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강자는 영원한 강자!… ‘첨단 핀테크 허브’ 꿈꾸는 300년 금융 강국
짙은 에메랄드빛 호수와 그 주변을 나지막이 두른 초록 산, 푸른 언덕 아래로 끝없이 나있는 평지, 벽은 희고 지붕은 빨간 집들…. 그림엽서나 광고에서 한두 번 봤음 직한 풍경을 지닌 호반도시, 스위스 추크(Zug)다. 올 초 인구 3만을 넘긴 이 소도시의 초여름은 나른한 졸음에 잠긴 듯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ICT)과 금융의 조합’을 새로운 비즈니스 패러다임으로 규정한다면 이곳이야말로 2018년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도시다.
특명: 추크를 ‘가상화폐 특구’로 만들어라!
지난달 20일 밤(현지 시각), 추크 중심가에 위치한 대형 공연장 ‘시어터카지노추크(Theater Casino Zug)’ 스카이라운지. 100명쯤 되는 젊은이가 칵테일 잔을 든 채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로 편안하며 깔끔한 캐주얼 차림인 이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었다. 다음 날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열릴 ‘2018 크립토밸리 블록체인 컨퍼런스(2018 Crypto Valley Blockchain Conference)’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스페셜 리포트에서도 몇 차례 소개했듯 블록체인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분산형 디지털 회계원장 기술’을 일컫는다. 특유의 알고리즘 덕에 금전 거래 등 다양한 일을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과정이 엄정하고 정당하게 기록돼 보안 측면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활용 가능 분야도 △헬스케어 △주식 투자 △운송 △특허·저작권 △온·오프라인 상거래 △기업 회계관리∙감사 △부동산 △사물인터넷 등 무궁무진하다. 특히 최근엔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의 기반 기술로 다양하게 실험, 활용되고 있다.
가상화폐(cryptocurrency)가 동전이나 지폐처럼 물질적 존재감을 갖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돈처럼 얼마든지 가치를 저장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실물화폐도 상당 부분 디지털 전산 기술로 물리적 매체를 거치지 않고 거래된다. 하지만 그것과 (가상화폐를 활용한) 가상 거래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실물화폐가 은행을 통해 ‘중앙집중형’으로 관리되는 데 반해 가상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 ‘분산형’으로 관리된다는 데 있다.
가상화폐에 대한 현대인의 시선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우리나라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가상화폐에 기반한) 분산형 경제 패러다임이야말로 지금껏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갖고 있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혁명”이라고 믿는다. 그 반대편엔 가상화폐 열풍을 투자 가치 측면에서 침소봉대, 수익을 극대화할 궁리에만 골몰하는 이들이 있다. 한쪽에선 그런 태도를 “전형적 한탕주의”라며 경계하고 다른 쪽에선 “가상화폐는 현행 시스템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억압적 태도를 취한다.
아직 명확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서일까, 가상화폐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입장도 다양하다. 대체로 민간 부문에 비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지만 일부는 꽤 적극적으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원하고 나선다. 후자의 대표격인 국가가 스위스. 특히 추크는 가상화폐 개발과 정착 측면에서 스위스 연방을 구성하는 26개 주(칸톤) 중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은 추크주 주도(州都)인 추크를 크립토밸리로 만들려는 스위스의 노력이다.
크립토밸리협회, 출범 1년 만에 5배 성장
‘가상화폐 특구’ 정도로 해석되는 크립토밸리는 언뜻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추크는 알프스산맥 북쪽 끝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valley)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에선 추크를 크립토밸리로 조성하기 위해 ‘크립토밸리협회’란 비영리조직도 결성됐다. 2018년 7월 현재 추크에 사무실을 둔 400여 개 글로벌 기업이 크립토밸리협회 회원으로 가입돼있다.
케빈 랠리(Kevin Lally) 크립토밸리협회 사무국장에 따르면 크립토밸리협회는 추크를 기초 생태계로 삼아 글로벌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기술 관련 활동을 조율하는 허브(hub)다. “우린 가상화폐(블록체인) 관련 스타트업은 물론, 스위스 중앙정부나 추크 중앙정부와도 긴밀히 협력합니다. 가상화폐(블록체인)에 관심 있는 투자자나 중견 기업 역시 우리 협회의 주요 파트너죠. 이런 소통을 거쳐 회원사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주는 게 저희의 주된 업무입니다.”
가상화폐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관련 스타트업 간 열기가 치열해질수록 크립토밸리협회는 분주해진다. 실제로 지난해 2개 워킹그룹(실무작업반)으로 출발했지만 1년여 만인 지난 5월 10개 워킹그룹으로 규모가 다섯 배나 늘었다. 이들의 핵심 업무 중 하나는 매년 크립토밸리 연례 컨퍼런스를 조직하는 것. 그 첫 행사가 2018 크립토밸리 블록체인 컨퍼런스였다.
