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요즘 건축 사진’ 유감(有感)
이일훈 건축가
발명은 기원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간혹 새롭지 않을 때도 있지만) 발명은 기상천외해 예측할 수조차 없지만 막상 그 사용이 일반(대중)화되면 금세 무덤덤해진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진 ‘발명의 시대’였다. 전기발전기‧타자기‧잠수함‧비행선‧낙하산‧프로펠러‧자전거‧재봉틀‧플라스틱‧성냥이 모두 이 시기에 발명됐다. 강철‧철근‧콘크리트‧피뢰침‧가스‧조명‧승강기 등 건축 관련 소재와 기기의 발명도 같은 시대에 이뤄졌다. 사진 역시 이 즈음 탄생한 발명품 중 하나다.
사진기술은 ‘감광판’에서 ‘디지털’로 천지개벽했지만 그 의미(‘본 걸 곧바로 기록한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더욱이 초창기 사진의 피사체가 주로 건축물이었던 만큼 건축 사진은 ‘사진의 원조’라 할 만하다.
초기 사진엔 왜 건물이 자주 등장할까?
건축이 기록된 최고(最古) 사진은 ‘자기 집 3층에서 바라본 지붕 풍경(View From the Window at Le Gras)’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사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작품은 프랑스인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Niepce, Joseph Nicéphore)가 1826년 감광판으로 촬영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풍경 사진’으론 1838년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작품이 전해진다. 공중에서 찍은 최초 사진도 있다. 1860년 풍선을 이용해 찍은 미국 보스턴 시가지 모습이 그것. 컬러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건 1872년 프랑스 서부 도시 앙굴렘(Angoulème)을 찍은 작품이 꼽힌다.
사진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 작품들에선 하나같이 ‘건축’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로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엔 움직이는 피사체를 포착하는 기술이 부족했던 만큼 (움직이지 않는) 건축물과 도시, 풍경이 주로 찍혔다. (인물 사진이 유행한 건 그 이후였다.)
사진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니엡스도, 다게레오타입의 창시자인 프랑스 사진 연구자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Daguerre, Louis Jacques Mandé)도 오늘날 사진의 쓰임새까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사진은 산업‧군사‧의료‧교육‧정치‧문화‧예술 등 전 분야를 망라해 쓰인다. 작업과 영역의 구분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제일 흔한 게 ‘인물(인상) 사진’이다. 증명∙백일∙돌∙가족∙웨딩 사진 등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 인물(인상) 사진은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지만 상업적으로도 가장 많이 활용된다. 영상 시대가 도래하며 그 영향력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사진도 있다. ‘보도 사진’이 그것. ‘상업 사진’의 대표주자는 뭐니 뭐니 해도 ‘광고 사진’이다. 광고 사진은 피사체의 종류에 따라 다시 ‘패션 사진’과 ‘상품 사진’ 등으로 나뉜다. 영화를 만들 땐 기록(혹은 광고)용으로 움직임이 없는 사진을 따로 찍는다. 일명 ‘스틸(still) 사진’이다.
매끈한, 하지만 사람이 빠진 건축 사진
작가주의 정신으로 작업하는 사진가들은 ‘풍경 사진’ ‘생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 등을 모두 ‘예술 사진’으로 분류한다. ‘건축 사진’ 역시 이 부류에 포함된다. 건축가는 현장 조사와 분석, 연구 등을 포함한 디자인 과정 전반에 걸쳐 사진(기법)을 활용한다. 한눈에 볼 수 없는 여러 방향의 공간(풍경) 관계를 연결(미장센, Mise-en-Scène)하기도 하고 의도하는 공간의 특성을 조합(몽타주, montage)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의 과정과 결과에서 드러나는 사진(활용)의 결과를 모두 건축 사진이라 일컫진 않는다.
대중이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건축 사진은 대개 멋지게 찍힌 건축물의 외관이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인테리어를 담고 있다. 그런 사진은 화면 비틀림 현상을 수정하는 특수렌즈를 사용해 투시도와 같은 형태와 공간을 보여준다. ‘광축변환렌즈’로 불리는 이 렌즈는 수직∙수평 방향을 조정, 피사체를 육안으로 보는 것과 달리 반듯하게 조작한다. 그런 작품엔 하나같이 사용자, 즉 사람이 빠져 있다.
인물이 사라진 건축 사진 속 건물과 공간은 더없이 근사하다. 하지만 리얼리티가 없다. 그런데도 건축 사진을 찍는 작가도, 감상자도 사람을 없애버린 장면과 형태, 공간을 당연시한다. 건축을 오브제(피사체)로만 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건축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장면을 아무렇잖게 받아들이는 역설, 이게 바로 건축 사진이 지닌 한계이자 비극이다.
사람이 없다는 것 말고도 건축 사진엔 ‘함정’이 하나 더 있다. 모든 건축은 땅을 점유하는 장소에서 출발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이때 장소란 참으로 고유한 것이다. 모든 장소는 주변 지형과 연관된다. 이른바 ‘지형적‧역사적‧문화적‧사회적 맥락’이다. 그런 맥락과 함께 호흡하려는 자세를 지닌 건축은 비록 작고 못생겨도, 검소하고 소박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작품’으로 불리는 건축 사진 속 건축은 하나같이 주변과의 연관성을 무시한 채 대부분 ‘나 홀로 우뚝’ 서 있다. “날 옆 건물과 비교하지 마, 불쾌하니까!” 이렇게 투덜대는 독불장군처럼 말이다.
“모든 사진엔 항상 두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진가, 다른 하나는 감상자다.” ‘풍경 사진의 대가’로 유명한 미국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Ansel Adams)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건축에 대한 관점과 안목에 관한 한 독불장군식(式) 건축 사진 작가, 그리고 건축의 다양한 관계성에 무관심한 감상자는 (어쩐지 좀 우울하지만) ‘오십보백보’다.
좋은 건축 사진? 건축을 읽는 ‘마음’!
내겐 건축 사진과 관련해 좀처럼 잊히지 않는 추억이 하나 있다. 건축주 A와의 오랜 의사소통 끝에 한 단독주택을 설계했다. 어느 날, A가 전화를 걸어와 “건축 사진가 B의 솜씨가 어떠냐”고 묻기에 “좋다”고 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는 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건축 사진첩을 만들어 선물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찮게 A의 안목을 알게 됐다.
A는 B에게 촬영을 의뢰하며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촬영 전 반드시 하루 이상 이 집에서 주무시기 바랍니다. 집은 언제든 비워드릴 테니 편안히 머무르십시오. 하루도 자보지 않고 어떻게 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촬영하실 땐 천천히, 사계절을 모두 담아주십시오.”
그 일을 겪으며 난 새삼 깨달았다. 건축이 ‘삶을 담는 그릇’이라면 건축 사진은 바로 그 ‘삶의 그릇을 읽는 마음’이란 사실을.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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