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ABO를 찾아라’ 캠페인, 즐거움과 의미 둘 다 잡았다
지난해 6월 8일<이하 현지 시각> 영국 런던. 조간 신문 데일리미러를 받아 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1면 상단을 크게 가로지르는 제호(題號) 부분이 눈에 확 띌 정도로 달라졌기 때문. ‘Daily Mirror’란 글자가 있어야 할 부분엔 ‘D ily Mirr r’란, 익숙한 듯 낯선 로고가 박혀 있었다.
2015년 6월 8일, 런던 도심 뒤흔든 ‘사고’
같은 날 아침, 런던 중심가인 다우닝가(街) 1번지, 수상 관저 앞을 지나던 사람 중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방금 지나쳐 온 현관 쪽을 다시 돌아봤을 것이다. 기둥에 걸려 있는 주소 명판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으니까. ‘다우닝가 사우스웨스트 1번지, 웨스트민스터시(Downing Street SW1, City of Westminster)’라고 적혀 있어야 할 부분엔 드문드문 철자가 빠져 있었다, 이렇게. “D wning Street SW1, City f Westminster”
이날 영국에서 가장 큰 서점 체인 중 하나인 ‘워터스톤즈’ 본점 간판도 이상했다. ‘Waterstones’로 쓰여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건 ‘W terst nes’. 역시 드문드문 이가 빠진 채였다. 저녁 무렵, 어둑해진 런던 중심가의 시네마 콤플렉스 ‘오데온 스튜디오’ 방문객들 역시 기묘한 광경을 마주했다. 파란색 네온사인으로 유명한 ‘ODEON STUDIO’ 글자가 ‘ DE N STUDI ’로 바뀌어 있었던 것.
이후 1주일간 영국인들은 도심 곳곳에서 유사한 상황을 접했다. 유명 브랜드 로고와 상점 간판 할 것 없이 ‘철자 생략’ 행렬에 동참했기 때문. 코카콜라는 ‘C c C l ’로, 스타벅스는 ’St rbucks'로, 맥도널드는 ‘McD n ld’로…. 심지어 영국 국영 방송 BBC는 ‘ C’로 변신했다. 원래 자리에 있던 철자를 유추하지 않으면 당최 무슨 단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조치였다. 대체 그 7일간 영국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40% ‘곤두박질’ 헌혈자 수 회복할 묘안은?
‘사라진 ABO를 찾아라(Missing Type)’. 지난해 6월 8일부터 15일까지 영국 전역에서 전개된 캠페인 타이틀이다. 사실 이 기간은 영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헌혈(과 수혈)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지정한 일명 ‘국가 혈액 주간’이다. 영국 국립의료원(NHS, National Health Service) 혈액∙이식센터(Blood and Transplant)는 본격적 주간 운영을 앞두고 영국 내 유명 광고기획사 중 한 곳인 ‘엔진(ENGINE)’에 관련 캠페인 기획을 의뢰했다. 최근 10년간 40%나 줄어든 헌혈자로 인해 혈액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인 만큼 ‘뭔가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존 래이섬(Jon Latham) NHD 혈액∙이식센터 헌혈 마케팅 담당자와 엔진 내 캠페인 기획팀은 ‘수혈’과 ‘헌혈’이라는, 너무 익숙해 시들해지기까지 한 이슈를 다시금 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라진 ABO를…’은 그 결과로 탄생한 아이디어였다. 영단어 ‘미싱(missing)’은 ‘절실히 필요하다’는 뜻과 ‘빠져 있다’는 뜻을 함께 지녔다. ‘타입(type)’ 역시 ‘혈액형’을 의미하는 ‘블러드 타입(blood type)’의 줄임말이기도,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렇게 따지면 ‘미싱 타입’은 ‘절실히 요구되는 혈액형’인 동시에 ‘빠져 있는 글자’란 표현이 된다.
