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이론과 실용 반도체가 만났을 때…반도체의 미래가 앞당겨졌다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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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과학적 검증을 거친 이론도 훗날 새로운 가설에 의해 다시 평가받고, 수정되기도 한다. 생각을 뒤집어 기존의 관념에 도전한 연구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발상의 전환’은 과학의 지속적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7월 3일 발표된 이준희 교수(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의 발견 역시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됐다. 반도체 내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필요한 영역인 도메인을 개발하는 대신, 개별 원자에 직접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에 집중한 것. 덕분에 이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신소재와 이론 발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그의 의지는 2019 하반기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과제로 선정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신소재 발견의 주인공인 이준희 교수(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 이번 신소재 발견의 주인공인 이준희 교수(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은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발전과 산업기술 혁신, 과학기술로 사회가 직면한 문제 해결, 그리고 세계적인 과학기술인(人) 육성을 목표로, 삼성전자가 2013년부터 10년간 1조 5천억 원을 출연하여 시행하고 있는 순수 공익 목적의 과학기술 연구지원 사업이다.

매년 상·하반기에 각각 기초과학, 소재, ICT 분야에서 지원할 과제를 선정하고 1년에 한 번 실시하는 ‘지정테마 과제 공모’를 통해 국가적으로 필요한 미래기술분야를 지정, 해당 연구를 지원한다. 이준희 교수의 새로운 반도체 소재 개발 과제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지원하고, 우수한 신진 연구자 발굴을 목표로 하는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했다. 삼성전자와 이준희 교수의 동행이 시작된 이유다.

 

도메인에서 개별 원자로, 획기적 발견 이끈 ‘발상의 전환’

지금까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도메인’을 필요로 했다. 도메인은 반도체에 데이터를 기록하기 위해 원자 수천 개를 모아 둔 영역으로, 도메인을 아주 작게 만드는 기술이 지금까지 반도체 산업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였다. 다만 최근에는 그 크기가 수십 나노 수준까지 작아지면서, 공정 미세화에 한계가 왔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준희 교수는 모두가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던 도메인의 존재에 의문을 던졌다. 원자 묶음 형태인 도메인 대신 개별 원자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면 작은 영역에 더욱 세밀한 공정을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이를 위해서는 원자의 개별 조작을 막아왔던 특유의 탄성력을 제거해야 했다.

오랜 기간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답을, 이준희 교수는 순수 물리 이론에서 찾았다. 서울대에서 이론 물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전문분야인 이론을 적용할 ‘실용적인 물질’을 찾고 있었고, 메모리 반도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사 후 연구원 시절 미국에서 원자 간의 탄성 상호작용을 없앨 수 있는 이론을 연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화물 HfO2에 물리 이론을 접목했다.

그는 “HfO2는 본래 메모리 스위칭이 잘 안 되는 물질이라 여겼다. 그런데 탄성 작용이 사라지는 물리 이론을 적용하면서부터 가치가 달라 보였다”며 “반복 연구를 통해 HfO2가 전압을 걸 때만 탄성 작용이 0에 수렴하는 물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소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오던 이준희 교수는 이를 반도체 분야에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의 연구는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지원과제로 당당히 선정되었다.

 

단일층으로도 폭발적인 용량…HfO2가 열 ‘초집적화 시대’

전압과 함께 탄성력이 사라진 HfO2는 원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움직일 수 있어, 도메인 없이도 산소 원자 4개면 1비트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단위가 확 줄었다는 것은 곧 기존 반도체의 저장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준희 교수는 “HfO2는 낸드플래시처럼 128층의 적층 구조를 만들지 않아도, 단일층만으로 제곱센티미터(㎠) 당 500테라비트 이상 저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기존 메모리 반도체의 저장 능력이 1000배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향상되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적층 구조를 도입할 경우, 용량은 훨씬 늘어난다”며 “반도체 산업이 경험할 최종 집약도를 가진 물질과 이론”이라고 덧붙였다. HfO2는 단일층 만으로도 많은 데이터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크기와 두께가 중요한 플렉시블 기기에 특히 유리하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는 반도체 산업의 초집적화 시대를 여는 기초가 될 것이다”라며, “0.5나노는 원자 간 최소 거리이므로, 사실상 인류가 한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 집약 공정이다”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이준희 교수(맨 오른쪽)와 연구팀

▲ 이준희 교수(맨 오른쪽)와 연구팀

 

높았던 사이언스 지의 벽 앞에서 떠올린 봉준호 감독

메모리 반도체가 갖고 있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지만,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 출간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준희 교수는 “순수 물리 이론을 실용적인 메모리에 적용하는 독창적 연구였던 만큼, 논문 작성부터 쉽지 않았다. 논문 초록만 100번 이상 쓴 것 같다”고 힘겨웠던 과정을 돌아봤다.

논문이 리뷰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반면, 편집자 회의를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이언스 지는 에디슨, 벨 등 실용 과학자들이 창간한 학술지인 만큼, 실험 데이터가 없는 순수 이론 논문은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이언스에 실린 가장 유명한 순수 이론 논문은 1936년 게재된 아인슈타인의 중력 렌즈 이론으로, 그로부터 40년 이상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그 이론을 입증하는 데이터가 관측되었다. 새내기 과학자에게 그 문턱은 훨씬 높을 수밖에.

힘든 시간을 보내던 이준희 교수에게 외국영화로서 처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던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은 벽을 뛰어넘기 위한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근본적인 이론 보강과 실증적인 시뮬레이션을 반복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뜻밖에 다른 저명 학술지인 네이처에서 이준희 교수 이론의 일부를 증명하는 실험을 보고했다. 이후 논문 심사자들이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빠르게 출간이 결정됐다. 세계적 석학들의 지속적인 리뷰를 통한 검증과 찬사에 힘입어 새내기 과학자의 이론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기초 과학과 실용 분야의 결합” 이준희 교수의 목표

이 교수가 일군 성과는 단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상용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HfO2는 실리콘 친화적인 반도체로 이미 스마트폰, 태블릿, 스마트워치, PC 등 다양한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 HfO2의 특성을 적용한다면 이런 제품들을 한층 고성능·저전력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시스템 반도체 개발이나 초집적·초절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구현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는 HfO2에 대해 “제곱센티미터(㎠)당 0.1테라비트에 멈춰있는 평면 반도체 집적도를 향후 제곱센티미터당 500테라비트까지 끌어올릴 유일한 소재가 될 것”이라며 “글로벌 경쟁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빠른 상용화를 위해 정부와 기업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 교수의 이번 성과는 순수 물리 이론을 실용 반도체에 적용한 ‘융합 과학’이 고정된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나 같은 순수 이론 물리학자가 실험과 소자 쪽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앞으로도 기초 과학과 첨단 기술의 양극단을 절묘하게 연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상업화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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