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어느 날, 파블로 네루다가 날 찾아왔다

2015/11/24 by 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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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어느 날, 파블로 네루다가 날 찾아왔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국내 최고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보세요. 매주 화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판사


 

일에 쫓기며 살다보니 깊어가는 가을도 느끼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 보낸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대부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일 터.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딱딱한 법 얘기 대신 시인의 삶,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졌다. 주인공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다.

 

대자연과 에로스를 언어로 품었던 시인

흔히 네루다를 가리켜 ‘민중시인’ ‘혁명시인’으로 일컫는다. 하지만 날 맨 처음 매료시킨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날 감전시킨 건 이른 봄 저녁에 읽은 단 한 구절(“난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너와 하고 싶다”)이었다.

네루다의 생애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 중 ‘사랑의 시 14’의 일부인 이 시구를 읽고 ‘갓 스물의 젊은이가 어떻게 이 짧은 몇 마디 언어로 대자연의 섭리와 에로스를 넉넉히 품어낼 수 있을까?’ 경탄하며 매혹됐다. 그 외의 모든 건 내게 사족(蛇足)이었다.

‘어떤 삶이어야 이런 시를 쓸 수 있게 되는지’ 궁금해 네루다의 자서전과 그의 시집들을 읽었다. 망명 전후의 그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1994)도 봤다. 하지만 남의 해석에 갇히고 싶지 않아 그에 대한 평론은 부러 읽지 않았다. 고로 이 글은 오로지 내가 그에게 매혹된 이유들에 관한 얘기다.

소년 시절, 네루다는 칠레의 원시림과 그 속 생명체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자서전 첫머리에서 그는 선언한다. “칠레의 숲 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햇빛이 들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 네루다의 경험은 평생 그를 사로잡았다. 당시 그는 비단 아름다운 풍경에만 매혹된 건 아니다. 풍뎅이와 메추리 알, 딱정벌레가 장난감이던 아이에게 생명이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경이(驚異)’였다.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대지에서 나고 자란 경험은 평생 그의 내면에 ‘호기심 넘치는 소년’을 남겨놓았다.

그래서일까, 절망적 시대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의 시엔 좌절이나 냉소가 아니라 희망과 낙관이 있다. 인간이 빚은 어떤 죽음의 시대에도 대자연의 눈으로 보면 무수한 생명의 기적이 태어나고 자란다, 는 사실을 그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을 갓 벗어난 청년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는 여체(女體)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매혹으로 가득하다. 그의 시엔 성(性)에 대한 금기나 보수적 윤리의식에 따른 주저함이 전혀 없다. 숲 속에서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딱정벌레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는 이성의 육체가 갖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찬탄한다. “대자연은 부끄러워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에 붙어 있는 장수풍뎅이의 사진입니다.

 

아름답지만 허약한, ‘나비 날개’ 같았던 삶

자연과 생명, 여인의 육체에서 출발한 그의 사랑은 고통 받는 민중과 스페인 침략자의 학살로 비롯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사소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확대됐다. 시집 ‘지상의 거처’를 썼을 당시 극동에서 겪은 절망적 고독과 관념적 비관을 넘어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통해 얻은 시대적 전망, 타인과의 연대의식 발견 등이 합쳐지며 ‘위대한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비로소 완성됐다.

이후 그의 작품은 단순한 것, 이를테면 양말∙양파∙수박∙소금 따위를 장중하게 기리는 노래로 이어진다.

폐허가 된 건축물의 사진입니다.

네루다는 자서전을 쓰는 도중 죽음을 맞는다. 그가 사랑했던 칠레 국민들의 짧은 승리로 성립된 민선 정부, 그리고 그의 영원한 정치적 동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칠레 대통령에 대한 전 세계 민중과 지식인의 지지는 냉혹한 현실 세계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아름답지만 허약했다.

그의 자서전 중 마지막 몇 줄은 칠레 공군이 대통령궁(宮)을 폭격하고 칠레 육군이 탱크를 몰고 진격해 기관총으로 대통령의 육신을 난사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로 피가 튀며 갑작스레 마무리된다. 실제로 그의 최후 역시 갑작스러웠다. 아옌데가 타살된 지 불과 12일 후 사망한 것. 그의 자택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약탈, 파괴됐다. 이후 40년이 흘러서야 암살 의혹을 밝히고 사인(死因)을 규명하기 위해 그의 시신 발굴 작업이 이뤄지지만 딱히 밝혀진 건 없었다.