당시 취재를 위해 행사장을 찾았던 오스카 윌리엄스 그루트(Oscar Williams-Grut) 비즈니스인사이더[1] 에디터는 이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5월 ‘컨센서스 2018 뉴욕’이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가상화폐 컨퍼런스죠. 은행가를 가장한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는 이벤트가 마련되는가 하면, 회의가 끝날 때마다 떠들썩한 파티가 이어졌어요. 심지어 회의 장소에 ‘카지노’란 이름이 붙기도 했고요. 크립토밸리 블록체인 컨퍼런스를 취재하러 오며 내심 ‘이번 행사도 비슷한 분위기 아닐까?’ 생각했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르더군요. 세계 각국의 천재 개발자와 선견지명 있는 기업인이 모여 ‘어떻게 하면 가상화폐를 기반으로 한 경제 인프라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까?’를 놓고 맑은 정신과 진지한 태도로 토론을 계속하는 자리여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스위스 루체른대학 응용과학부와 함께 조직된 이 회의의 참석자는 650여 명. 블록체인과 핀테크 기술 이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학자와 연구∙개발진, 기업(스타트업) 대표, 법률가와 정부 관리들이 연사와 발표자로 참여했다. 토론 주제도 △BIoT[2]와 공유 데이터 △가상경제의 미래 △핀테크와 가치 교환 △확장성[3]과 소액결제[4] △스마트 계약서 보안 △정체성 관리 △관련 법규 등 다양했다. 회의 도중 소개된 블록체인 기술 응용 사례만 3만 건 이상이었다.
스위스 핀테크 투자금, 11%는 가상화폐로
비록 최근 추크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긴 하지만 스위스는 예부터 ‘미덥고 혁신적인 금융 국가’로서의 명성을 이어왔다. 스위스에 은행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유럽 전역에 은행 설립 붐이 일던 18세기 무렵, 스위스 상인들이 해외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앞다퉈 은행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이후 20세기 전반까진 은행 업계의 격동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은 물론, 세계 전역 은행은 전쟁의 피해를 입거나 정치적 바람을 타고 휘청거렸다. 유명 은행이 줄줄이 파산하는가 하면, 새로운 은행의 등장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스위스 은행만은 예외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일단락된 1815년부터 영세 중립을 선언한 덕에 1∙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그 결과, 스위스는 유럽 내 다른 국가에 비해 한결 안정적으로 금융업을 이어갔다.
오늘날 ‘은행’은 알프스∙시계∙초콜릿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금융∙보험업에 관한 한 스위스는 최고 수준의 전문 기술과 선진 인프라를 안정적으로 구축해왔다. ‘최상급 핀테크 생태계’의 기반을 이미 상당 부분 갖춘 셈이다.
스위스 연방정부와 칸톤 지방정부가 합동으로 조성한 스위스 마케팅 프로모션 기구 ‘스위스글로벌엔터프라이즈(Switzerland Global Enterprise)’에 의하면 2017년 1월 현재 190개 글로벌 핀테크 기업이 스위스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그중 60% 이상은 글로벌 B2B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규모로 운영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가상화폐에 대한 스위스의 안목이다.
영국에서 출발한 다국적 기업활동 관련 자문 서비스 네트워크 딜로이트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스위스 핀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는 약 1억7000만 달러. 대부분이 ‘투자 관리’ 부문에 몰려 있지만 가상화폐 부문의 비중(11%)도 적지 않다. ‘저축∙신용’ 부문 투자 비중이 16%인 점, 가상화폐 관련 투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가상화폐 부문 투자 규모는 기존 금융 패러다임에 필적하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위 그래픽 참조>.
스위스에서도 금융의 중심은 단연 취리히다. 수도권을 포함, 총 인구가 200만에 이르는데다 쥐라∙알프스 두 산맥 사이의 비옥한 구릉지인 취리히는 게르만 유럽과 라틴 유럽 간 다리 역할을 해온 지역답게 오랜 거래와 중재의 노하우가 집적된 도시다. 이는 각종 수치로도 입증된다. 단적인 예로 유럽에서 태동한 글로벌 핀테크 기업의 10%가 스위스에, 그중 약 절반(46%)은 취리히에 각각 몰려있다. 그리고 가상화폐(블록체인) 관련 활동은 취리히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추크에 집중돼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다”는 평을 듣는 가상화폐 관련 소프트웨어 회사 모네타스(Monetas) △처리 시간이 짧고 동반 인프라가 필요 없어 특히 기대를 모으는 블록체인 기반 오픈소스 플랫폼 이더리움(Ethereum)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뱅킹을 이용한 금융관리 솔루션 제공업체 콘토비스타(Contovista) △효율적 자산 관리로 이름난 디지털 인베스트먼트 플랫폼 데카르트파이낸스(Descartes Finance) 등 핀테크 분야에서 주목 받는 스타트업과 기업이 최근 추크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낮은 세율과 높은 인센티브 등 칸톤 지방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견인차 역할을 한 덕분이다.
추크의 승부수, 핀테크 시장 판도 바꿀까?
독일어로 추크는 ‘잡아당기다’란 동사 ‘ziehen’의 명사형이다. 한때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들이는 동작’을 의미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먼 옛날,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파는 걸로 주된 수입을 올리던 이 지역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화폐 활용법과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 개발, 이 모두를 지원할 핀테크 생태계 조성 같은 문제는 여전히 대중에게(그리고 상당수의 전문가에게조차!) 어렵고 불투명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위험성만큼이나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블루오션’이기도 하다. 그리고 추크는 바로 그 바다에 커다란 그물을 던졌다. 그 그물은 과연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건져 올릴까?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기 위해 선결돼야 할 문제엔 어떤 게 있을까? 전 세계의 눈이 추크에, 그리고 스위스에 집중되는 까닭이다.
[1]금융∙기업 전문 미국 뉴스 웹사이트(www.businessinsider.com)
[2]블록체인과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결합된 개념
[3]scalability. 사용자 수 증대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정도
[4]micropayment. 전자상거래에서 물건 구매 시 전자화폐나 선불카드 등으로 결제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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