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응답하라’ 시리즈 열풍, 내가 본 진짜 이유
양승철 GQ코리아 에디터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이하 ‘응팔’)이 인기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1∙2탄인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까지 ‘팬덤(fandom)’을 불러일으켰다. 각 편에 출연했거나 출연 중인 젊은 배우들은 무명 신인에서 누구나 알 만한 스타로 거듭났다. 특히 서인국∙정우∙유연석∙손호준 등 남자 주인공은 단번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번엔 류준열과 박보검, 고경표가 그 자리를 꿰찼다. 여자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캐스팅 발표 당시만 해도 여주인공 역으로 낙점된 혜리의 연기력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우려는 첫 편 방영과 동시에 ‘기우’로 판명 났다. 춤추고 노래하던 ‘걸스데이 혜리’에 익숙한 시청자에게도 응팔 속 그는 완벽한 ‘성덕선’이었다.
출연진, 극중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하다
‘응답하라’ 시리즈 제작진이 배우 캐스팅에 공을 들인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동일과 이일화를 모든 시즌에서 ‘대표 부모’로 등장시키며 “가족과 이웃 간 정(情)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란 걸 알린다. 아무리 작은 역할로 출연하는 배우들이라 해도 캐릭터는 말 그대로 ‘살아있다.’
각본의 힘이자 연출자의 능력이겠지만 사실 그 바탕엔 캐스팅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혜리는 혜리의 모습으로, 류준열은 류준열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에 가까운 캐릭터를 ‘입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자신이 자신인 건 변하지 않듯 배우 본연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며 극중 캐릭터로 발전시켰다는 점이 ‘응답하라’ 시리즈의 생동감을 떠받치고 있다.
영화감독 임권택은 “배우가 타인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배우는 자신의 모습에서 연기 영역을 조금씩 넓혀간다는 뜻이다. 어떤 배우도 자신과 전혀 다른 성격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기란 쉽지 않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젊고 경력이 짧은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면서도 실패하지 않는 이유 역시 캐릭터와 배우 간(‘배우와 배우 간’이 아니다) 호흡을 중시해서다.
배우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역할에 빠져들면, 그리고 그런 배우가 작품 안에 많아지면 그들이 사는 세계는 TV 밖에서도 진짜처럼 느껴진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놀라운 점은 거의 모든 배역을 캐릭터에 가깝게 캐스팅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회당 분량이 90분에 육박하는 드라마를 1주일에 두 편씩 보면서 시청자는 극중 세계에 빠져든다. 시대적 배경과 배경을 만드는 미술, 디테일을 살리는 고증도 뛰어나지만 ‘응답하라’ 세계에 사는 배우들의 몰입보다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화내는 연기는 잘 못한다”는 안성기의 고백
흔히 ‘메소드 연기’로 불리는 연기 이론은 러시아의 극 연출가 겸 배우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 1863~1938)가 고안해냈다. 그는 “배우가 극중 배역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사실적인 연극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연기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캐릭터에 몰입해 살라”고 주문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 직후 배우들이 하나같이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일부는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배우가 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평생을 여러 사람으로 산다는 것과도 같은 얘기일지도 모른다.
좋은 연기란 뭘까? 언제부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이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배우는 모든 ‘극(劇)’의 중심이다. 배우는 사람이다. 사람은 ‘연기’하며 살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가 돼 연기하는 건 굉장히 어색한 일이다.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연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다.
배우 안성기를 인터뷰했을 때다. 그는 “화를 내거나 감정을 폭발하는 연기, 혹은 극악무도한 악인이 되는 연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잘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다가 집에 와서 화가 나요. 그때서야 비로소 분하지만 이미 늦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에요.” 안성기는 그런 자신이 어떻게 눈을 이글거리면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젊은 에디터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없는 연기를 명확히 말하는 그의 어조와 말투, 속도가 참 인상적이었다. 담담하게, 느리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이 못하는 연기’를 말할 수 있는 이 배우를 세상 사람들이 왜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과잉’을 경계할 것,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 자신의 모습을 믿고 그대로 갈 것. 그렇게 살아서일까, 선한 주름이 등압선처럼 자연스레 내려앉은 ‘배우 안성기’의 얼굴엔 언제나 자연스러운 바람이 분다.
누구든 모든 건 ‘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걸 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는 건 과연 배우에게만 해당하는 얘길까? 늘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배우 자신이다. 하물며 평생 ‘나’로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일 터. 배우가 취한 연기를 할 때 과하게 비틀거리며 “술 취했다”고 말해버리면 오히려 거짓 같다. 사람들은 실제로 술이 취했을 때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며 비틀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니 말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겉모습을 따라 하려 한다면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취한 척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여전히 행복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 모호한 하루하루다. 이런 일상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란, 이를테면 분명 취했으면서도 "난 취하지 않았다"고 꿋꿋이 우기며 주변 소중한 이를 향해 그간 하고 싶었던 얘길 늘어놓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시간 말이다. 당신이 배우라면 그때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이 돼 ‘진짜 끝내주는 연기’를 하는 순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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