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톨스토이문학상 수상 작가 3인을 만나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3년부터 야스나야폴리야나박물관과 공동으로 야스나야폴리야나톨스토이문학상(Yasnaya Polyana Tolstoy Literary Awards, 이하 ‘톨스토이문학상’)을 제정, 시상해오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정신이 계승된 러시아 문학 후원’을 표방하는 톨스토이문학상은 러시아어로 쓰인 문학 작품 가운데 톨스토이의 문학세계와 고전적 형식미를 담아낸 산문을 심사 대상으로 한다. 지난해까지의 수상자는 총 27명.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회가 대규모 소요(騷擾)로 고통 받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자신의 삶과 글에서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전파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약 240㎞ 거리에 위치한 야스나야폴리야나장원(莊園)은 톨스토이의 고향인 동시에 그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주요 대표작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지정,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1828~1910)
▲야스나야폴리야나장원에 위치한 톨스토이의 고향 집
삼성투모로우는 톨스토이문학상 역대 수상자 중 대표 작가 3인을 초대해 그들의 문학적 세계관을 주제로 온라인 좌담회를 기획했다. 아래는 세 작가와 각각 진행한 지면 인터뷰(영문) 결과를 번역, 좌담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등장 작가 프로필
예프게니 보돌라즈킨(Evgenij Vodolazkin)
대중·평단 두 마리 토끼 잡은 ‘러시아의 움베르토 에코’
1964년 키예프 출생. 러시아 고전문학 전문가로 45세 때 쓴 데뷔작 ‘솔로비요프와 라리오노프(Solovyov and Larionov)’가 2010년 러시아 최대 문학상 중 하나인 ‘빅북어워즈(Big Book Awards)’ 최종심 후보 목록에 오르며 주목 받았다. 두 번째 소설 ‘라우루스(Laurus)’로 빅북어워즈 대상과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으며 대중과 평단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현지에선 ‘러시아의 움베르토 에코’로 통한다.
엘레나 카티쇼녹(Elena Katishonok)
‘맛깔나는 러시아어 향연’ 펼치는 라트비아 여성 작가
라트비아 출신 여성 작가. 라트비아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했다. 1991년 도미, 미국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시작(詩作)·편집·번역 활동을 펼치고 있다. 데뷔작은 2005년 발표한 시선(詩選) ‘블록노트(Bloknote)’.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민담을 모티브로 러시아어 특유의 맛을 잘 살렸다”는 평을 얻은 소설 ‘옛날 옛적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There was an old couple, 2009)’로 2011년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했다.
바실리 골로바노프(Vassilij Golovanov)
공간에 내재된 인간성 탐구로 ‘지리시학’ 장르 개척
작가 겸 저널리스트. 매번 독특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다. 비문학 작품이었던 데뷔작 ‘남부에서 온 타찬카: 마흐노프 운동 연구(Tachankas from the South: a Study of the Makhnov Movement, 1997)’는 ‘러시아 내란을 다룬 최고의 글’로 꼽힌다. 러시아 아르항겔스크주(州) 소재 콜구예프섬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책 ‘섬, 혹은 의미 없는 여행의 핑계(Island, or an Excuse for Pointless Travelling, 2002)’로 ‘지리시학(geopoetics)’ 장르를 대표하는 저술가가 됐다. ‘섬, 혹은…’은 2005년 프랑스 베르디에 출판사에서 출간돼 현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9년 골로바노프에게 러시아 출판부장관상과 톨스토이문학상을 각각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종교? 결국 ‘살고 죽는’ 문제더라
삼성투모로우(이하 ‘투모로우’) 우선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톨스토이문학상의 제정 의도가 ‘톨스토이 문학정신의 계승’에 있는 만큼 수상자 여러분의 작품 어딘가에 톨스토이의 문학세계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특히 신앙 등 정신세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점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런 작품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이기도 합니다.
예프게니 보돌라즈킨(이하 ‘보돌라즈킨’) 러시아 현대 문학에서 신앙(종교)의 비중이 상당한 건 공산주의의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공산주의가 한때 종교를 반대하는 힘으로 작용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났고 이제 러시아에서 종교는 상당히 흔해졌습니다. 혁명 이전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오늘날 러시아에서 종교의 힘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1992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공산주의도 무너지며 이념적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를 종교가 채운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어떤 것도 새로 발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수백 년간 러시아가, 또 러시아 국민이 걸어온 길이었으니까요.
