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코리아’ 희망, 놓기엔 아직 이르다
안중우 성신여대 청정융합과학과 교수
지난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광복 60주년[1] 기념 8∙15 경축사에서 향후 60년간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과 성장 동력으로 일명 ‘저탄소 녹색 성장’을 제시했다. 지금도 비전공자에겐 ‘난해한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이 용어를 접한 당시 행정부 각료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비(非)정부 조직, 심지어 학계는 막막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탄소 녹색 성장이란 게 ‘저탄소와 녹색 성장’인지 ‘저탄소 성장과 녹색 성장’인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둘 중 어느 하나라 단정해도 그 실체가 안갯속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의무 감축 대상국도 아닌데…” 전 세계 시선 집중
그 와중에 2010년 1월,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약칭 ‘녹색성장법’이 제정됐다. 이후 이 법은 2013년 10월까지 도합 세 차례 개정을 거치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이와 관련, 정부 부처 간 역할 분담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
이 시절, 우린 ‘국가의 품격’이란 뜻으로 ‘국격(國格)’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해외 각국에선 한국에 대해 ‘IMF 외환 위기를 잘 극복한 나라’란 호평을 쏟아냈다. 자연히 한국의 국격도 상당히 높아지게 됐다. ‘저탄소 녹색 성장’이란 주제에 전 세계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사실 ‘저탄소’ 개념은 이미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이미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였다. ‘녹색 성장’ 개념 역시 학문적으로 대두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둘을 한데 묶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 온난화가스 의무 감축 대상국’에 포함되지도 않은 대한민국의 일탈(?)에 적지 않은 시선이 모인 건 그 때문이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기대하는 눈치들이었다.
‘무엇’과 ‘어떻게’ 빠진 채 각론 제시에 그친 정책들
‘저탄소 녹색 성장’ 슬로건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후 단계에서 실천적 정의나 총론을 내놓는 대신 행동 강령성 각론을 들고 나왔다. △자전거 인프라 확충 △LED 사업 육성 △연료전지 △전기∙하이브리드 자동차 등 하나같이 난데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이 같은 각론이 저탄소 녹색 성장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향후 60년간의 성장동력’이라기엔 매우 제한적인 게 사실이었다. 특히 국내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전기∙전자∙조선∙철강∙시멘트∙자동차 산업에 대한 재조명이나 새로운 접근 없이 이룩하는 저탄소 사회는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자연히 몇 가지 각론을 통한 중∙장기적 성장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what)’과 ‘어떻게(how)’ 측면에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해외 전문가들은 크게 실망했다.
당시 날 포함해 일부 전문가 그룹에선 청정 에너지 확산과 기존 산업의 녹색화, 녹색 산업 육성 등을 실천적 총론으로 제안했다. △신재생∙저탄소 에너지와 에너지 저장 장치 기술 개발로 미래 시장을 선점, 성장을 도모하고 △방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기존 산업에서의 저탄소∙저에너지 공정을 유도해 온난화 가스 배출량을 감소시키며 △LED나 친환경 자동차 등을 보급해 녹색 산업을 활성화시키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우리 정부가 이 조언을 따랐다면 지금 한창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 일자리 문제도 가뿐히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시내 곳곳에 자전거 길 내기에 열중했다. 연구개발(R&D) 지원도 초보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한국은 전무후무한 ‘글로벌 어젠다’를 선점하고도 저탄소 녹색 성장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여기에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대운하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며 국민적 외면까지 받게 됐다. 그 결과,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은 차기 정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온실가스 배출량 37% 감축” 선언, 이번엔 지켜질까?
지난해 12월 12일, 전 세계 195개국이 참여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파리 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됐다. 1997년 교토의정서 채택 이후 18년 만에 보다 강력한 새로운 기후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더 이상의 기후 변화를 방치하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 것’이란 데 세계 각국이 뜻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이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COP21에서 우리나라는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예상 성장치(Business As Usual, BAU) 대비 37% 감축하겠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국내 업계에선 “국제 경쟁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과도한 감축”이라며 엄살(?)을 부렸다. 반면, 환경단체들은 “(37%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은 감축률”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의 감축안이 실제로 적절한지 여부는 시각에 따라 엇갈릴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건 이제 국제 사회에 공표한 감축안의 달성 방안을 고민하고 행동을 개시할 시점이 됐다는 사실이다.
범세계적 합의에 따라 이후 우리 정부는 발 빠른 행보를 시작했다. 일명 ‘2030 에너지 신산업 확산 전략’에 따라 △에너지 생산∙거래 활성화 △저탄소 발전 △전기자동차 △친환경 공정 등을 주요 전략으로 내세운 것. △100조 원 규모의 시장 형성 △일자리 50만 개 창출 △온실가스 5500만 톤 감축 등 이에 따른 기대 효과도 상당하다.
하지만 여전히 몇 가지 점은 아쉽다. 일단 (친환경 공정에 포함됐는진 알 수 없지만) 기간 산업의 녹색화나 탈(脫)화석 연료화에 대한 구체적 명시가 보이지 않는다. 기후변화협약 대응을 ‘에너지’ 차원에서만 접근한 점도 다소 미흡하게 여겨진다. 에너지 저장장치와 (여전히 유효한) LED 산업, 당장 손에 잡히진 않지만 온실가스 감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이나 빅데이터 분야에 관한 논의가 통째로 빠졌다는 사실 역시 개운치 않다.
최소한 “늦었다” 아쉬워하며 두 번 후회하진 말아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2008년 광복절 경축사 때 처음으로 들었던 저탄소 녹색 성장을 그때 좀 제대로 했더라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누군가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진짜 늦은 거라고. 그래, 늦었다고 치자. 하지만 최소한 “늦었다”는 말을 두 번 하진 말아야 하지 않을까? 옳은 일은 제대로 해야 한다, 첫 번째 기회를 놓쳤다면 두 번째 기회에서라도(Do the right things right second time, if not first time).
[1] 지난해가 ‘광복 70주년, 건국 67주년’이었다고들 하지만 당시 계산법으론 2008년이 광복 60주년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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