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프로 스포츠구단의 주인은 누굴까?
강준호 서울대 스포츠경영학 교수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2015년 2월 24일, 수원월드컵경기장은 특별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시아의 라이벌’ 수원삼성블루윙즈(이하 ‘수원삼성’)와 우라와 레즈(일본 J리그 소속 구단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편집자 주)가 벌인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1차전에서 수원삼성이 짜릿한 2대 1 역전승을 거둔 것. 그날 관중 수(1만3806명)는 수원삼성의 AFC 챔피언스리그 역대 홈 최다 관중 수를 뛰어넘었다. 수원삼성은 서정원 감독의 리더십과 프런트의 마케팅 노력 모두 결실을 맺으며 올 시즌 기분 좋은 출발을 예고했다. 그날 경기를 지켜보며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대표하는 수원삼성과 우라와 레즈의 차이점은 뭘까?’
우라와 레즈 ‘눈물 상품’에 담긴 메시지
10년 전 여름, 우라와 레즈 구단을 방문한 적이 있다. 공식 기념품 숍을 둘러보던 중 특이한 상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소주잔 크기의 작은 병 여러 개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세트였다. 술이나 음료는 아닌 듯했다. 호기심을 못 참고 직원에게 액체의 ‘정체’를 물어봤다. 대답을 듣곤 깜짝 놀랐다. 지난 2000년 우라와 레즈가 2부 리그로 강등 당했을 때 선수들이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란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팬과 구단은 하나’란 메시지를 보여주는 이 ‘눈물 상품’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우라와 레즈 팬들의 ‘붉은’ 함성과 함께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J리그 대표 구단인 우라와 레즈는 성적에 관계 없이 평균 관중 수 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자랑한다. J리그 평균치의 두 배가 넘는 4만여 명 수준이다. 2위 팀과도 1만 명 이상 차이를 보인다. 2000년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팬들의 지지는 변함없었다. 2006년 1부 리그를 평정하고 2007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차지한 전성기엔 평균 관중 수 4만7609명(2008년 기준)을 넘기며 J리그의 역사를 다시 쓰기도 했다. 2011년엔 1부 리그 18개 구단 가운데 15위를 차지해 간신히 2부 리그 강등을 면했지만 여전히 평균 관중 수는 1위였다. 한 구단이 성적과 무관하게 이처럼 지속적으로 압도적 평균 관중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라와 레즈 팬들은 스스로를 ‘구단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인종 차별 사건에서 보듯 잘못된 주인의식을 가진 팬도 있다.) 자신을 ‘고객’으로 여기는 팬과 ‘주인’으로 생각하는 팬은 그 생각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 고객은 서비스가 나빠지거나 더 좋은 경쟁 상품이 나타나면 금세 마음을 바꾼다. 수원삼성과의 경기에 1000명 이상의 우라와 레즈 팬이 원정 응원을 왔다. 그들이 자신을 ‘(우라와 레즈의) 고객’으로 여겼다면 주중에, 자기 돈을 들여 한국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내 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팀을 ‘그냥 좋아하는’ 것과 ‘내 팀으로 생각하는’ 것도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는 팀도 실망스런 결과를 보이면 좋아지지 않는 법이지만 내가 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구단의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을 모두 함께할 수 있다. 주인의식은 팬 서비스로 얻을 수 없다. 구단이 진정성과 개방성을 토대로 존재 목적에서부터 경기 운영에 이르기까지 팬을 주인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100년 앞’ 내다보는 일본 프로 스포츠
우라와 레즈는 일본 3대 재벌 중 하나인 미쯔비시그룹이 60% 미만의 지분을 갖고 있다(51%는 미쯔비시자동차의 지분율이다). 나머지는 지역 기업과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다. 겉으로 봐선 우라와 레즈의 모(母)기업이 미쯔비시란 사실을 알기 어렵다. 스폰서 중 하나로 목록에 올라와 있는 것 외엔 구단 이름에도, 사무실에도, 유니폼에도 미쯔비시가 없다. 미쯔비시는 구단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 건 물론, 재정 지원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지역을 대표하는 우라와 레즈 구단이 있을 뿐이다. 구단의 경영자료는 모두 공개된다. 팬이 곧 주인이기 때문이다.