▲2013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 보돌라즈킨
투모로우 보돌라즈킨씨의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작 ‘라우루스’는 일명 ‘그리스도의 바보(Fool of Christ, 혹은 Holly Fool)’에서 소재를 취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어로 ‘유리디비(Yuridivy)’로 불리는 이 개념은 ‘현세를 비판하고 신앙 세계에 몰두한 나머지 광인(狂人) 취급을 받지만 한편으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보돌라즈킨 네, 맞습니다. ‘라우루스’는 종교계 인사뿐 아니라 이제 막 종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시작한 사람, 심지어 비(非)신도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였죠. 모든 독자가 이 작품을 읽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돌아보게 됐다”며 고마워했어요. 사실 살고 죽는 문제만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엘레나 카티쇼녹(이하 ‘카티쇼녹’) 전 신에 대한 믿음이 ‘인간 영혼의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방(room)’과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 공산주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죠. 실제로 제 작품 ‘옛날 옛적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의 주인공은 일명 ‘올드 빌리버(old believer)’입니다. 올드 빌리버는 구교도 ‘라스콜니크’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요. 이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러시아 정교와는 독립된 ‘특별 분파’로 줄곧 같은 신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작가로 산다는 것, 그리고 디지털리티
투모로우 신앙에 관한 한 골로바노프씨는 ‘근본적이면서도 다소 급진적인 관념을 지닌 작가’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평론가는 골로바노프씨에 대해 “믿음과 샤머니즘(shamanism)을 얘기할 때 행복해하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2009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 골로바노프(맨 오른쪽)
바실리 골로바노프(이하 ‘골로바노프’) 우선 한국 독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해 삼성전자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 가져주시는 것도요. 사실 신앙이나 샤머니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샤머니즘만 해도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수많은 종족이 지켜온, 가장 오랜 영적(靈的) 전통의 하나입니다. 아직 관련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없어 잘 알진 못하지만 영성(靈性·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건 사실입니다. 그 주제만 나오면 정말 깊이 빠져들고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그 얘길 합니다. 작가로선 제 독자에게 ‘기술보다는 영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영성보다 기술에 의존해온 이제까지와 달리 말이죠.
▲골로바노프(맨 오른쪽)은 ‘섬, 혹은 의미 없는 여행의 핑계’로 2009 톨스토이문학상 ‘21세기 신인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투모로우 하지만 기술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단적인 예로 여기저기서 ‘요즘 세상은 디지털리티(digitality) 없인 굴러가기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골로바노프 삼성투모로우 블로그 독자들은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컴퓨터는 제 작업 도구일 뿐입니다. 워드와 포토샵, 메일, 그리고 15년간 작업해온 서고(書庫)는 모두 제 작업을 용이하게 해주죠. 하지만 타인의 정서와 의견으로 가득한 블로그 공간엔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게 영향을 주거나 매달릴 수 있는 그것들에 휘둘리는 것보다 황량한 바닷가에서 명상을 즐기는 편이 훨씬 좋아요. 제겐 이 세상의 ‘실재(reality)’가 디지털리티보다 훨씬 감동적입니다.
보돌라즈킨 우리가 몸담고 있는 디지털 세계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전자제품은 인간 행동을 돕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격을 결정 짓는 것 역시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핵에너지는 ‘도시 난방과 조명의 원천’으로 각광 받고 있지만 언제든 ‘도시 파괴의 주범’으로 탈바꿈할 수 있죠. 전 인류의 모든 발명이 ‘준비된’ 건 아니란 사실이 걱정스럽습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현대인을 볼 때마다 어쩐지 어린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곤 해요.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려면 우리 손에 쥔 기술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기술 사용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새로운 책임감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을 텐데요.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카티쇼녹 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디지털리티는 내 작업과 온전히 나란히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보존하며,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견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제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다양한 평을 올리고, 전 그걸 읽으며 ‘진짜 사람들의 진짜 삶’을 배웁니다. 독자들은 자신의 조부모 얘길 들려주는가 하면, 제 소설 속 할아버지·할머니와 그들을 종종 비교합니다. 가끔 자기 조부모 사진을 보여주는 독자도 있죠. 디지털리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지난 스무 세기’와는 다른 삶 그린다
투모로우 카티쇼녹씨 말씀을 들으니 디지털리티가 ‘인간의 과거를 소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재(혹은 미래) 기술’로 여겨집니다. 사실 ‘과거와 미래’는 카티쇼녹씨뿐 아니라 다른 두 분의 작품 세계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2011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 카티쇼녹
카티쇼녹 러시아를 포함한 요즘 서구세계 독자들은 인간의 역사, 그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 과거를 다룬 책에 높은 관심을 보입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만 따지면 더없이 취약합니다. 과거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죽어버리면 역사의 조각도 그와 함께 사라지니까요. 전문 역사서의 관점은 해당 시대 상황을 읽어내는 필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소설에서 과거의 참모습을 찾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과거 전승과 관련된 정보에 목말라 하는 건 거기서부터 앞으로의 인생 방향을 찾기 위해선지도 모르겠습니다.
