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방울의 물만으로 전기를? 누구도 가본 적 없던 길 걷는 신소재공학자
“공공 화장실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스프레이처럼 흩뿌려져 나옵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물 부족’ 스티커가 붙어 있고 호텔 TV에선 ‘샤워는 90초만!’이란 메시지가 울려 퍼져요. 설상가상으로 이곳 주민들이 하루에 쓸 수 있는 물은 1인당 50리터가 고작이에요. 세탁을 주 1회 한다고 가정했을 때 아주 짧은 샤워 1회, 변기 내림 1회 정도만 가능한 양이죠.”
올 초 학회 참석차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케이프타운을 찾은 김일두(44)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남아공의 물 부족 상황은 국가재난사태 선포를 야기할 만큼 심각하다. 남아공의 항구 도시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꼽히는 케이프타운도 예외가 아니다. 메말라가는 땅 위에서 신음하는 주민들을 보며 그는 다짐했다. ‘이윤 생각 하지 말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자!’
김일두 교수는 요즘 일명 ‘자가수분흐름’ 기술 연구에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몇 방울(약 25㎜)의 물만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이 기술은 지난달 초 2018 하반기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사업(이하 ‘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과제에 선정됐다.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하나둘 쌓여갈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는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과 앞으로의 청사진을 들었다.
“잘할 수 있고 나 아니면 아무도 시도 않을” 분야라 도전
그래핀(Graphene)[1]. ‘꿈의 나노 물질’로 불리며 다양한 분야에 혁신을 일으키고 있는 대표적 신소재다. 신소재공학은 이처럼 생활 속 현상을 깊게 탐구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는 학문이다. 누가 먼저 “유레카!”를 외치느냐가 중요한 영역인 만큼 아이디어 발견과 연구 속도 경쟁이 유난히 치열한 분야기도 하다. 김일두 교수가 미래기술육성사업의 문을 두드린 이번 과제 역시 2년여의 기다림 끝에 여문, 인고(忍苦)의 프로젝트다.
“꽤 다양한 연구를 수행해왔지만 하나의 주제를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일종의 확신이 있었어요. ‘지금 하는 연구가 다방면에서 값지게 쓰일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이요.” 평소 그가 꿈꿔온 “내가 안 하면 누구도 도전하지 않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란 점에서도 이번 연구는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시간은 좀 걸려도 포기하지 않으면 정상에 첫 번째 깃발을 꽂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보며 좀 더 많은 후배 연구자들이 쫓아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 덕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필요한 기술에서 시간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김 교수의 신념은 ‘빨리 싹 틔워 빨리 지는 기술보다 깊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다져진 기술이 가치 있다’는 미래기술육성사업의 지원과제 선정 기조와도 맞아떨어진다. “어떤 연구 결과도 그냥 버려지진 않습니다. 자신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충분히 점검, 잘못된 부분을 인지하고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거쳐 수정해가는 과정이 정말 중요해요. 외부 환경도 뒷받침돼야죠. 진정한 ‘하이 임팩트 연구’가 탄생하려면 당장은 성과가 없어 보여도 내실을 다지는 초기 단계를 지켜봐주고, 긴 호흡으로 연구에 임하는 과학자를 격려하는 연구 풍토가 자리 잡혀야 합니다. 10년 후 미래기술육성사업 결과물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에너지원은 수분, 충전도 스스로… 첨단 신소재의 가능성
