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전자제품에 따뜻한 감성 불어넣는 ‘언어 디자이너’ 박은주 선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직업 세계에도 마치 가랑비처럼 ‘도드라지진 않지만 알고 보면 그 영향력이 적지 않은’ 직무가 존재한다. 박은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UX혁신팀 선임의 일이 딱 그렇다. 전자 제품의 세세한 완성도를 책임지는 ‘UX라이터’. 이름도 생소한 그 직군에 종사하는 박 선임을 만나기 위해 삼성전자서울R&D캠퍼스(서초구 우면동)로 향했다.
스마트폰 ‘설정’ 메뉴 내 기능 설명, 누구 작품일까?
▲갤럭시 S7 카메라의 다양한 모드 관련 설명들. 전부 박은주 선임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이란 단어에서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화면 구성이나 디자인 등이다. 하지만 글 역시 UX의 핵심 구성 요소 중 하나다. 단적인 예가 스마트폰이다. 실제로 요즘 출시되는 스마트폰 내 ‘설정’ 화면에 들어가면 생소한 기능이 적지 않다. UX라이터는 이 같은 기능을 사용자가 쉽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글로 설명하는 일을 한다.
UX라이터는 한동안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업무의 성격 자체가 ‘기술(technic)’보다 UX와 더 관련성이 커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박은주 선임은 “UX 디자인은 사용자가 ‘배려 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전자제품에 시각적 감성을 불어넣는 작업”이라며 “그중에서도 UX라이터는 제품에 들어갈 명칭과 문구를 고민하고 적절한 정보량을 판단하는 등 ‘언어적 감성’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기술 최초 사용 ‘특권’… 사내 협업과 소통 중요
UX라이터는 대부분 협업 형태로 작업한다. 혼자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박은주 선임 역시 일과 중 UX디자이너들과 논의하는 시간이 꽤 된다. 새로운 기술에 대해 설명 들어야 할 때가 많아 개발진과의 회의도 잦은 편. 박 선임은 “사내 다른 직군과 소통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일이 쉬워지고 결과물도 잘 나온다”고 귀띔했다.
특정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면 UX라이터는 그와 관련, 모든 과정에 등장하는 문구를 고민한다. 박 선임은 “직무의 특성상 다양한 신기술을 소비자보다 한발 앞서 접하는 경우가 잦은데 개인적으론 그런 경험이 무척 즐겁다”고 귀띔했다. 그는 “실제로 지문 인식 기능을 미리 접했을 때, 그리고 삼성 페이를 공개 전 단계에서 사용했을 땐 마치 나 혼자 미래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갤럭시 시리즈에서 유지돼온 기본 기능 관련 문구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매번 새로운 기능에만 집중하느냐”는 질문에 박 선임은 “절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갈 때 재차 검토 과정을 거친다”며 “여러 개발자가 사용해본 후 문장이 길거나 설명이 부족하단 느낌을 받으면 다시 회의를 거쳐 수정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2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공개된 갤럭시 노트7의 경우, 설정 화면 문구가 갤럭시 S7에 비해 간결해진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역시 박 선임을 포함한 UX라이터들의 작업 결과다.
직무 성격이 독특한 만큼 일하며 겪는 어려움은 없을까? 박은주 선임은 “어떤 제품이든 사용자 개개인의 성향이나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하는 표현을 찾긴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최대한 모든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발굴해내려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예전엔 다른 사람에게 제 업무를 소개하는 게 어려웠는데 요즘은 노하우가 생겼어요. 이를테면 ‘비행기 탑승 모드’ 같은 표현을 만든다고 하면 대부분 알아 듣더라고요.”(웃음)
화려하진 않지만 꼭 필요한, 기업 내 ‘명품 조연’
▲갤럭시 스마트폰엔 시각장애인을 위해 바탕화면 테마를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기능이 탑재됐다. UX라이터의 역할이 돋보이는 대표적 사례다
혹 지금 갤럭시 S7를 사용하고 있다면 기기를 찬찬히 살펴보자. 박은주 선임을 포함, ‘단어 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 없는’ UX라이터들의 노력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갤럭시 S7 ‘비디오 에디터’ 테마 중 ‘Peaceful’이란 단어가 있어요. 한국어로 직역하면 ‘평화로운’ 정도가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고치니 의미가 잘 안 와 닿더라고요. 고민 끝에 ‘힐링’이란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되도록 우리말을 사용하려 노력하지만 이미 익숙해져 의미 전달이 용이한 외래어 사용을 굳이 피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갤럭시 노트7에 새롭게 적용된 ‘홍채 인식 기능’이란 용어도 고민의 산물이다. 박은주 선임은 “‘홍채’란 단어를 기능명에 포함시키기까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비교적 쉽게 결정한 ‘지문 인식’ 용어와 달리 홍채의 경우 처음엔 사용자에게 보다 친근한 ‘눈’이나 ‘눈동자’ 같은 단어를 사용하려 했다, 는 게 그의 설명. 홍채 등록 과정을 설명할 때도 “크게 뜨세요”라고 표현하기가 망설여졌다고. 자칫 눈 작은 사용자의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사숙고 끝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 판단했고, 결국 최종 선정 단계에서 그대로 채택됐다.
박 선임에 따르면 UX라이터는 업무적 보람이 상당한 직업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작업할 때가 특히 그렇다. “갤럭시 S7의 ‘설정’ 내 ‘접근성’ 항목으로 들어가면 시각장애인용 기능을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바탕화면 테마를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식이죠. (갤럭시 S7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기능까지 있구나!’ 싶어 좀 놀랐고, 제 업무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단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스포트라이트는 으레 주연 배우를 향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뒤엔 무수한 조연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화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갤럭시 스마트폰이나 기어 시리즈를 비롯, 다양한 삼성전자 제품이 소비자에게 고루 호평 받을 수 있었던 비결 역시 UX라이터 같은 ‘명품 조연’의 활약 덕분 아닐까?
기획·연재 > 테마 기획 > 삼성전자에 이런 직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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