골로바노프 스무 세기를 거쳐 오며 인간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죠. 그렇기 때문에 20세기까지의 사람들과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1년 인류 최초로 지구 일주에 성공한 러시아 우주비행사 가가린(Yurii Gagarin)은 처음 우주를 접한 후 “지구는 인류의 안식처이며 우주적 고향”이라고 말했다죠. 그 이후 우리는 이전 사람들처럼 새로운 땅을 찾았다 해도 그걸 대상화하거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릴 순 없게 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니까요. 전 시간이 날 때마다 세계 각지를 여행합니다. 여행 도중 마주치는 풍경을 통해 지구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황폐해진 지구를 만든 장본인이 우리란 사실, 그리고 그 결과가 복잡한 생명의 거미줄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교훈도 깨닫게 되죠. 제가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목적은 독자들이 ‘오늘날 인류가 지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작가는 ‘유의미한 소수’ 목소리 대변자
투모로우 골로바노프씨 얘길 들으니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인류는 ‘지구는 되도록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돌라즈킨 인간은 합리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닙니다. 상당 부분 비합리성의 영역에 놓여 있죠. 인간을 ‘절대적 합리성’으로 인식할 경우 커다란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비합리적 영역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전통(tradition)’입니다. 전통은 종종 불합리하지만 중요한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논리적 구조가 맞지 않더라도 이 경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합리성을 인간의 최대 경쟁력으로 내세운 게 근대 서구사회인데요. 서구사회가 크고 작은 오류를 범하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인간이니까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철학은 곧 자기 파괴로 이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파의 철학에 반대하는 사람은 종종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죠. 하지만 정말 그가 미친 사람일까요?
▲보돌라즈킨(왼쪽)은 소설 ‘라우루스’를 통해 ‘독자에게 삶과 죽음을 일깨웠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투모로우 그러고 보니 ‘라우루스’ 속 유리디비야말로 다수파 철학에 맞서 광인 취급을 받는 존재란 생각이 드네요. 사실 다른 두 분의 작품 세계에서도 ‘힘 있는 소수’의 목소리가 종종 유의미하게 등장하곤 합니다.
보돌라즈킨 실제로 “유리디비는 미친 짓을 가장해 미친 세상을 보여준다”는 성가(聖歌) 속 한 구절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작품 속 ‘그리스도의 바보’는 단순한 웃음이나 도발이기보다 눈물에 가깝습니다. 유리디비가 등장하는 성가 구절은 또 있는데요. 거기선 유리디비를 “낮엔 세상을 비웃고 밤엔 세상을 위해 우는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일종의 반세계(anti-world), 혹은 반문화(anti-culture)인 셈이에요. 어느 곳에서나 반문화의 표상은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은 일반인의 그것과 배치되죠. 반문화는 주류 문화가 자신의 존재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일정한 순기능을 발휘합니다.
▲카티쇼녹(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은 제1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혁명, 제2차 세계대전 등 격동의 시기를 겪은 러시아 노부부를 통해 ‘단순한 삶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카티쇼녹 광인과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옛날 옛적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 속 할아버지의 역할도 ‘힘 있는 소수’로 볼 수 있겠네요. 그는 말하자면 ‘숨은 현자(賢者)’ 같은 사람인데요. 그의 지혜와 힘은 친절한 태도, 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식에서 나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것도, 아주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요즘 세상에선 쉬이 찾아보기 힘든 삶의 태도죠. 물론 그런 방식이 현대 사회에서 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단순한 인생 진리’를 믿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골로바노프 여행을 다닐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인간’이란 사실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문화란 그 과정을 통해 풍부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따지고 보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은 더더욱 아니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길목이 과거 지배적 형태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로 향해 있거든요. 아마 이 사실을 제일 먼저 느낀 부류가 작가일 겁니다. 실제로 이런 감수성과 메시지를 글로 녹여내는 작가가 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역할 역시 ‘앞서가는 소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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