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6부작 특별 기획 ‘IT로 문화 읽기’_③스토리텔링, 태초에 ‘이야기(story)’가 있었다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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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6부작 특별 기획 ‘IT로 문화 읽기’_③스토리텔링, 태초에 ‘이야기(story)’가 있었다

구한말 우리나라 농촌 풍경을 잠깐 들여다보자. 아래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한 대목이다.

평사리 마을 아낙네들이 저녁을 먹은 후 두만네 집에 바느질하러 모였다. 함안댁이 입을 떼었다. “옛날에 어느 재상가에 사기장수가 하룻밤을 묵어갔더라네.”
다음 날 재상 부인이 사기장수를 따라 도망친 게 밝혀졌다. 재상은 부인을 찾아 팔도 방랑길을 떠나 어느 날 깊은 산골 움막집에 묵게 됐는데, 거지 같은 꼴을 한 그 집 아낙이 바로 자기 부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전생록을 펼쳐보고 그는 모든 걸 이해하게 됐다.
“전생록에 재상은 중이었고 사기장수는 곰이었고 부인은 이더라네.”
“저런!”
“어느 날 중이 산길을 가다가 몸에서 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살생을 하지 못해 망설이다가 마침 죽어 넘어진 곰 한 마리가 있어서 거기다 이를 버리고 길을 떠났다는 거야. 그러니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고 잘살고 못사는 것도 모두 전생에서 마련된 것 아니겠나?”
아낙들은 멍해져서 ‘나는 전생에 멋이었을꼬?’ 생각하는 눈이 된다.

 

그리스 신화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까닭

현대인 가운데 함안댁 얘기에 감동 받는 이는 흔치 않다. 또 대부분은 ‘저녁 식사 후 바느질거리를 들고 모이는 아낙네들’에 속해본 적도, 그런 풍경을 접한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위 장면 속 아낙네들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요즘도 꽤 많은 어머니가, 아내가 매일 저녁상을 물린 후 TV 앞에 앉아 ‘본방(송) 사수’에 목숨을 건다. 이 시간대, ‘연령 좀 있는’ 여성의 공중파 채널 통제권은 아무도 넘보지 못한다. 단지 용모가 빼어난 선남선녀 출연자 모습만 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까지 집착하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출연자가 나온다 해도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시청률은 한참 내려간다. ‘드라마 마니아’의 관심을 강하게 끄는 건 ‘다음 얘긴 어떻게 전개될까?’란 호기심이다.

이게 바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힘이다. 남성이라고 해서, 어리다고 해서 그 힘에 좌우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린이가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 장르에서도, 남성 이용자의 비율이 압도적인 게임 장르에서도 콘텐츠의 인기를 좌우하는 건 단연 스토리다. 스토리가 재밌을수록,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이 클수록 그에 열광하는 소비자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한 남성이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의 파급력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는 인류의 문화사(史)를 되짚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오늘날 문화 콘텐츠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우리나라 전통 설화 따위는 모두 ‘언제부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평사리 함안댁’ 같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글자도, 전문 교육기관도 없던 시절 이런 이야기(stoty)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잘 누리는 방법)에 대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주된 요소였다.

 

“인간 뇌는 스토리를 찾음으로써 콘텐츠에 반응”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1]란 충격적 명제가 처음 등장한 건 지난 1964년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디어는 그저 ‘콘텐츠 제공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스토리)을 담는 수단’ 정도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 명언이 등장한 이후 ‘미디어가 발신하고자 하는 메시지 내용을 좌우하는 건 미디어 자체의 특성’이란 사실이 한층 명확해졌다. 이후 (새로운 메시지를 형성, 전달할 수 있는) 뉴미디어 관련 실험이 열정적으로 진행돼왔다. 그 결과, 현대인은 모바일 콘텐츠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다양한 메시지를 손쉽게 접하는 동시에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어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1] 이 명제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달 25일자 스페셜 리포트 참조

 

하지만 기술적 부분이 아무리 발달해 표현 방식이 다양해져도 그것만으로 좋은 콘텐츠를 생산할 순 없다. 콘텐츠란 만든 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담아 나르는 ‘미디어’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스토리’로 바뀌며 비로소 구체화된다. 파멜라 러트리지(Pamela B. Rutledge) 미국 미디어심리연구센터(Media Psychology Research Center) 소장의 설명은 이 관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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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거나 타인과 직접 소통할 때, 혹은 뭔가 영감 주는 모습을 창조해낼 때 거기엔 반드시 ‘스토리’가 있어 얘길 건넵니다. 크로마뇽인이 산화철이나 흑망간 같은 광물성 염료로 바위나 동굴 벽에 색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래 실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스토리와 메시지가 공급돼왔습니다. 기술이 점점 더 세련되고 놀라운 기량을 갖추도록 발전하는 사이, 도구 역시 한층 더 사용자 친화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데 이렇게 흥미로운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인간의 뇌는 기술보다 훨씬 느린 진화의 궤적을 밟고 있습니다. 우리 뇌는 여전히 스토리를 찾음으로써 콘텐츠에 반응합니다. 이때 스토리는 테크놀로지에서 튀어나와 우릴 경험의 핵심으로 인도하죠. 어떤 기술을 이용하든 그 의미는 두뇌에서 출발하니까요.” 