 

죽을 때까지 철들지 않았던 ‘영원한 소년’

난 왜 중년에 이르러 새삼 네루다에 매혹된 걸까? 분명한 건 결코 그가 위대하거나 완벽한 인간이어서, 가 아니란 사실이다. 내가 본 네루다는 쾌락에 탐닉하고, 방탕했으며, 모순 덩어리였다. 매사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으며 툭하면 구차한 변명을 일삼았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순간의 격정에 심취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열정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순정한 언어로 찬양했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오로지 자기 가슴이 내리는 명령에 충실했다. 그건 소년의 전형적 특성이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편입되면서 본인 가슴의 명령보다 주변의 눈치에,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을 더 충실히 따른다. 그러면서 점차 귀머거리에 장님, 벙어리가 돼간다.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이 그렇다.

한 아이가 큰 나무에 기대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루다는 죽는 순간까지 ‘철들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는 평생 대자연에, 육체적 사랑에, 고통 받는 이웃의 순수함에, 함께 이룩할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꿈에 매혹돼 침을 튀겨가며 그 감상을 시로 옮겼다.

일찌감치 철들어 조로(早老)해버린 우린 그에게서 먼 옛날 우리 안에 살았던 소년을 떠올린다.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커다란 딱정벌레에 흥분하고 도톰해지는 이웃집 여학생의 가슴 곡선을 훔쳐 보며 설레 하던 그 소년 말이다. 우린 모두 그 소년을 사랑했다. 우리가 네루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철들지 않는 시인에 대한 매혹이 현실 세계로 오면 비극으로 귀결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인 우편배달부 ‘마리오’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섬 카프리에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심해어처럼 고요하게 살던 마리오는 영화에서 네루다가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열광 받는 장면을 접한 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시인이 되고 싶어한다.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사진입니다.

때마침 카프리섬으로 망명한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하며 마리오는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가며 둘은 친구가, 사제(師弟)가, 동료 시인이 된다. 이후 그는 날 때부터 늘 곁에 있어 범상하게만 대하던 바다와 하늘, 별의 아름다움을 ‘언어’란 도구로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만 흠모하던 여인 ‘베아트리체’를 시(詩)의 힘으로 품에 안는다.

하지만 세상은 마리오가 자연과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네루다가 섬을 떠난 후 줄곧 그를 그리워하던 마리오는 민중에 대한 네루다의 사랑과 혁명에 대한 열정까지 혼자 터득한다. 그는 자신의 열정과 그리움을 담아 네루다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이미 ‘온 세상 사람들의 별’이 돼버린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답장할 여유조차 없다. 기다림에 지친 마리오는 스스로 네루다가 돼 혁명의 여정에 나선다. 하지만 ‘로맨티스트 시인 혁명가’가 현실 세계에서 마주치는 건 차가운 총탄뿐. 시간이 흐른 후 카프리섬을 찾은 네루다가 마주한 건 ‘한때 마리오의 전부였고 도저한 생명력으로 빛났지만 어느덧 신산한 삶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여인의 모습이다.

 

시(詩), 그 치명적이고도 황홀한 니르바나!

우린 호롱불에 매혹돼 날개가 타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다가가는 부나방처럼 시인에게, 그리고 혁명가에게 매혹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마약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실제로 마리오 역을 맡은 배우 마시모 트로이시(Massimo Troisi)는 영화 촬영을 위해 심장 이식 수술을 미루면서까지 연기에 몰두했고, 영화 촬영이 끝난 지 정확히 12시간 만에 사망했다

호롱불의 사진입니다.

부나방은 (비록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만) 호롱불에 다가가 타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타오르는 불꽃이 돼 주변을 환히 비춘다. 우린 시(詩)가 남루한 일상에 찾아드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오직 시만이 선사할 수 있는 ‘황홀한 니르바나(nirvāṇa∙열반)의 순간’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 이 칼럼에 언급된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도서(와 수록 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파블로 네루다 글, 정현종 옮김, 민음사)

   – '사랑의 시 14' '한 여자의 육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박병규 옮김, 민음사)

△'네루다 시선'(파블로 네루다 글, 김현균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 '커다란 기쁨' '시(詩)'

 

 

by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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