) △가상·실제 제품 간 데이터와 정보의 연결성(connections of data and information that ties the virtual and real products together) 등 세 가지로 규정한다.
이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특정 제품을 예로 들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자전거는 어떨까?
디지털 트윈 체계에선 신규 모델 개발 시 종전처럼 단순히 3D 목업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온라인 신호가 반영되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이 적용된다. 자전거의 경우 이 신호는 바퀴 회전축을 비롯해 타이어∙핸들∙안장 등 각 요소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전달된다. 이 프로그램이 담긴 태블릿만 있으면 △바퀴에 전해지는 압력 △핸들의 융통성 △핸들과 앞 바퀴 연결 정도 △바퀴의 회전 속도나 강도에 따른 기기 상태 변화 등 다양한 속성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실물 자전거와 그것의 가상 3D 이미지, 이 둘을 연결하는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의 연결성. 이 세 요소가 자전거의 디지털 트윈 체계를 완성한다.
디지털 트윈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로도 구현이 가능하다. 자전거 바퀴 회전축에 부착된 QR코드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스캔하면 자전거의 속성과 상태를 알리는 메시지가 증강현실로 덧붙여져 보인다. 이를 통해 이미지 디자이너와 부품 관련 기술자가 각자 자기 태블릿을 보면서도 동일 기종 문제를 의논하며 품질을 높여갈 수 있다.
디지털 트윈은 단가가 비싼 제품, 혹은 생산∙사용 현장이 멀고 접근하기 어려운 제품의 경우 그 효과가 더 높아진다. 대표적인 게 (풍력 발전에 쓰이는) 풍차다. 풍차는 대당 제작 단가도 높을뿐더러 기후 등 주변 환경에 맞춰 제대로 설치해야 하는, 까다로운 제품이다. 일단 판매되면 오랜 기간 사용되는 데다 풍차 상태를 점검하는 기술자가 발전소에 상주하기도 쉽지 않다. 여러모로 디지털 트윈을 사용하는 게 유리하다. 에너지가 주된 수입원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irc, GE) 같은 기업이 디지털 트윈 방식 도입에 앞장서는 건 그 때문이다. 실제로 GE는 일찍이 “향후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고 생산 공정에도 디지털 트윈 체계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생산업 전반에 지각변동 일으킬 것”
디지털 트윈의 강점은 비단 제품의 생산∙관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장 떠오르는 예만 꼽아도 △제품 설계 부서와 생산 공장 간 거리가 먼 업종 △세계 각지에 생산 공장이 분포한 업종 △유행에 민감한 다품종 소량 생산 품목(이를테면 패션)이어서 지속적 디자인 업그레이드 작업이 필요한 업종 등은 모두 디지털 트윈 방식으로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지털 트윈이 모든 생산 공정에 적용되면 생산 합리화와 원가 절감까지 유도할 수도 있다. 종전까진 제품 생산 과정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현장에서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감지되는 이상 기류는 서류 형태로 보고되는 게 일반적이어서 자칫 못 보고 지나치는 오류가 적지 않았다. 설사 파악된 오류라 해도 서류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완전하게 표현되기 힘들어 누락되는 부분도 상당했다. 어렵사리 작성된 보고서를 전문가가 열람한다 해도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찌어찌 솔루션이 도출돼 업체에 전달되더라도 누락이나 왜곡을 완전히 피하긴 어려웠다.
반면, 디지털 트윈 체계를 적용하면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가 발생 단계에서부터 실시간으로 감지된다. 그 결과는 시각적 이미지로, 또 소프트웨어를 통한 구조 분석 결과로 전환돼 365일 24시간 관련 기술자와 관리자에게 전달된다. 이 방식을 도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내려가 상용화에 성공할 경우, 모든 생산 라인은 생태계처럼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디지털 트윈 체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트윈은 향후 모든 유형의 생산 공정에 도입될 게 분명하며, 종국엔 업계 전반이 근본적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더스트리얼 사물인터넷(IIoT)’의 꽃
사실 생산 업계가 디지털 트윈 체계를 떠올릴 수 있게 된 건 실시간 온라인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인프라 구축 덕분이다. 실제로 ‘센서를 활용한 기기 간 연결’을 뜻하는 센서라이제이션(sensorization) 기술은 날로 발전하는 추세다. 모바일 기기 보급률 역시 빠른 속도로 ‘1인 1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빅데이터나 클라우드, 그리고 대용량 중앙처리장치(CPU) 부문 발전 속도도 눈부시다. 이 모든 건 ‘인더스트리얼 사물인터넷(Industrial IoT, IIoT)’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트윈은 말하자면 ‘IIoT의 꽃’이다.
혹자는 디지털 트윈을 가리켜 “제4차 산업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석탄 중심 기계공업 시대’를 열었던 제1차 산업혁명 △20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석유 중심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던 제2차 산업혁명에 이어 △컴퓨터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제3차 산업혁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게 불과 수 년 전이다. 실제로 제레미 리프킨의 책 ‘제3차 산업혁명’이 출간된 건 지난 2012년.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3D 프린팅을 필두로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한) 제3차 산업혁명 관련 기사를 처음 게재한 건 2014년이었다.
최근 제기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나리오는 대부분 사물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3차 산업혁명과 가장 구분되는 지점은 생산방식에서의 ‘소통’ 유무다. △제품의 생산∙사용 과정에서 현장 센서를 통해 문제가 제기되고 △디지털 트윈 프로그램 공유자 전원의 집단지성으로 솔루션이 도출되며 △그 솔루션이 다시 생산∙사용 현장으로 전달돼 피드백 역할을 하는 ‘고리 구조’다.
머지않아 제품 자체가 보내는 신호는 물론, 제품 사용자의 반응도 실시간 피드백으로 전달되지 않을까? 그 단계에 이르면 생산자와 소비자 간 경계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활발한 소통의 장(場) 형성’이야말로 디지털 트윈이 촉발할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 특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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