‘움직이기만 해도 생기는 땀이나 대기 중 흩날리다 사라지는 수분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순 없을까?’ 김일두 교수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됐다. 신소재공학자답게 그가 내놓은 대안은 ‘새로운 직물 제작’. 평균 300나노[2]미터의 섬유가 ‘얀(Yarn)’으로 불리는 초고밀도 실 형태로 짜인 게 이 직물의 특징이다. 얀의 직경은 수백 마이크로미터(㎛) 수준으로 단위 부피당 표면적이 넓다. 직조가 가능해 옷이나 가방 같은 웨어러블 형태로도 제작할 수 있다. 기능성 흡착제가 코팅돼 있어 땀이나 수분을 자동으로 포착,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가수분흐름 기술이 상용화되면 웨어러블 기기 개발 시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배터리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 충전을 반복하지 않아도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 “이전에도 진동을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압전소자, 혹은 마찰 전기를 활용한 에너지 생성 장치(energy harvesting system) 같은 게 웨어러블 기기용 배터리의 대안으로 개발돼왔습니다. 하지만 출력되는 신호가 교류 전류란 점이 발목을 잡았죠. 그걸 일일이 직류 전류로 바꿔주는 장치가 필요한데 그걸 추가하면 디자인이 훼손될 수 있거든요. 반면, 이번에 저희 연구진이 개발한 장치는 직류 전류를 바로 생성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전기방사 기술로 제조된 나노섬유 ‘멤브레인(membrane)’은 무작위적으로 얽힌 미세기공 구조를 지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걸러낸다. 방수 기능을 활용하면 기능성 의복 제작에도 쓰일 수 있다. 그는 “신소재공학적 관점에서 멤브레인이나 얀의 성능을 개선시킬 수 있는 소재 조합은 무궁무진하다”며 “지금 연구 중인 고효율 직류 에너지 생성 장치를 완성해 실생활에 꼭 적용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물도, 전기도 부족한 나라 아이들이 물 몇 방울 떨어뜨려 불을 켜고 책도 읽는 모습을 종종 상상합니다. 진짜 그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난 학자인 동시에 교육자… 중고생 진로 선택 돕고 싶어”
논문 241건, 출원 특허 207개, 기술 이전 9건…. 김일두 교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과학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천생 교육자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본업’ 외에 교회 중등부 교사 일을 하고 과학고·영재학교 재학생 대상 강연도 펼친다. “어린 친구들은 누군가의 한마디에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요. 사회에서 성공한 멘토나 관심 업계에 있는 선배의 진심 어린 조언이 꿈의 크기를 바꿔놓기도 하죠. 저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을 만나는 자리에선 더더욱 건강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많이 심어주려 노력합니다. 흔히 인생을 ‘빈 도화지에 완성해가는 그림’에 비유하곤 하잖아요. 중고생 시절은 바로 그 도화지의 크기를 결정하는 시기란 점에서 특히 중요하단 게 제 생각이에요.”
교육자로서의 활동은 김 교수 자신의 삶에도 큰 동력이 된다.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목표를 찾아 정진하는 제자들을 보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다”는 것. “연구만 해왔다면 분명 지치는 순간이 많았을 거예요. ‘좀 더 나은 연구를 통해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돼야겠다’는 생각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후배 과학자들에게 그가 건네는 당부는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연구 분야를 확립하려면 끊임없는 도전은 필수”란 게 그의 생각. “저만 해도 이번 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과제 도전이 세 번째예요. 2015년과 2017년 두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죠. 한두 번 실패로 낙담하고 포기했더라면 이번 성과 역시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배 여러분도 명심하세요.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 그건 실패가 아니란 사실을요.”
[1]2010년 영국 가임(Andre Geim)·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 연구 팀에 노벨물리학상을 안긴 신소재. 흑연의 가장 얇은 층에서 추출한다. 전자 이동 속도가 실리콘 반도체보다 100배 이상 빠르고 구리보다 100배 많은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다. 강철보다 약 200배 단단하며 열 전도성이 다이아몬드보다 2배 이상 높아 ‘세상에서 가장 얇지만 강한 물질’로 불린다
[2]국제 단위계에서 1나노는 10억 분의 1을 나타낸다
삼성전자 뉴스룸의 직접 제작한 기사와 이미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뉴스룸이 제공받은 일부 기사와 이미지는 사용에 제한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콘텐츠 이용에 대한 안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