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논란, ‘Y2K 해프닝’을 닮았다
재직 중인 대학에서 ‘전자계산소’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2000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여서 밀레니엄 버그[1]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고, 나 역시 그에 대비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이유 없이 떨어지고, 멀쩡히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을 일으켜 급강하하며, 뭣보다 핵(核) 보유국들이 통제 불가능한 핵을 휘두르는 데 대한 불안이 엄습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1000년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기, 너도나도 ‘컴퓨터 장치 자릿수 오류로 인한 치명적 버그가 불러올 재앙’에 대해 떠들어댔다.
하지만 밀레니엄 버그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기우에 그쳤다. 그만큼 철저히 대비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이후 한동안 뭔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긴 했다.) 아무튼 2000년 1월 1일이 되며 모든 공포는 눈 녹듯 사라졌다.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밀레니엄 버그와 관련된 모든 걸 머릿속에서 지웠다.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요즘 “머지않아 세상을 지배할 혁신”이란 명목으로 세간에 회자되는 기술을 접할 때마다 자꾸 Y2K 위기 직전 상황이 떠오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앞으론 이게 아니면 안 된다” “최고가 되려면 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시대적 흐름을 가장 정확하게 예견하는 단 하나의 기술은 이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는 조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시대적 ‘루저(loser)’가 될 뿐 아니라 종국엔 ‘쫄망할(쫄딱 망할)’ 것”이란 예측도 서슴지 않는다. 그 광경은 흡사 점쟁이가 위협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내놓는 예언 같다. 정말 그럴까?
‘세상을 지배할 신기술’이란 말의 함정
미래 기술, 그중에서도 특히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혁신(innovation)’, 그리고 ‘융합(fusion)’이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처럼 단일 기술이나 서비스가 수직적으로(vertically) 작용하던 시대는 종말이 머지않았다. 아래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y Forum, WEF)이 주목한 ‘세상을 바꿀 기술’ 목록이다. 이 도표만 읽어봐도 향후 기술에선 ‘조합’의 가치가 높아지리란 사실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미래 산업을 주도할 기술로 주목 받는 제품들, 이를테면 △로봇 △3D 프린터 △태양광 패널 △센서 등의 가격은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작게는 수 십 배, 크게는 수 백 배까지 하락했다. 한때 자본과 기술을 겸비한 대기업의 고유 영역이었던 이들 제품(과 기술)이 어느덧 개인 영역으로 내려오며 사실상 진입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기술 자체보다 중요한 건 도입 후 변화
어쩌면 앞서 살펴본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10조 개의 센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데이터 △자율주행 자동차의 도로 점유율이 10%만 돼도 50억 유로 가치의 콘텐츠가 소비된단 사실 △인공지능 음성 인식 기기 발달로 어린아이부터 100세 노인까지 음성으로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된 변화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향후 키보드나 마우스, 터치스크린 같은 장치의 효용은 음성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만간 더 이상 쓰임새가 없는 구시대적 유물이 될 수도 있다. 당초 사람들이 예상했던 미래 인터넷보다 훨씬 더 빠르고 많은 트래픽이 발생할 게 분명하다.
2045년이면 인간 평균 수명이 120세에 이를 전망이다. 2020년부턴 간(肝)과 같은 사람 장기를 3D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가격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장기가 교체 가능하단 예측도 나온다. IT·바이오 기술 간 접목 덕분이다. 이미 구글이 선보였고 내년 초 네이버도 출시할 예정인 음성 인식 번역기엔 40여 개국 언어가 탑재됐다.
한동안 불가능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퀀텀 컴퓨팅은 2011년 ‘세계 최초 상용화 양자컴퓨터’ D웨이브원(D-Wave One) 출시로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계학습과 빅데이터, 인공지능이 결합하며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날로 급증하는 추세다. 일부에선 인간처럼 모든 분야에 걸쳐 지적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 즉 ‘스트롱(strong) AI’ 기술 실현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이 밖에 AR·VR 기술 역시 ‘실제로 체험하면 위험하고 돈도 많이 드는’ 세상을 합리적 비용으로 구현할 수 있단 측면에서 각광 받고 있다. 그래도 거듭 말하지만 이런 기술 자체의 발달보다 각각의 기술이 합쳐지고 나눠지는 과정에서의 산업적·생활적 변화가 현대인에게 필요한 미래 기술 비전이다.
