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에세이]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음식’ 열전
박찬일 셰프
전쟁은 거대한 문화 이전(移轉)이다. 새로운 과학 기술과 문화의 이식이 평화로운 교역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모든 침략과 투쟁은 그에 상응하는 ‘흔적’을 남겼고, 그 결과는 다시 문화가 돼 가공되거나 변화하며 살아남았다.
음식도 다르지 않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프랑스 디저트는 대다수가 ‘아랍 침공(과 이후 문화 이식)’에 따른 결과였다. 아랍은 시칠리아와 스페인 반도를 공략했고 그 결과, 아랍 문화는 점진적으로 북상했다. 마지팬(marzipan, 아몬드∙설탕∙달걀을 섞어 만든 디저트 베이스)과 설탕의 보급도 그중 하나다.
쿠스쿠스, ‘점령지’ 시칠리아의 아픈 역사
이탈리아 서남단에 위치한 섬 시칠리아는 아랍과 스페인 두 세력의 침략과 점령을 받았다. 그 역사는 현재까지도 언어, 건축 등 다양한 관련 문화 양식으로 남아 있다. 음식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북아프리카 음식 중 ‘쿠스쿠스(couscous)’란 게 있다. 밀가루를 비벼 좁쌀 모양으로 만든 알갱이, 혹은 여기에 고기나 채소 스튜를 곁들여 먹는 음식을 통칭하는 이 메뉴는 파리(Paris) 시내 레스토랑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세계화됐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내 이슬람 문명권에서 이민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시칠리아는 프랑스와 달리 과거 침략과 이후 문화 교류를 통해 쿠스쿠스를 받아들였다. 북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쿠스쿠스는, 말하자면 ‘영혼의 음식(soul food)’이었다. 독일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는 타인과의 불안한 관계를 비트는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바로 쿠스쿠스가 등장한다. 극중 아프리카계 불법 이민자인 남성과 평범한 독일 중년 여성이 연애를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못 미더워하지만 감독은 둘의 사랑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과연 둘은 제법 깊게 사랑하는 듯하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무심히, 자기 연인이나 아내에게 하듯. “이봐요, 쿠스쿠스가 먹고 싶군. 좀 해줘요.”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낸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말이다. 둘 사이엔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영화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음식은 이처럼 종종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그 존재가 이식되려면 강제적 상황이 필요해지기도 한다. 그게 바로 ‘전쟁’이고 ‘점령’이다. 시칠리아의 쿠스쿠스는 그런 맥락에서 탄생한 지역 음식이다. 사람들은, 그 과거는 까맣게 잊은 채 쿠스쿠스를 사랑하고 즐겨 먹는다.
트리파, 버려진 소 내장의 서글픈 부활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음식’을 들라면 난 망설임 없이 곱창과 가지 요리, 그리고 부대찌개를 들겠다. 로마 유대인들은 당국자에 의해 게토(ghetto, 한때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놓은 거주 지역)로 밀려났다. 그들은 로마 시민들이 버린 소 내장을 주워 먹었다. 곱창이었다. 버려진 소 내장을 볶아 토마토소스를 뿌려 먹곤 했는데, 그게 (최근 한국 미식가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해진) ‘트리파(trippa)’다.
가지 요리도 이 즈음 탄생했다. 가지는 ‘흉측한’ 모양 때문에 오랫동안 식품으로 취급 받지 못했고, 자연히 (변변한 먹거리를 찾지 못한) 게토 거주 유대인들 차지가 됐다. 가지에 토마토소스를 뿌려 오븐에 구워내는 음식은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다.
부대찌개는 또 어떤가. ‘진정한 퓨전 요리’라 할 수 있는 부대찌개엔 의정부∙문산∙용산∙송탄 등 지역별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다. 하나같이 미군부대가 있는 곳이다. 왜 그처럼 다른 방식으로 분화됐는진 알 수 없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미군 부대 부산물을 쓴(써왔던) 건 분명하다.
부대찌개에선 당대 한국인도 대부분 귀히 여기지 않았을 ‘깡통 햄’이 어엿한 식재료로 변신했다. 1950년대,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 등 서울 시내 서민상업지역에선 꿀꿀이죽이 팔렸다. 부대찌개는 이 꿀꿀이죽의 ‘고급 버전’이다. 꿀꿀이죽은 대량으로 요리해 먹는 간이식이었고 부대찌개부턴 정식 음식의 단계를 밟아간다.
부대찌개의 별칭 ‘존슨탕’엔 이 음식의 정치적 내면이 적확하게 드러난다. 존슨(Johnson)은 미국인의 흔한 성(姓)이기도, 한때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 대통령 이름이기도 하다. 그가 미8군 앞에 위치한 모 식당에 들러 부대찌개를 맛본 후 이 요리의 명칭이 존슨탕으로 바뀌었다는 건 낭설일 터. 하지만 어쨌든 부대찌개의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감자, 영국-아일랜드 간 반목의 시발점
토마토와 감자, 옥수수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슬픈 침략사를 품은 식재료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공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으로 점철됐다. 그 부산물이 바로 이들 작물의 유럽 전파다.
