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옷∙밥∙집에 ‘유행’이 필요할까?

2015/09/25 by 이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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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우 에세이. 옷,밥,집에 유행이 필요할까? 여러분의 취향에 맛과 멋을 더해줄 에세이스트 8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매주 목,금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일훈 건축가


 

‘세바퀴-세상을 바꾸는 퀴즈’(MBC)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명의 패널이 등장해 웃고 떠드는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내겐 전혀 다른 ‘세 바퀴’가 떠오른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 의식주(衣食住)다. 초등학교 때 배우긴 했는데 그 의미를 종종 잊는다. 한자어로 쓰면 왠지 거리감이 있는데 ‘옷∙밥∙집’이라 하면 몸과 맘에 찰싹 붙는 느낌이다.

밥, 집, 옷

세상이든 개인이든 삶을 받쳐주는 바퀴가 튼튼해야 잘 굴러간다.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너나 없이 소위 ‘웰빙(well-being)’에 쏠려 있다. 문제는 이 관심이 온통 ‘먹는 것’에만 집중된다는 데 있다.

진정 ‘잘(well) 존재(being)’하려면 먹는 음식뿐 아니라 입는 옷과 사는(머무는) 집이 다 웰빙이어야 한다. 옷은 좋은 걸 사 입으면서 밥은 대충 때우고, 밥은 제대로 챙겨 먹으면서 집 꼴은 함부로 해놓고 다니며,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의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옷∙밥∙집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그러면서 닮아가는 톱니바퀴다. 하나가 망가지면 전체가 멈추는 수레와 같다. 이들 세 요소의 균형이야말로 웰빙의 기본 전제다.

 

세상을 굴리는 ‘세바퀴’, 옷∙밥∙집

옷∙밥∙집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짓다’란 움직씨(동사)를 같이 쓴다. 옷도, 밥도, 그리고 집도 다 ‘짓는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중요한 건 다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노래∙약∙이름∙글∙농사… 그중 가장 귀하고 중하고 또 흔한 게 옷과 밥, 그리고 집이다. 한마디로 일상과 붙어 있다(떨어지면 큰일 난다).

속담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도 옷∙밥∙집을 아우르는 특성 중 하나다. 얼핏 떠오르는 속담만 해도 가짓수가 꽤 된다<아래 박스 참조>. 세 단어를 포함한 속담이 많다는 건 곧 옷과 밥, 집이 단순히 ‘입고 먹고 자는’ 대상을 넘어 세상과 개인 간 관계나 이해, 관심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옷∙밥∙집이 등장하는 속담, 어떤 게 있나

①옷
-옷은 나이로 입는다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
-옷이 날개다
-헌 옷이 있어야 새 옷이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거지도 입어야 빌어먹는다
-마음씨가 고우면 옷 앞섶이 아문다

②밥
-첫술에 배부르랴
-밥 먹듯 하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때린다
-밥은 굶어도 속이 편해야 산다
-밥이 약보다 낫다
-밥 팔아 죽 사 먹는다
-더운 밥 먹고 식은 소리 한다
-그 나물에 그 밥
-죽 쑤어 개 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도 밥도 안 되다
-찬 밥 더운 밥 가리다

③집
-집도 절도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도 샌다
-집을 사면 이웃을 본다
-길가에 집 짓기
-웃는 집에 복이 있다
-불 난 집에 부채질한다
-가난한 집에 자식이 많다
-집 좁은 건 살아도 마음 좁은 건 못 산다
-집에선 아이들 때문에 웃는다

 

옷∙밥∙집, 알고 보면 은근히 ‘닮은꼴’

옷∙밥∙집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재료가 있어야 완성된다’는 점이다. 옷은 옷감, 밥은 식재료, 집은 건축자재가 그 바탕이 된다. 재료가 동원되는 가공은 전부 솜씨(기술)가 필요한데 이때 솜씨(기술)는 재료에 대한 이해에서 온다.

옷감과 식재료, 건축자재 입니다.

옷감과 식재료, 건축자재의 특성을 이해하는 게 바느질과 조리, 건축의 시작과 끝이다. 재료가 궁하면 절약하는 요령이 생기고 재료가 넘치면 낭비가 는다. 적당한 재료에 고만고만한 기술이 더해지면 평범한(‘열악한’은 결코 아니다) 옷∙밥∙집이 되고 최선을 다하면 명품(명작)이 된다. 물론 재료의 본성을 무시해 실패하는 경우도,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재료의 성질을 왜곡해 불량품을 양산하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네 삶의 속도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 역시 옷∙밥∙집의 공통점이다. 단적인 예가 패스트푸드(fast food)다. 패스트푸드는 언뜻 ‘바쁜 소비자를 위해 미리 만들어둔 음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많이, 더 빨리 팔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미리 만들어놓고 팔아야 생산자나 공급자, 판매자 모두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햄버거와 아파트입니다.

최근 “패스트푸드는 몸에 나쁘다”며 ‘슬로푸드(slow food)’를 찾는 이가 늘고 있다. ‘빨리, 쉽게 먹는 것보다 좀 까다롭더라도 천천히 조리해 먹는 게 좋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때 ‘패스트냐, 슬로냐’의 선택은 곧 각자가 택한 삶의 속도다. 옷도 기성복이면 ‘패스트웨어(드레스)’이고 집 역시 미리 지어놓고 파는 상품(아파트나 빌라, 오피스텔)이면 ‘패스트하우징(셸터)’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옷∙밥∙집 모두 선택의 여지 측면에서 살피면 ‘패스트’는 좁고 ‘슬로’는 넓다. 전자는 저급이다. 편리하지만 건강에 안 좋다. 후자는 고급이다. 다소 불편하긴 해도 건강에 좋다. 그런데 왜 다들 패스트에 열광하는 걸까.)

 

‘쿡방 열풍’의 뒷맛이 씁쓸한 이유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 역시 옷∙밥∙집의 공통점이다. 변하지 않는 게 전통이라지만 전통 역시(좀 느리긴 해도) 변한다. 옷∙밥∙집의 옛 형태를 한복과 한식, 한옥이라 했을 때 셋 모두 요즘 지어지는 것들은 ‘박물관 속 옛 것’과 사뭇 다르다.

서울 도심에 한옥 너머로 커다란 빌딩들이 늘어져 있다.

흔히 건축(집)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의상(옷)이나 음식(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유행이 존재한다. 이때 유행은 ‘(시대란) 거울에 비친 허상’이다. 옷과 밥, 집에도 유행이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있다. 런웨이를 벗어나면 누구도 못 입을 의상이 ‘패션쇼’란 이름으로 요란하게 중계되고, 살림의 일상성이 소거된 ‘무대장치 같은’ 건축이 각광 받으며, 누구나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요리’란 이름을 붙여 수선 떠는 게 유행의 실상이다.

유행은 늘 그렇듯 일시적이다. 빨리 퍼질수록 슬며시 사라지고 널리 퍼질수록 재미가 없다. 그런데도 옷과 밥, 집을 소재로 한 각종 방송은 끝도 없이 유행하고 확산된다. 이는 거꾸로 옷∙밥∙집에서 사람이, 생활이 소외됐다는 방증 아닐까. 당장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소비(선택)하는 옷∙밥∙집에서 얼마나 주인답게 굴고 있는지.

옷과 밥, 집의 ‘주체’답게 내면을 윤택하게 가꾸려면 이 한마디를 잊지 말자. 불치불검(不侈不儉). 사치하지 않되 검소하지도 않게, 수수하게!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필자의 또 다른 에세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투모로우 에세이] 당신의 집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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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건축연구소 후리 대표 (삼성전자 에세이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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