▲트위터 내 캠페인 관련 해시태그(#MissingType)를 곁들여 로고와 간판 등에 변화를 준 마이크로소프트·NHS·TESCO(사진 출처: 트위터/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혈액형이 세 개의 알파벳(A·B·O)으로 표시된다는 점에 착안해 다수의 눈에 띄는 유명 브랜드 로고나 간판, 표지 등에서 세 글자가 들어가는 부분을 빼고 빈칸으로 남겨두는 게 캠페인의 골자다. 기획팀은 이와 동시에 다수 미디어의 참여를 독려, ‘의료용 혈액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을 알리며 헌혈을 유도하고자 했다. 트위터에 캠페인 관련 해시태그(#MissingType)를 띄우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메시지 확산도 시도했다.
불과 1주일 남짓 동안 진행된 캠페인은 그야말로 영국을 뒤흔들었다. SNS 전략 역시 큰 성공을 거두며 세계적 ‘핫이슈’로 떠올랐다. 파급 효과는 결과 관련 수치로도 확인된다. 캠페인 개시 직전인 지난해 5월 영국 리서치 기관 ‘포퓰루스(Populus)’가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 혈액형이 뭔지 알고 있다”는 영국인은 응답자의 49%에 그쳤다. 같은 조사에서 “(록밴드 퀸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를 알고 있다”는 사람(51%)보다도 적은 수치였다. 이 같은 현상은 1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 층에서 유독 심했다.
하지만 캠페인 후 3개월 만에 실시된 또 다른 조사 결과, 캠페인 기간 중 헌혈 참여자는 3만600명으로 전년 대비 2만 명이나 증가했다. 그중 59%는 17세부터 34세 사이 연령층이었다. 구글·혼다·스포티파이·캐드버리·도브·나우TV 등 1000여 개의 다국적 기업과 영국 내 (중소)기업은 “캠페인 취지에 동참하겠다”며 자신들의 로고와 웹사이트에서 A·B·O가 들어가는 곳을 자발적으로 비웠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자체 채널을 가동, 캠페인 지지 메시지를 퍼뜨리기도 했다. 유명 인사들의 참여도 줄을 이었다. 제인 엘리슨(Jane Ellison) 영국 공중보건부(Public Health)장관을 비롯, 요리 프로그램으로 세계적 스타가 된 셰프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 등은 몸소 헌혈에 참여한 후 자신의 이름에서 A·B·O를 제외한 서명을 SNS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기간 중 소셜 미디어를 통해 캠페인을 접한 사람 수는 약 1억4700만 명. 같은 기간 영국(과 북웨일즈) 내 미디어가 다룬 캠페인 관련 뉴스는 1000건 이상이었다. 돈 들여 광고하려 했다면 약 380만 파운드(약 54억7000만 원)의 거금을 들여야 기대할 수 있는 효과다. 상복도 이어져 △마스터즈 오브 마케팅 △캠페인 빅 어워즈 △D&AD 등 영국 내 톱 랭킹 홍보∙마케팅 상을 29개나 휩쓸었다(2016년 6월 기준). 지난 6월 말 개최된 ‘칸느 라이언즈 국제 창의성 페스티벌’에선 ‘건강과 웰니스’ 부문 금메달과 ‘사이버’ 부문 동메달을 거머쥐기도 했다(칸느 라이언즈 페스티벌에 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지난 6월 15일자 스페셜 리포트 ‘스토리, 감동으로 연결하다’를 참조할 것).
올해는 ‘20년간 헌혈 캠페인’ 삼성도 동참
기대 이상이었던 성과에 힘입어 엔진 측은 이 캠페인의 ‘세계 진출’을 기획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게 ‘2016 인터내셔널 미싱 타입(International Missing Type)’이었다. 지난 15일부터 역시 1주일간 세계 22개국에서 동시에 진행 중인 이 글로벌 캠페인엔 삼성전자도 동참하고 있다.
