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_‘신(新) 호모파베르’의 탄생

2015/09/15 by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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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신 호모파베르의 탄생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국내 최고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보세요. 매주 화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학용 부산대 사물인터넷산학협력단 교수


 

이동 시 흔들림을 방지해주는 방송용 카메라 안정 장치(stabilizer), 사람 얼굴의 움직임을 인식해 반응하는 디지털 광고판, 사용자 동작에 따라 구동되는 게임기, 360도 파노라마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기, 새처럼 두 날개로 하늘을 나는 장난감…. 지난달 1일부터 이틀간 개최된 ‘2015 도쿄 메이커 페어(Maker Faire Tokyo 2015)’에서 만난 일부 전시품의 면면이다. 대부분 개인이 취미 삼아 만든 것들이라지만 당장 상용화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하나같이 수준급 기량을 갖추고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2015 도쿄 메이커 페어’에서 선보인 전시품들. 개인 참가자들이 취미 삼아 출품한 작품이지만 하나같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수준급 기술을 갖췄다.▲‘2015 도쿄 메이커 페어’에서 선보인 전시품들. 개인 참가자들이 취미 삼아 출품한 작품이지만 하나같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수준급 기술을 갖췄다

 

‘메이커 운동’ 시발점 된 메이커 페어

메이커 페어는 지난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서부 소재 도시 샌머테이오(San Mateo)에서 시작됐다. 이후 해마다 규모가 커져 20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베이에어리어, Bay Area)와 뉴욕에서 각각 진행된 행사의 참관객은 16만 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메이커페어는 미국 주요 도시를 비롯해 영국∙독일∙캐나다∙이탈리아∙중국∙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크고 작은 규모로 진행된다. 국내에서도 2012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올해 행사는 다음 달 10일부터 이틀간 국립과천과학관(경기 과천시 상하벌로)에서 열릴 예정이다.

메이커페어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가져와 보여주고(show) 얘기 나누는(tell) 행사다. 따로 정해진 참가 자격도 없다. 엔지니어와 과학 동아리 멤버는 물론, 공예가∙교육자∙아티스트∙작가 등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연령에 관계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올해 도쿄 메이커 페어 행사장에서도 어린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줄잡아 200개가 넘는 팀이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참관객 중엔 ‘숨은 사업 아이템’을 찾는 기업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혹은 가족 단위로 행사장을 찾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도 한 번쯤 생각한 적이 있었던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구현된 걸 접하고 놀라는가 하면, 엉뚱한 발명품 앞에선 폭소를 터뜨렸다. 전시품의 기술적 우위를 논하는 관람객보단 해당 전시품의 탄생 계기에 공감하고 그 제작 과정을 공유하는 관람객이 훨씬 많았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에게 직접 뭔가 만들어보도록 유도함으로써 ‘만드는 일’의 중요성과 즐거움, 그리고 ‘왜 직접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피부로 느끼게 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메이커페어 열풍은 2000년대 후반부 일명 ‘DIY(Do It Yourself)’ 유행의 도화선이 됐고, DIY는 이후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으로 이어졌다. ‘필요한 걸 직접 만든다’는 측면에서 메이커 운동은 DIY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몇몇 다른 점도 있다. DIY가 톱과 대패, 망치 등 전통적 도구를 이용해 생필품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메이커 운동은 오픈소스 플랫폼과 CNC 밀링 머신(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 milling machine), 3D 프린터 등을 활용해 (취미로) 뭐든 만들어보는 작업이다. 이렇게 완성된 회로도와 도면, 소프트웨어 코드는 개발자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는 동시에 타인의 요구에 맞춰 변형(혹은 발전)된다.

키보드 위에 다양한 아이콘의 블럭들이 쌓여있다.

 

호모파베르, 그리고 호모루덴스

2015 도쿄 메이커 페어 행사장에서 대단한 물건이나 기술만 소개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라면 스프 터는 기계 △뚜껑이 자동으로 여닫히는 물티슈 △렌즈 안쪽에 LED 램프를 부착해 마치 영화 속 터미네이터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일명 ‘터미네이터 선글래스’ △일정 주기마다 ‘Ctrl+S’ 버튼을 눌러줘 그때까지 작업한 걸 자동으로 저장해주는 장치<아래 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등 ‘이게 정말 전시품 맞나?’란 생각이 들 만큼 엉뚱한 물건이 적지 않았다.

라면 스프 터는 기계, 뚜껑이 자동으로 여닫히는 물티슈, 렌즈 안쪽에 LED 램프를 부착한 터미네이터 선글래스, 일정 주기마다 ‘Ctrl+S’ 버튼을 눌러줘 그때까지 작업한 걸 자동으로 저장해주는 장치등이 2015 도쿄 메이커 페어에서 소개 되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자아내는 전시품들을 보며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제작 배경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대체 왜 이런 물건들을 만들었을까?’ 이들은 그저 ‘못 말리는 괴짜’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들에겐 ‘도구적 인간’, 즉 호모파베르(Homo Faber)의 피가 여느 사람들보다 더 많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메이커스(Makers: The New Industrial Revolution)’ 저자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의 말처럼 누구나 집에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개인 제작(personal fabrication)’ 환경이 보편화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전시장을 돌며 수많은 ‘메이커’들과 대화 나눠본 결과, 내 생각은 좀 달라졌다. 그들은 단순히 괴짜여서 이상한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개인 제작 환경이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작품 제작에 열중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저 뭔가 만드는 일이 즐거워서’였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해맑았다. 스스로 뭔가 만드는 과정 그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게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그들은 호모파베르가 아니라 (만들기를 놀이처럼 즐기는) ‘유희적 인간’ 호모루덴스(Homo Ludens)였던 게 아닐까?

 

호모파베르의 진화… “일도 놀이처럼”

뭔가 만들어본다는 건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무형의 생각을 구체화, 형상화하는 작업이란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에게서보다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에게서 더욱 신뢰를 느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호모파베르는 당초 ‘도구를 이용해 유∙무형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처음 소개한 용어다. 하지만 호모파베르가 단순한 메이커와 동의어는 아니다. 진정한 호모파베르는 뭔가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운명이나 환경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보다 발전적 의미에서의 메이커를 뜻한다고 보는 게 맞는다.

한 사람이 블럭을 쌓고 있다.

원래 호모파베르와 호모루덴스는 상반되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전자는 ‘일하는 사람(working man)’을, 후자는 ‘노는 사람(playing man)’을 각각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실 호모파베르와 호모루덴스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 때론 호모파베르처럼, 또 때론 호모루덴스처럼 노는 듯 즐겁게 일하고 만드는 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운명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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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스위트홈’ 고민하면 ‘스마트홈’ 따라온다

by 김학용

부산대 사물인터넷산학협력단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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