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외로움에 담담해지기, 외로움에 당당해지기
곽정은 칼럼니스트
글을 쓰려 마음 먹고 책상 앞에 앉기 직전까지 생각했다. ‘아, 외로운 저녁이다!’ 애교라곤 없는 강아지는 아까부터 제 집에 들어가 잠만 자고, 내일 해외 출장을 떠나는 애인은 지금 이 시각까지 야근 중이니 맘 한편이 영 적적하다.
TV를 켜니 나이 서른에 남자친구에게 차인 여자가 마스카라 지워진 눈을 한 채 혼자 탕수육 세트를 시켜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연애하지 않는 자신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치 인생의 막(幕) 하나가 내려간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TV 속 여자도, TV 밖 나도 외롭구나….’ 짧은 탄식이 스쳐갈 무렵, 문득 생각했다. ‘왜 우린 외로움이란 감정을 이토록 자주 경험하면서 정작 외로움을 외면하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을까?’ 실제로 외로움은 ‘어떻게든 빨리 털어내야 할 감정’으로 여겨진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떠나는 여행이 어딘가 측은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외로움과 제대로 마주할 용기, 있나요?
정말 외로움은 외면해야 할, 혹은 당장 처단돼야 마땅한 감정일까? 둘이 함께 있어야만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삶이 완성되는 걸까?
연애 감정에 대해 글 쓰는 일을 하다보니 이런저런 연애 상담 메일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외로움을 대하는 이들이 품은 ‘날것의 생각’을 접하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싫어 어떻게든 연애를 시작하려는 사람, 누가 봐도 끝내는 게 나은 관계를 ‘혼자 되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감당하는 사람, 이별 후 찾아오는 외로움을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사람….
연애를 둘러싼 부정적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외로움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대부분은 외로움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여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외로움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해주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전, 의기양양하게 처음 ‘독립’이란 걸 했다. 집을 나온 지 불과 며칠 만에 내가 경험한 건 컴컴한 집의 불을 켤 때마다 느껴지는, 어둡고 습한 고독이었다. 혼자만의 해방감에 도취돼 즐거운 날이 펼쳐질 거라며 잔뜩 기대했지만 어느 날엔 등을 덮쳐오는 고독감을 잊어보겠다며 밤낮 없이 음식 중독자처럼 뭔가를 먹어댔다. 어느 날엔 이유도 없이 원룸 구석에 앉아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생각하면 참 안쓰러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분명히 깨달았다. 그 시간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가족과 함께여서 외로움을 제대로 느낄 겨를이 없었던 나’와 ‘혼자만의 방에 머물며 고독에 직면해야 했던 나’를 모두 마주한 순간이었다. 나는 외로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날 발견하고 나서야 숨기고 싶던, 아니 애초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내 모습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건 ‘나’란 사람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통합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닥을 목격하는 건 결코 수월하지 않았지만 막상 바닥을 보고 나니 무서울 게 없었다.
외롭지 않으려 시작한 연애, 결말은 ‘우울’
누군가는 묻고 싶을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외로움 따위 느끼지 못할 만큼 행복하게 연애하면 구태여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 고. 확실히 연애는 어떤 종류의 외로움을 달래주긴 한다. 웃음을 나누고, 아픔을 공감하고, 살을 맞대고, 숨결을 함께하는 건 그 자체로 참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외로움을 완벽히 증발시켜줄 만큼 누군가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맞춰줄 사람은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깊고 뜨거웠던 연애도 언젠간 그 열정이 다하게 마련이다. 열정이 사그라진 후엔 그 관계가 예전만큼 외로움을 잊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열렬한 사랑을 해봤고 이제 거기서 빠져 나온’ 주변 누군가를 찾아 물어보길 바란다. 한때 죽고 못 살 것 같았던 사람과 한 침대에서 등 돌리고 누워 눈물로 베갯잇을 적셔본 적 없는지.
연애든 삶이든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고독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수월해진다. 대단한 삶을 욕망하기보다 자신의 의지를 묵묵히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담담하게 살 수 있듯 ‘대단한 연애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담담하게 사랑할 수 있다. 연인에게 “날 너무 외롭게 방치해 힘들다”고 항의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해 달라는 건 애초에 외로움과 제대로 대면해본 적 없었다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연애의 결말은 그래서 우울해지기 일쑤다. 그런 연애에서 배울 게 많을 리 없다. 결국 담담함, 그리고 의연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태도다. 그리고 이 태도를 배우고 체득하려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잘 관통해야 한다. ‘좋은 연애’를 할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연애를 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셈이다.
“여러분의 ‘자발적 외로움’을 응원합니다”
담담하게 외로움을 수용하는 사람은 썩 괜찮은 사람이다. 삶이, 인간이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많은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그래서일까,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하며 연애하지 않는 자신을 기꺼이 자유롭게 놓아두는 사람을 보면 곁에 다가가 그 담담함에 젖고 싶어진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상 역시 외로움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연애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여태 혼자냐”고 묻지 않고, 독신주의자에게 결혼을 강권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부부에게 육아의 즐거움을 떠벌리지 않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외로움 역시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저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선택했다면 그 역시 무심한 듯 받아들이길. 외로움을 성숙하게 수용하는 이가 많아진다는 건 곧 타인을 불필요하게 억압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이가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왁자지껄 소리 나게 TV를 틀어놔도 외로운 밤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감정을 어루만지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담담하고 좋은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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