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펠(ZIPEL), 이 이름이 탄생하기까지
네 뜻을 펼쳐라, ‘지펠’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운 겁니까? 삼성이라는 파워 브랜드를 두고 서브 브랜드를 따로 만들겠다니요. 난데없는 모험을 하겠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우리는 지금껏 600리터 이상 대용량 냉장고를 만들어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글로벌기업들과 맞붙을 만큼 우리가 기술력을 갖췄다고 봅니까? 자칫하면 삼성 이미지만 땅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대책은 있습니까?”
대용량 쪽은 이제 막 형성된 시장입니다. 이럴 때 냉장고사업의 무게중심을 대용량으로 옮기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겠습니까?”
1990년대 중반, 국내 대용량 냉장고 시장은 국내 가전3사가 일반냉장고에 매달려 있는 공백을 노려 GE, 월풀 등 세계 유수 브랜드의 수입제품이 밀려와 중산층의 프리미엄 욕구를 자극하며 시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들 수입 브랜드는 대용량 시장에서 95% 점유라는 압도적인 우위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일반 냉장고까지 국내 최고가로 판매하는 고가정책을 고수했고, 그 반사효과로서 일반 냉장고시장에서 국내 가전의 출혈경쟁은 격화돼 갔다.
외산 브랜드에게 안방 시장이 잠식당하는 것을 마냥 지켜만 볼 수 없는 삼성전자 냉장고사업부는 급기야 ‘프리미엄 전략’이라는 매직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이날 발표한 계획은 바로 일반냉장고 중심의 저가 출혈경쟁에서 벗어나 국내 가전 최초로 ‘프리미엄’ 냉장고를 출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임원진들 질문은 국내 가전으로서 프리미엄급의 안착 가능성과 함께 ‘삼성’ 브랜드가 아닌 새로운 브랜드 런칭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다. 현실 진단은 좋으나 그 대책이 문제였다. ‘프리미엄’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영역인 데다, 지난 수십 년 노력으로 어렵사리 구축한 삼성전자라는 글로벌브랜드를 내려놓고 검증도 안 된 새로운 서브브랜드를 출범시키겠다는 것에 걱정이 앞섰다.
더 들여다보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로 글로벌브랜드와 맞붙어 이길 자신이 있느냐는 의구심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대용량 개발의 기술력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냉장고사업부에서는 이 상태로 가면 냉장고시장에서 동반 몰락하는 것이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오늘’ 변하지 않으면 ‘내일’이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이번 도전으로 만년 적자 사업부라는 오명을 씻어내겠습니다.”
임원진을 상대로 현실 진단까지 내놓으며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젊은 부장의 기세에 임원진들이 오히려 주눅이 드는 형국이었다. 회의실에는 잠시나마 침묵이 흘렀다. 발표자가 물러난 다음에도 임원진은 수 차례 논의와 보고 지시를 거듭했다.
“좋습니다. 부딪쳐 보십시다.”
승인이 떨어졌다. 이 승인이 떨어지기까지의 그 두 시간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목격한 임원진들이 용단을 내리는 데는 너무 긴 시간이었는지 몰랐다. 승인이 떨어지자 냉장고사업부직원들은 완벽한 성공을 꿈꾸기 시작했다. 사업전략은 두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냉장고사업부는 먼저, 삼성전자 브랜드의 파워가 반도체 등 주력사업의 성공으로 상승세에 있다 하나, 적어도 글로벌기업의 인지도 높은 브랜드가 장악한 국내 프리미엄 냉장고 시장에서는 아직 약세라는 현실을 인정했다. 미제 냉장고가 더 낫다고 인식하는 소비자에게 삼성 브랜드의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외국산 제품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을 공략해 들어갔다.“외산 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만 1위가 ‘소음’입니다. 미국 경우에는 단독주택에 집 공간이 큰 편이어서 웬만한 소음도 묻히지만, 같은 소음이라도 국내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밀집형 아파트 구조에서는 주방에서 들리는 이 소음이 굉장히 크게 느껴집니다.”
소비자에게 ‘당신이 꿈꾸던 냉장고’를 찾아주기 위해 연구원 수십 명이 달라붙었다. 미국산은 한국의 주거문화에 맞춘 냉장고가 아니었다. 용량이 크고 견고하다는 특징이 있지만 반면에 높은 가격대, 소음 문제, 큰 전력소비량, 그리고 내 외부 구성의 디자인에서 아직 국내 소비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냉장고사업부가 보기에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비자들이 외산을 찾는 이유는 대용량이라는 장점 외에 글로벌기업의 이미지 때문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런 분석 끝에 냉장고사업부에서 내린 결론은 ‘한국형’ 냉장고 개발이었다.
당시 일반 냉장고의 소비자가는 70만 원대였던 데 비해 고급형 외산 냉장고는 300~400만 원을 호가했다. 삼성전자 냉장고사업부는 국내 최초 프리미엄 냉장고의 가격을 외산 제품의 70% 수준인 200만 원대로 책정했다.