비트코인 광풍, 마냥 반갑진 않은 이유
요즘 가상화폐의 일종인 비트코인(bitcoin) 바람이 심상찮다. “금처럼 매장량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채굴이란 용어가 서슴없이 통용되는가 하면, “비트코인 채굴에 쓰이는 전기량이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의 1년 평균 사용량보다 많다”는 보도도 있었다. 혹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얼마 안 가 현금 없는 사회가 올 것”이란 예측도 내놓는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개발자마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큼 장래성이 불투명하다. 전에 없던 화폐 형태인 만큼 제도적으로 이를 규제하는 국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 투자에 열 올리는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측정할 수 없다”는 아이작 뉴턴[2]의 얘기가 떠오르는 행보다.
비트코인을 둘러싼 최근의 갑론을박은 몇 년 전 역시 전 세계를 휩쓴 모바일 웨어러블 열풍을 연상시킨다. 당시 내로라하는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은 앞다퉈 무지갯빛 분석을 내놓았고, 투자자들도 관련 기술 연구진에 상당한 금액을 ‘베팅’했다. VR과 웨어러블을 결합한 HMD(Head Mounted Display)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기업도 적지 않았다. 특히 페이스북은 VR 기술력을 확보한 소규모 스타트업 오큘러스(Oculus)를 30억 달러(약 3조2388억 원)에 인수,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HMD와 관련 콘텐츠, 그리고 삼성전자가 일으킨 기어 VR 열풍이 새로운 산업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게 사실이다.
마윈 알리바바 그룹 회장의 예언[3]으로 더 유명해진 데이터 기술(Data Technology, DT) 역시 아직까지 총론만 있을 뿐 각론이 없다. 각종 논리가 무성하지만 실질적 가치 구현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기술은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이처럼 몇몇 첨단 기술을 둘러싼 ‘묻지 마 광풍’ 현상은 흡사 독일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뭔가에 홀린 듯 사나이를 좇는 아이들을 연상시킨다.
기술은 수단일 뿐… 중요한 건 ‘리더십’
2016년 7월 카글라얀 아르칸(Caglayan Arkan) 마이크로소프트(MS) 월드와이드 제조·자원 총괄 관리자는 MS 공식 홈페이지에 ‘디지털 혁신: 성공을 위한 일곱 단계(Digital transformation: Seven steps to success)’란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글에서 첫 번째 단계로 언급된 건 다름 아닌 ‘리더십(Leadership matters)’이었다[4].
“혁신을 논할 때 기술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입니다. 혁신의 목표는 리더와 리더십, 그리고 사람이죠.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특성 때문에라도 기술에서 차별화를 이루긴 쉽지 않습니다.”[5] 아르칸의 설명처럼 기술 그 자체보다 중요한 건 실제로 해당 기술을 완성시키는 사람의 철학 또는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이맘때면 사람들은 으레 이런저런 신기술의 등장을 점친다. 특정 기술을 언급하며 그 기술이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큰 시장을 이루고 당장 인류의 삶을 편리하게 해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그런 주장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특정 분야의 헤게모니를 쥐려는 시도가 숨어있다. 2000년 초 ‘밀레니엄 버그 트라우마’로 한동안 고생했던 나로선 비트코인이나 인공지능, 가상(증강)현실 같은 신기술이 그저 기술로만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들을 단순한 기술적 접근으로 보지 않고 거기에 내포된 철학과 원칙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자세가 아닐까?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원고에 쓰인 자료 중 일부는 필자의 페이스북에서 발췌, 인용됐습니다
[1]반도체 칩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2000년을 1900년으로 오인, 사회 시스템이 마비되는 현상. ‘1000년(millennium)’과 ‘컴퓨터 오류(bug)’를 뜻하는 영단어를 합친 말로 ‘Year(연도)’의 ‘Y’와 ‘Kilo(1000)’의 ‘K’를 붙여 ‘Y2K’ 문제라고도 한다
[2]Isaac Newton. 영국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1642~1727)
[3]마윈 회장은 2015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빅데이터산업 설명회 당시 “세상은 지금 정보기술(IT) 시대에서 데이터기술(DT) 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해 주목 받았다
[4]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나머지 여섯 단계는 각각 △효율적 변화 관리(Drive culture change through effective change management) △제품과 고객, 자산 간 연결(Connect your customers, products, assets and people) △데이터 문화(Adopt a data culture) △시행착오에서 배우기(Experiment and fail fast) △생태계에 대한 고려와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의 변화(Think ecosystem and become an enterprise software company) △위협적 경쟁자에 대한 자각(Who is my Uber?) 등이다
[5]원문은 다음과 같다. “Technology is a means, not an end, for transformation. It’s about leaders, leadership, and people. Technology is accessible to everyone, so that is not where differentiation happ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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