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만들어 낸 오해가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말 저녁 딸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아빠 회사가 정말 그런 일을 했어?”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영화를 봤는데 주인공이 불쌍해서 여러 번 눈물을 흘렸고,
사실을 숨기려 나쁜 일을 서슴지 않는 회사의 모습에 화가 났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늘 아빠 회사가 자랑스럽다던 딸아이였습니다.
이달 초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제가 일하고 있는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근무했던
故 황유미씨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자랑스럽게 일해온 회사가
영화에서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유가족을 회유하고
심지어 증인을 바꿔 치기해 재판의 결과를 조작하려 하는
나쁜 집단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일반 관객들이 저의 회사에 대해 느낄
불신과 공분을 생각하면 사회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홍보인으로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저 영화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엔
영화가 일으킬 오해가 너무나 큰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가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일까?
회사는 독극물을 사용해 제품을 만들면서도 직원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불행과 고통에 빠진 직원의 아픔을 외면한 채 숨기기에 급급했었나?
또 돈만이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거래하고 저울질했을까?
제가 기흥사업장에 근무하면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인과 유가족을 만나 아픔을 위로하고자 했던 인사 담당자를 알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가 직원의 불행 앞에서도 차갑게 미소 짓는 절대악으로 묘사됐지만,
제가 아는 그분은 영화 속 아버지처럼 평범한 가장이고 직장인일 뿐입니다.
오히려 고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더 많이 도와 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던 분입니다.
저는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화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어떤 물질이 어떻게 해로운지도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해 하나씩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직원과 사업장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회사와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정부의 환경 기준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제가 근무하는 일터의 안전에 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기획부터 제작, 상영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홍보를 펼쳤지만
회사가 그에 대해 한마디 입장도 밝히지 않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허구의 이야기를 사실처럼 포장해, 제가 다니는 직장을 범죄집단처럼 그리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고,
제가 다니는 직장의 동료에게 닥쳤던 불행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일이 시비를 가릴 일이 아니라는 회사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의 가공된 장면들이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에 유포될 때도 침묵을 유지하고,
심지어 근거 없는 ‘외압설’이 퍼지는 것도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이 진실을 물어올 때조차
공연한 논쟁으로 시비를 일으킬까 걱정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이제 딸아이까지 아빠의 일터를 불신하고
아빠가 하는 일이 진실을 가리는 것이라고 의심하도록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가슴으로 이해합니다.
또 그 아픔을 위로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길에서 싸우게 한
회사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예술의 포장을 덧씌워 일방적으로 상대를 매도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외압설까지 유포하며 관객을 동원하고
80년대에나 있었던 단체관람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 영화가
단순한 영화가 아닌 투쟁 수단으로 변질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해 물어오는 질문에 한참을 설명한 후에야
아이가 오해를 푸는 것을 보면서 제가 속한 이 조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설명이 부족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서툰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다니는 회사는 최소한 영화가 그려 낸 그런 괴물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제가 속한 이 회사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삼성전자 부장 김선범
(DS부문 커뮤니케이션팀)
※영화 속 장면들이 일으킬 수 있는 오해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에서 상세한 사실관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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