이 같은 주장은 뇌신경과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의 대표 주자’ 폴 잭(Paul Zak) 박사는 지난해 ‘스토리텔링이 인간 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발표했다. 신경경제학이란 인간의 사회∙경제∙문화적 행동을 두뇌와 중추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관련해 설명하려는 학문.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조사했더니 뇌호르몬의 일종인 ‘옥시토신(oxytocin)’이 상당량 분비됐다.

옥시토신은 인간과 같은 사회적 동물에게 대단히 중요한 호르몬이다. 자기 앞의 특정 대상에 대해 "내게 호의적인 존재이니 접근해도 된다”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체내 신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신 산부인과 전문의로 ‘건강한 출산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미셸 오당(Michel Odent) 박사는 “인간에게서 옥시토신이 가장 많이 분비되는 순간은 여성이 아기를 분만할 때”라고 말한다. 산모의 체내 옥시토신 농도가 최고조에 이르러 새 생명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직후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기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커다란 애정을 느끼며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는 얘기다.

한 꼬마가 그림동화를 보며 곰인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옥시토신이 ‘오로지 (스토리 몰입도가 큰) 영화를 보는 행위’만으로 다량 분비됐다는 사실은 뭘 의미할까? 잭 박사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유전자 정보란 실제 경험이 아니어도, 그저 스토리만으로도 세상과 관련 지을 태세를 갖추도록 작동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다시 말해 스토리 자체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IT 시대 스토리텔링의 핵심, ‘인터랙티브니스’

몰입도 높은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은 인류사를 거치며 여러모로 활용돼왔다. ‘신화(神話)’, 즉 ‘신의 이야기’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myth’는 원래 ‘이야기’란 뜻이다.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포함, 전통 사회의 모든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르침’을 담는 교육 수단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선동이든,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뒷담화든, 이도 저도 아니면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로비든 ‘스토리라인(storyline)’이 잘 짜여야 성공적일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스토리텔링의 전통은 인간의 언어 구사 역사만큼이나 오래다.

하지만 아무리 유구한 전통이라 해도 그 시대의 미디어에 잘 담기지 않으면 박물관 유리 진열장 속 콘텐츠처럼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미디어는 물질적 차원에 속해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사용돼온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텔링이라 해도 소비자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되려면 그걸 담는 미디어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가 스토리에 영향을 주면서 두 요소가 합쳐져 최종적으로 콘텐츠를 구성한다.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시절, ‘입소문’이 유일무이한 매체였던 시절의 스토리는 스토리텔러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런 미디어의 특성상 스토리는 전달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스토리는 준비 단계에서 시청자 반응을 예측해가며 철저하게 짜이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스토리텔링은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몇 가지 흐름은 분명 존재한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게 ‘인터랙티브니스(interactiveness)’, 즉 상호작용성이다.

IT 기술 발달이 이끄는 뉴미디어 시대에 스토리텔링은 미디어의 영향을 어떻게, 얼마나 받을까? 단순하고도 선명한 대답을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이삼십 년간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가 쏟아져 나오며 제시된 가능성들이 향후 시장에서 소비자와 어떻게 만나 방향을 잡아갈지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하긴 어렵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몇 가지 흐름은 분명 존재한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게 ‘인터랙티브니스(interactiveness)’, 즉 상호작용성이다.

IT 기술 발달로 탄생한 뉴미디어는 쌍방향 소통을 가능케 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 실시간으로(혹은 아주 근소한 시차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체 이야기 속에 통합시킬 수도 있게 됐다. 인터랙티브 디지털 게임, 인터랙티브 웹 다큐멘터리 등 소비자를 제작 과정에 깊이 개입시키는 문화 콘텐츠가 여럿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다.

오늘날의 스토리텔링이 첨단 기술에 기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 반응’이란 새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용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같은 변화로 IT 시대 문화 산업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간 경계는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대표적 예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이다. ‘실시간 채팅’이란 웹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통해 생산자가 소비자의 반응을 살펴가며 내용을 완성해가는 이 콘텐츠의 포맷은 그간 인터넷 방송에서 시도해오던 인터랙티브 웹 다큐멘터리 형식을 지상파 방송이 차용, 대중화의 폭을 넓힌 사례로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포맷이 의외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메시지를 함축한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스토리텔링이 첨단 기술에 기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 반응’이란 새 환경에 맞게 끊임없이 변용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같은 변화로 IT 시대 문화 산업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간 경계는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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