▲‘인터내셔널 미싱 타입’ 캠페인에 참여했던 다양한 기업들의 로고(사진 출처: 존 래이섬, ‘미싱 타입 인터내셔널(Missing Type International)’ 발표자료/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혈액은 현대 의료 체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조건 물질 중 하나다. 혈액을 공급 받으려면 거의 전적으로 기부, 즉 헌혈에 기댈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응급 환자 가족이나 친척의 피를 즉석에서 뽑아 쓰기도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평상 시 불특정 다수에게서 기부 받은 혈액을 항(抗)응고제 처리한 후 혈액은행에 보관했다가 병원 등 필요한 곳으로 보낸다. 적십자사(Red Cross) 같은 국제 비영리 단체의 지원이 더해지는 것도 이 단계에서다.
혈액 기부자 수가 급감하는 건 비단 영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이슈다. 삼성은 일찌감치 이런 현실을 직시,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헌혈 행사를 꾸준히 펼쳐왔다. 대표적인 게 지난 1996년부터 지속해오고 있는 그룹 차원의 임직원 헌혈 캠페인. (1년 중 공급이 가장 달리는) 동절기 혈액 수급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매년 2월 실시하는 이 행사의 누적 참가 임직원은 29만여 명. 올해도 1월 21일부터 2월 28일까지 22개 계열사에서 1만여 명이 동참했다.
▲올 1월 삼성그룹이 실시한 헌혈 캠페인에 동참, 헌혈을 실시하고 있는 삼성물산 임직원들
삼성은 일선에서 헌혈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적십자사 후원 역시 계속해왔다. 대표적 예가 (혈액검사기와 혈액냉장고, 헌혈용 침대 등 전용 장비를 갖춘) 헌혈 버스 지원. 지난 2012년엔 삼성생명이 한 대, 올해는 삼성그룹이 두 개를 각각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했다. 헌혈 봉사는 계열사별로도 진행된다. 삼성SDI는 지난 2009년부터 임직원 한 명이 헌혈할 때마다 회사가 5000원을 후원, 대한적십자사에 기부하는 일명 ‘레드 러브 도네이션(Red Love Donation)’ 행사를 펼치고 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임직원 한 명이 헌혈할 때마다 회사가 1만 원을 후원,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기부한다. 삼성전자 역시 2006년부터 자체 헌혈 캠페인을 지속해오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혈액 기부 봉사에 동참해온 삼성의 입장에서 이번 캠페인 동참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삼성전자는 행사 기간 중 삼성닷컴 웹사이트에서 ‘A’를 제외한 ‘S MSUNG’ 로고를 노출시키는가 하면, 공식 채널인 국·영문 뉴스룸을 통해 관련 콘텐츠를 발행하는 등 광범위한 노력으로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남의 불행’에 냉담한 현대인, 진심 되찾다
세상을 좀 더 나은 곳,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 변화를 효과적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문자답한다. 인터내셔널 미싱 타입은 그런 이라면 누구나 반색할 메시지를 품고 있는 캠페인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든 몇몇 수치는 캠페인의 열기를 전하는 표면적 사례에 불과하다. 타인의 불행에 냉담한 이들의 가슴을 두드려 ‘내 피를 나눠서라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진심을 이끌어낸 비결, 도대체 뭘까?
실제로 동일한 의문을 품은 여러 논객이 이 캠페인의 성공 요인을 다각도로 분석, 발표했다. 그중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건 이 캠페인의 가공할 대중 동원력이 ‘인터넷(과 모바일) 세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논조다. 이와 관련, 영국 정부 디지털 서비스(Government Digital Service, GDS)에서 디지털 테이크업(digital take-up, 사용자가 디지털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데이브 월리(Dave Worley)는 “미싱 타입 캠페인은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해서 성공한 측면이 있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다른 모든 디지털 테이크업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 미싱 타입(사라진 ABO를 찾아라) 캠페인은 일단 그 의미가 튼실하다. 디지털 문화와 기반구조를 잘 활용한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재미(fun)’ 요소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여럿이 즐겁고 재밌게’ 할 수만 있다면 놀라울 정도의 효율성을 보이며 거뜬히 수행해내는 존재, 란 사실을 이보다 명쾌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 빠진 철자’ 몇 개로 헌혈의 가치를 되새긴 이번 캠페인의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은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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