다음에는 이 가격대에 맞춰 냉장고 기능과 디자인을 재구성했다. 기존 냉장고와 외산 제품에서 한국인이 선호하는 기능들을 추려내어, 찌개를 냄비 채로 보관하거나 수박을 통째로 넣는 등 국내 중산층의 먹을 거리 소비 트렌드에 맞춰 선반 간격을 자유롭게 조절하도록 하는 등 사용자 중심으로 바꿨다. 국내 최초의 양문형 고급 냉장고 개발에 투입한 비용은 자그마치 100억 원에 달했다.
냉장고에 붙일 애칭(서브 브랜드)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지펠(ZIPEL)’이라고 정했다. ‘완벽한 품질로 지성과 명예를 중시하는 고객에게 품격 있는 생활을 약속하는 브랜드(Zero defect Intelligent Prestige Elegant Lifestyle)’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래, 이제는 가 봐라. 네 뜻을 마음껏 펼쳐봐라, 지펠.”
1997년 4월, 냉장고사업부는 고급 냉장고시장에 ‘지펠’을 떠나 보냈다. 지펠은 프리미엄 냉장고 수요자의 욕망을 제대로 짚어냈다. 그간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국내 최초 프리미엄 양문형 냉장고 ‘지펠’에 대한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삼성전자에서는 여전히 삼성전자 브랜드를 붙인 일반 냉장고를 판매하고 있었으므로, 이 새로운 고급 냉장고 ‘지펠’이 삼성전자 제품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펠이 참 좋은데, 삼성이 수입해서 파는 거래.”
“삼성이 수입했으니 서비스는 책임지고 잘 해주나 봐.”
“나도 미제 안 사길 잘했나 봐. 옆집 돌이 엄마는 미제가 한번 고장 나면 도대체 애프터서비스가 늦어서 답답한 모양이야.”
매장에서 외국 브랜드와 지펠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다가 결국 지펠을 선택한 한 고객은, 지펠 판매점에서 상품을 직접 설치해주는 광경에 놀라고 감동했다. <지펠 전담 특별 서비스팀>이 달려와 먼저 현관에서부터 냉장고가 놓일 곳까지 붉은 카펫를 깐다.
이윽고 지펠은 그 카펫을 밟으며 우아한 미소를 짓고 등장한다. 이런 광경은 <붉은 카펫>이 내포하는 슈퍼스타 등장의 이미지를 지펠에 그대로 전사했다.
소비자는 이전에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서비스를 경험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경험의 경이감을 이웃집 주부에게 전한다.
“도대체 지펠은 외국 어느 회사 제품이야? 국내에 이런 회사가 있을 리 없어.”
지펠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지펠의 정체에 대한 소비자 궁금증이 증폭되고 여기에 따라 미확인 소문이 돌았다. 프리미엄 마케팅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지펠의 위협적인 상승세가 이어지자 먼저 대응에 나선 것은 국내 경쟁업체가 아닌 외산 업체였다.
“이 냉장고에는 우리가 등록한 핵심 특허가 도용돼 있을 겁니다. 찾아내십시오. 찾아서, 더 확산되기 전에 봉쇄하도록 하십시오.”
외산 업체의 한 임원이 지펠을 구입해 회의실 한가운데 들여놓고, 연구원을 소집해 특명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업체가 수개월에 걸쳐 분석한 결과에서 지펠의 쾌속질주에 제동을 걸만한 특허도용 꼬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외산 업체가 지펠에 대한 특허 분석에 몰두하는 동안 지펠은 ‘프리미엄 냉장고’의 명성을 견고하게 구축해나갔다.
가격경쟁도 비 가격경쟁도 지펠의 공세를 막을 길이 없어 당황한 외산 업체는 뒤늦게 자신만의 ‘장점’을 내세운 마케팅으로 대처했다. ‘백 년 전통의 미국 냉장고는 기술이 다르다’며 한껏 기술력 차이를 앞세워보지만, 이미 지펠의 프리미엄 성능과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경험한 소비자의 입 소문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지펠은 출시 3개월 만에 월간 판매량 2천 대로 치솟으며 고급냉장고 시장점유율 50% 돌파를 기록했고, 6개월이 지나자 월간 6천 대로 수직상승하며 ‘양문형 냉장고 최고 브랜드’에 올라섰다.
지펠 판매가 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국내 경쟁사도 1998년에 양문형 고급 냉장고를 내놓았다. 그 역시 삼성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붙이고 대규모 마케팅을 펼쳤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국내 냉장고 시장은 어느새 고급 양문형 냉장고가 주류로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지펠은 양문형 냉장고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고, 1997년 첫 제품을 내놓은 이래 줄곧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 가전업체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외산 업체는 프리미엄 냉장고 시장에서 1996년 시장점유율 95%에서 2001년 7%라는 참담한 처지로 몰락했다.
다음편에도 계속해서 도전정신이 살아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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