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로테르담식(式)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교훈
김진국 배재대 중소기업컨설팅학과 교수
해외 선진국의 도시재생 사례와 직업교육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로테르담을 방문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 최대 항만 도시인 이곳에선 옛 공간의 매력을 충분히 살린 바탕 위에 새 시대의 문화 공간을 덧입히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철공소 등이 밀집해 있던 문래동(서울 영등포구) 일대 골목길이 값싼 임대료를 찾아 이주해온 아티스트들 덕분에 ‘예술가의 거리’로 탈바꿈한 사례 등이 종종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로테르담식(式)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불과 몇 년 만에 서울 거리에까지 상륙한 것이다.
‘폐허 직전 조선소’가 어엿한 대학으로
로테르담 방문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광경은 항구 한 귀퉁이에 버려져 있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조선소·창고를 개조해 만든 대학과 직업학교였다. 일명 ‘RDM(Research·Design·Manufacturing) 캠퍼스’로 불리는 이 공간은 알베다 칼리지(Albeda college)와 로테르담대학교(Rotterdam University), 그리고 로테르담항만공사(The Port of Rotterdam Authority)의 합작품이다. 더욱 놀라웠던 건 이 모든 과정이 정부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민간 부문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렇게 설립된 학교를 지켜보며 ‘우리가 도울 일이 뭘까?’ 고민하고, 그 공간이 보다 창조적으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들 지역의 접근성이 높아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업체가 둥지를 틀며 자연스레 산학협동이 이뤄졌다. 이는 이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로 이어졌다.
사실 이 지역은 우연찮은 계기를 통해 탄생했다. 한때 세계 시장을 호령했던 네덜란드 조선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며 쓸모 없어진 조선소 건물이 대량 매물로 나오게 된 것. 학교 설립자들은 이곳을 헐값에 사들인 후 뼈대만 남기고 간단한 공사를 거쳐 직업학교와 공업전문대학, 공과대학 등을 차례로 설립했다. 흥미로운 건 각각의 학교가 나름의 연계성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업학교에서 제품 전 단계의 부품이 제작되면 △전문대학에서 이들 부품을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공과대학에선 제품 생산에 필요한 기본 역학 등 이론적 교육과 소프트웨어 설계 작업이 진행되는 식이다.
더 놀라웠던 건 바로 다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었다. 직업학교를 지나 큰 철문을 열어젖히자 옛 조선소의 공작창이었던 공간이 나타났다. 학교와 연결된 이 건물엔 높은 천장을 활용, 각종 로봇과 기계장치 등이 들어서 있었다. 학교 교육과정과의 연계성을 유지하며 각자의 사업을 운영해가고 있는 크고 작은 스타트업들이었다. 서로 다른 학교가 사이좋게 공간을 나눠 활용하는 풍경도, 상호 보완성에 초점을 맞춰 교과과정을 개선하는 모습도, 그 옆에 나란히 위치해 새로운 제품 생산에 도전하는 스타트업들의 도전도 하나같이 내 눈엔 경이로웠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실용주의의 힘
자칫 폐허로 골칫거리가 될 뻔했던 로테르담 조선소 재활용 사례를 보며 문득 우리나라 현실이 떠올랐다. 현재 시행 중인 각종 지원책도 상당수는 규제성 지원이다. 최악은 ‘기업이 망하면 어쩌나’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지원이다. 이런 정책은 결국 ‘좀비기업’만 양산할 뿐이다. 기업은 성공하기도, 실패해 사라지기도 한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따라서 사라지는 기업을 애달파할 게 아니라 잘하고 있는 기업이 훨씬 더 잘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시장에서 제대로 대우 받을 수 있도록 시장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경제의 생태계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잘하고 있는 기업엔 “이제 됐으니 적당히 해라”라며 눈치를 주고, 소비자에게 더 나은 상품을 더 나은 가격에 제공하려는 노력은 “이윤만 노리는 탐욕”이라며 질책한다. 이래선 결코 국내에서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나오기 어렵다. 이윤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데 대해 시장이 내린 포상’으로 봐야 한다. 위험 부담을 견디고 혁신을 거듭하며 얻어낸 ‘좋은 경영’에 대한 대가란 얘기다.
왜 우린 ‘협업하는 모델’ 구축에 서툰 걸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이다. 로테르담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스스럼없이 모여 토론했다. ‘모름지기 학교는 상아탑이므로 되도록 조용하고 고즈넉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다. 또한 목적이 같다면 함께 모여 일하는 과정에서 우리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로테르담식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성공 비결엔 ‘문제 해결’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네덜란드인 특유의 사고방식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가, 저렇게 하면 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사사건건 부정적 의견을 내놓기보다 적절한 양보와 대안 마련, 절충 과정을 통해 크고 작은 걸림돌을 과감히 제거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 결과, 버려진 조선소 건물엔 서로 다른 세 학교가 사이 좋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인근 스타트업과 기존 기업 역시 이들을 믿고 교사(校舍) 내에 사무실을 만들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기업과 대학이 이렇게 노력하는 동안 로테르담시는 이들이 벌이려는 일을 최대한 도우려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행여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이런저런 규제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대한민국 (지방)정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사고로의 전환 필요
“우리 시는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학교와 기업을 향해 ‘뭘 도와주면 이들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시정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자연스레 학교가 들어섰고 각종 스타트업이 둥지를 틀었으며 글로벌 강소기업이 생겨나게 됐죠.” 로테르담시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내심 ‘우리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창조적 경제 생태계는 결코 정부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다. 기업이, 대학이, 시민이 각자 스스로 문제를 발견한 후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들을 도우려는 (지방)정부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새로운 창조경제의 씨앗은 시민과 기업, 스타트업 등을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정부가 존재할 때 비로소 틔워질 수 있다.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진 않을까?’ 사사건건 감독하고 감시하려 해선 우리 경제의 앞날이 결코 밝을 수 없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사고를 벗어나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사고로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글로벌 강소기업의 선순환 생태계 조성’은 시민과 기업의 노력, 그리고 이들의 노력을 장려하는 정부의 지원이 더해져야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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