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언젠가 내 집을 갖고 싶다”는 당신에게
이일훈 건축가
어떤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초면일 때 대부분 내 직업을 묻는다. 건축가라 말하면 “건축은 예술이지요” “요즘 건설(부동산) 경기가 어떤가요” “집 지으려면 평(坪)당 얼마나 듭니까” 등 별의별 말을 다 듣게 된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으니 그저 웃을 수밖에.
어떤 이는 “몇 년 전 집을 지었는데 공사하는 사람들이 말을 안 듣고 중간에 도망가는 바람에 엄청 고생했다”며 (무용담에 가까운)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가만히 들어보면 디자인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건축 전반에 대한 오해와 억지가 많아 ‘나라도 도망갔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며 쓴웃음이 나곤 한다. 드물지만 건축가와 시공자를 ‘잘’ 만나 집을 ‘잘’ 짓고 ‘잘’ 산다는 이를 만나 함박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필시 그는 인격도 ‘잘’ 닦인 사람일 것이다).
“집 따위 필요 없다”는 사람들과의 만남
재밌는 경우도 있다. “집 지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한 번은 “집도 절도 필요 없다”는 스님을 만났다. “절이건 교회건 큰 집(건축)은 죄다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팔려 있으며, 법당(종교 건축)은 작을수록 좋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알고 보니 움막에서 수행한다는 선승(禪僧)이었는데, 그 움막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움막도 분명 건축이니까(어디 움막뿐인가. 요람이 있는 곳도 무덤도 다 건축이니 삶이란 건축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1년 내내 호텔에서 생활한다”는 중년의 교수를 만난 적도 있다. 그의 ‘호텔 생활 예찬론’은 끝이 없었다. 집 짓고 살면 세금·청소·유지보수 등이 힘들다, 호텔에 있으면 매일 방 청소해주고 침대 시트도 갈아준다, 집에선 음식 해먹고 나면 설거지해야 하는데 호텔에선 레스토랑에 가면 된다, 한식·중식·양식·일식 골라 먹을 수 있다, 손님이 오면 커피숍에서 만나면 된다, 집이 아무리 커도 사우나·수영장·피트니스센터를 어떻게 다 갖추겠나(호텔엔 다 있다), 땅값과 집 값을 호텔 숙박비로 나누면 평생 있어도 호텔이 더 싸다….
한참 그의 얘길 듣던 난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서재를 갖추긴 어렵지 않나요?” “책은 대학 연구실에서 보면 돼요.” “가족도 호텔에서 함께 생활하나요?” “아, 식구들은 모두 미국에 있어요.” “교수 월급이 아무리 많아도 숙박비가 만만치 않겠습니다.” “호텔 주인이 친구라 아주 싸게 해준답니다.” “……”
사고팔며 빌려주는 집은 ‘패스트푸드’
사람들은 단칸방(원룸)이라도 자신만의 공간(세계)에서 ‘노동부터 휴식까지’ 모든 생활을 누리고 싶어한다. 타인의 눈치 볼 필요 없는 공간(집 또는 방)은 ‘나만의 왕국’이다. 그곳에선 누가 뭐래도 자신이 곧 임금이다, 비록 신하가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파는(賣) 집, 사는(買) 집, 빌려주는 집엔 사는(生) 이의 희망사항이 반영돼 있지 않다. 아무나 살 수 있도록 미리 지어놓은 집이니 기성복 아니면 패스트푸드 같은 것이다. 반대로 맞춤복이나 슬로푸드 같은 집을 짓고자 열망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집일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장미꽃 넝쿨 우거진 집”도 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날 기다리는” 아파트도 있다.
테라스하우스, 컨테이너하우스, 목조주택 등 하고많은 집 중 최고의 집은 비싼 집도, 대궐 같은 집도 아니다. ‘홈 스위트 홈’, 곧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하지만 행복이 가득한 집을 완성하는 건 건축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건축가는 웃음과 행복(혹은 울음과 슬픔)을 담는 ‘하우스(집)’를 지을 순 있지만 ‘홈(가정)’에 개입할 순 없다. 가정은 온전히 식구들의 몫이다. 하지만 집을 지을(고칠) 땐 상황이 좀 다르다. 그 집에 살(生) 사람(의 생각)을 알아야 그에 걸맞은 공간을 갖추고 만들 수 있다. 행복을 가득 채우기 전 건축주와 건축가 간 의사소통이 먼저다.
‘아주 특별했던’ 건축주에 얽힌 추억
몇 년 전, 한 젊은 건축주가 찾아왔다. “집 짓는 기간에 여유가 있다”는 말에 “집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공간에 대한 소망이나 기대, 추억 등에 더해 상상하고 있는 이미지나 꿈, 의미까지. 이내 그는 주옥 같은 생각을 보내왔다.
[집의 쓰임새]
“이제껏 살아오면서 신세 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보다 바람 더 맞고 지낸 그 벗들이 찾아와 이런저런 주제를 놓고 함께 논의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집 모양]
“이웃에 위세 부리지 않고 주변을 비웃지 않는 형태라면 좋겠습니다”
[마당]
“무덤처럼 떼(흙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를 입혀 장식으로 쓰고 싶진 않습니다”
[침실]
“공기가 잘 통하는 하늘로 사람을 두둥실 띄워가는 듯 편안한 곳이길 꿈꿉니다”
[서재]
“자연광에 기대어 책을 좀 더 오래 볼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그가 보낸 메일(제목은 ‘구름배 같은 집이고 싶습니다’였다)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속편이 기대된다”고 답장을 보냈더니 다시 메일이 왔다.
“거실은 집안의 공적(公的) 자리/ 욕실은 현대의 시냇가/ 부엌은 사람을 살리는 자리/ 서재는 야트막한 언덕의 나무 그늘 아래/ 긴 처마, 처마 밑 안과 밖의 중간 자리/ 낮은 담장/ 번듯하지 않은 책장”에 대한 해석과 소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번 메일의 제목은 “땅의 바람길을 아는 집이면 좋겠습니다”였다.
(사진 출처: 서해문집/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2년 여 메일을 주고받으며 그 건축주와 난 참 많은 생각을 나눴다. 한옥에 대한 고정관념, 친환경 건축의 자세, 건축 재료의 장단점, 이웃과의 관계, 공사 예산, 각자의 인생 경험까지. 마침내 건축주의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든 집이 완성됐다. 지금도 그는 그곳에서 잘 살고 있다. 그 사이, 그와 난 제법 친해졌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은 과정은 지난 2012년 한 권의 책(‘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일훈∙송승훈 공저, 서해문집>)으로 묶여 나왔다.
건축엔 건축주의 ‘삶의 방식’ 투영돼야
‘잔서완석루’라고 이름 붙여진 그 집 주인 송승훈씨에게 내가 처음 물어본 말은 예산도, 평수도 아니었다. “어떻게 살길 원하느냐”였다. 집은, 건축은 삶의 방식에 대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과물이다. 그러니 집 짓기를 계획하고 있다면 먼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과 태도부터 정할 일이다. 일상에서 구현하고픈 철학과 대화를 나누시라. 당신은 대체 어떻게 살고 싶은가? 건축은, 기술이든 방법이든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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