토마토는 18세기 이탈리아 요리사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쓰이기 전까지만 해도 관상식물이었다. 감자 역시 ‘덩굴지어 주렁주렁 열리는 모양이 악마적 번식 같다’고 여겨져 식재료이긴커녕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유럽으로 건너온 감자는 당시 생산성 저하로 고심하던 이 지역의 구세주로 일약 떠올랐다. 특히 영국과 아일랜드 간 식민 관계에서 가장 치명적 음식으로 작용했다.
영국인 지주들은 아일랜드에서 다량의 곡물과 육류를 착취했다. 먹을 거리를 죄다 빼앗긴 아일랜드인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퍼져 대부분의 감자가 썩어버렸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고, 이는 결국 아일랜드인들의 미국 이민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뿌리 깊은 반목,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영국인을 향한 아일랜드인의 강력한 복수심의 근원엔 감자가 자리 잡고 있다.
타르타르소스, 뿌리는 ‘몽골군 보급 식량’
전쟁은 새로운 음식을 남기기도 한다. 몽골 군대는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유린했다. 보병과 (소수의) 철갑기마병이 혼재된 유럽 군대와 달리 전원이 기마병이었던 몽골군은 탁월한 기동력을 자랑했다. 엄청나게 빠른 이동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보급의 최소화’였다. 현지 보급 방식 도입과 간이 전투식량 제조 전략으로 보급 부대를 가볍게 운영, 신속한 전투 전개와 공격∙후퇴가 용이해진 것이다.
말린 고기는 몽골군 전투식량의 핵(核)이었다. 몽골 군인들은 더러 ‘완벽하게 생생한’ 전투식량을 맛보기도 했는데 바로 ‘말의 피’였다. 말의 정맥에 칼집을 낸 후 피를 빨아 마시면 우수한 단백질과 수분을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말이 전투 중 죽거나 다쳐 못 쓰게 되면 죽여 말리거나 굽고 삶아 먹으며 식량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몽골군과 유사한 전투 방식을 구사했던 타르타르족이 전투 도중 말 안장 밑에 고기를 깔고 다니며 부드럽게 만들어 먹었다는 데서 유래한 요리가 ‘타르타르(tartar)’다. 이 역시 군 특유의 기동성과 휴대 문화가 탄생시킨 음식이다. 오늘날 오징어튀김 따위에 제공되는 마요네즈 같은 소스를 ‘타르타르소스’라 부르는 건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타르타르가 정식으로 ‘날고기 육회’를 의미하는 요리가 되고 그 위에 뿌리는 소스가 생겨났다. 그 소스 베이스는 대개 마요네즈였고, 결국 새콤한 마요네즈 소스가 타르타르소스로 불리게 됐다.
미트볼, 전후 美 통조림 설비 가동 ‘명분’
근현대 전쟁을 거치며 파생된 음식 가운데 부대찌개는 6∙25전쟁과 관련된 통조림 요리라 할 수 있다.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통조림 요리가 널리 전파됐다. 특히 미국은 대규모 군대를 적진에 파견하며 ‘C레이션(C Ration)’으로 불리는 통조림 음식을 다양하게 보급했다.
전쟁이 끝난 후, 주된 고객층을 잃어버린 통조림 회사들은 적극적인 마케팅 공세를 펼쳤다. 급증한 제조 시설을 통해 엄청나게 생산되는 통조림 음식을 미국 국민이 더 많이 먹도록 설득해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토마토소스를 기반으로 한 라비올리(ravioli, 이탈리아식 만두)와 마카로니, 미트볼 스파게티 같은 음식이 간이식의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전자레인지가 보급되면서부턴 ‘데워 먹는 음식’이 미국인 노동자 계급의 식탁을 점령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지는 시대가 도래하며 통조림 음식의 보급은 더욱 확산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살아온 미국인의 상당수가 통조림 음식을 소울푸드로 여기는 건 그 때문이다(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해 살아온 미국인은 대부분 자신들의 소울푸드를 ‘냉동식품’으로 기억하겠지만).
돈가스, 씁쓸한 日 식민사 담긴 ‘국민음식’
불운하게도 한반도는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음식도 전파됐다. 몽골에서 넘어왔다는 순대가, 구한말 유입된 다수의 일본 음식이 대표적이다. 특히 일본계 음식 보급의 역사는 단순 문화 교류에서 출발, 강제 점령의 역사를 거치며 공고해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뼈아픈 과거다. 돈가스를 비롯한 각종 ‘경양식’과 우동, 초밥 등 이 계열을 대표하는 음식은 이후 서서히 뿌리 내렸고 해방 이후엔 ‘국민음식’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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