구단을 향한 지역 주민의 주인의식은 J리그 출범 전략의 핵심이었다. 한국보다 10년 늦게 출발한 J리그는 시작부터 철저히 ‘구단 중심’이 아니라 ‘리그 중심’을, ‘기업 중심’이 아니라 ‘지역 중심’을 지향했다. 기업 의존도가 높으면 구단 이기주의가 리그 전체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고, 이는 결국 모든 구단에게 ‘마이너스 요인’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구단 명칭을 정할 때도 기업명은 배제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 구단의 반발과 저항이 상당했지만 ‘기업 의존도를 낮춘 지역 밀착형 리그 시스템’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던 가와부치 사부로 당시 J리그 회장이 오늘날과 같은 J리그 시스템을 관철시켰다.
더 나아가 J리그는 ‘100년 구상’을 발표했다. 100년 구상은 축구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지역 주민, 그리고 미래 세대인 청소년의 삶의 일부가 되도록 스포츠 환경과 문화를 만들겠다는 비전과 계획이다. 푸른 잔디 위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응원하며 개인과 지역, 그리고 일본 사회 전체가 행복해지는 미래를 꿈꾼 것이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을 내다본 것이다. 이 멋지고 담대한 프로젝트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우라와 레즈는 J리그 100년 구상의 리더가 되고자 했던 셈이고, 그런 노력은 압도적 평균 관중 수로 구현됐다.
‘팬’이 주인 되는 구단 탄생을 기다리며
수원삼성도 K리그를 대표하는 구단이다. K리그 4회 우승, FA컵 3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의 화려한 성적에 평균 관중 수 1위(1만9608명, 2014년 기준), ‘그랑블루’에서 ‘프렌테 트리콜로’로 이어지는 강력한 서포터즈 문화, 삼성그룹의 든든한 재정 지원 등 아쉬울 게 없는 구단이다. 우라와 레즈와 비교할 때 관중 수를 제외하면 경기력과 마케팅, 시설, 직원 역량 등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두 구단의 차이는 모기업의 존재감과 재무구조, 구단의 철학에서 드러난다. 수원삼성은 연고지를 앞세우지만 명칭을 비롯해 구단 곳곳에 ‘삼성’ 브랜드가 녹아있다. 팬 서비스를 열심히 하지만 이 모든 게 궁극적으로 ‘삼성을 위해서’란 사실을 누구나 안다. 구단의 주인은 삼성인 것이다. 또한 삼성의 재정 지원이 없으면 구단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 재무적으로만 따지면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중환자와 다름없다. 수원삼성이 지향하는 철학도 뚜렷하지 않다. 구단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느낄 수 없다. 이는 비단 수원삼성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내 프로 스포츠구단과 리그의 공통점이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는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이 기업에 압력을 넣으며 시작됐다. 민주화된 이후에도 기업은 여론을 의식해 마지못해 구단을 운영했고, 구단은 모기업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성적 그 자체를 지상 목적으로 삼았다. 모기업 입장에서 구단은 기업의 홍보 수단, 즉 ‘코스트 센터(cost center)’일 뿐이었다. 팬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기업을 위해 경기를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단 사장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리그 이사회라기보다 모기업 대변인 모임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고, 선수 연봉이 올라갈수록 구단의 적자 규모는 커져갔다. 선수는 프로페셔널이고 팬들도 프로페셔널을 원하는데 정작 구단은 프로페셔널이 아니었던 것이다. 국내 언론에서 여전히 ‘관중 동원’이란 용어가 등장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서른 살을 넘긴 한국 프로 스포츠는 이제 부모에게서 ‘홀로서기’ 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늦었지만 프로 스포츠를 위해서나 모기업을 위해서나 자생력을 갖춘 ‘지속가능한 시장 생태계’를 갖춰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는 마케팅 기능을 강화하고 구단 직원 역량을 제고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고 철학의 문제다. 주인이 ‘기업’에서 ‘팬’으로 바뀌는 패러다임 전환이 전제돼야 한다는 얘기다.
열쇠는 구단이 아니라 모기업 총수들과 리그가 쥐고 있다. 역사의 돌파구는 리더가 만든다. 한국 프로 스포츠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가와부치 사부로 회장처럼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진 리더가 절실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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