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마니아’와 ‘테크포비아’의 협곡, 무사히 지나려면

2018/09/20 by 전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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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마니아’와 ‘테크포비아’의 협곡, 무사히 지나려면 / 세상을 잇(IT)는 이야기 / "IT 산업의 현주소를 읽다!" 급변하는 IT분야에선 매일같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이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IT 트렌드와 업계 흐름을 읽고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한 이유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날카로운 통찰로 풀어낼 IT산업의 현주소와 미래, 삼성전자 뉴스룸의 기획 연재. '세상을 잇(IT)는 이야기'를 통해 만나보세요

최근 번역된 공상과학(SF)소설의 고전 중 ‘에레혼(Erewhon)’(1872)이 있다. 다윈[1]과 같은 시대를 산 영국 작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가 진화론에 착안해 쓴 작품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형식을 취한 이 이야기엔 ‘기계 없는 사회’가 등장한다. 등장인물이 미개해서가 아니다. 생각이 앞선 나머지, 기계의 진화를 우려해 모두 파괴해버리는 설정이다. 소설 속 ‘기계 파괴 혁명’의 주역은 이렇게 변론한다. “나는 현존하는 기계 중 어떤 것도 겁내지 않음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보다는 지금 모습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가는 놀라운 속도가 두려울 뿐이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존재도 그토록 빠르게 진보한 적이 없다. 우리가 아직 제어할 수 있을 때 이런 움직임을 경계하고 주시하고 제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사용되는 기계 중에서 좀 더 발전된 기계를, 당장은 무해할지언정 파괴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아직 기계의 진화를 제어할 수 있을 때 이런 움직임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사용되는 기계를, 당장은 무해할지언정 파괴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기술적 진보는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킬 것”

기계 파괴 혁명을 실제로 시도한 사람도 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J. Kaczynski)가 그 주인공. ‘유나바머(Unabomber)[2]’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미국인은 1978년부터 1995년 사이 16회에 걸친 우편물 폭탄 테러로 3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다치게 한 끝에 붙잡혔다. 17년 만에 체포되기 전 그의 요구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의 주장이 담긴 글을 유력 일간지에 내달란 거였다. 지금 같으면 트윗 한 번으로 족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뭔가 알리려면 신문만 한 수단이 없었다. ‘산업 사회와 그 미래’[3]란 제목의 그 선언문은 실제로 1995년 9월 19일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각각 실렸다.

기술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삶은 무의미하게 만든다 / 기계를 부수고 있는 사람의 모습

3만5000개나 되는 단어로 구성된 선언문의 요지는 이랬다. “기술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삶은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며 광범위한 심리적 고통을 초래했다. 기술 진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은 인위적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대리 만족’에 종사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며 자기 주도적 활동과 만족은 얻을 수 없게 됐다. 기술적 진보는 결국 광범위한 인간 유전공학으로 이어질 것이며, 인간은 사회 시스템의 지배자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정되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체제가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한 결과도 더욱 참혹해진다. 어차피 붕괴될 거라면 빠를수록 좋다.” 카진스키는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하버드대를 나와 24세에 UC버클리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된 천재였다. 그의 글이 당대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과 인간은 결코 상극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줄곧 기술과 함께 진화해왔다. 5만 년 전 인류가 사방으로 팽창한 이래 의식주에 걸친 기술은 하나같이 생존과 번영의 발판이었다

기술에 대한 반감은 산업혁명 시대 러다이트(Luddite)[4]운동 이래 주기적으로 표출됐다. 요즘도 SF 장르의 소설과 영화에선 기술이 초래할 묵시론적 이야기가 많다. 기술과 인간, 과연 상극일까? 연원을 따져보면 그 반대다. 인간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기술과 공진화(共進化)해왔다. 5만 년 전 인류가 사방으로 팽창한 이래 의식주에 걸친 다양한 기술은 생존과 번영의 발판이었다. 영단어 ‘기술(technology)’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만 해도 당초 솜씨와 기교, 영리함을 포괄하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로마로 건너가 라틴어 ‘아르스(ars)’가 됐고, 여기서 다시 ‘아트(art)’가 나온 사실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인간이 빚었지만 독자적으로 진화하는’ 기술

기계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

기술의 차원이 달라진 건 근대의 일이다. 과학 지식과 산업 자본의 양 날개(정도가 아니라 터보 엔진에 가깝다)를 단 기술은 눈부신 도약을 거듭했다. 최근 들어 기술은 디지털화하는 동시에 물리적 제약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 발전이다. 미국 기술철학자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이를 ‘테크늄(technium)’으로 명명한 후 “인간 마음의 산물이지만 독자적 생명체처럼 진화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공생(共生)하고 공영(共榮)해온 인간과 기술 간 보폭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단 사실이다. 이와 관련, 최근 다시 고개 들기 시작한 ‘테크포비아’[5]의 근저엔 뚜렷한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자동화로 인한 실직의 불안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수준이 크게 신장하면서 인간 일자리는 시시각각 위협 받고 있다. 마치 섬 기슭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듯 하위 단순 업무부터 대체될 거란 사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한편에선 ‘직무 재교육을 통한 전직’을 대안으로 꼽지만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을뿐더러 그 과정에서의 단계적 도태도 불가피하다. 프랑스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가 임금 노동에서 기여소득제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6].

기술 진보 수혜 격차는 부의 불평등 심화와 맞물려 갈수록 분명한 차이를 낳고 있다. 이를 방치할 경우, 경제 불평등은 자칫 기술 때문에 항구적∙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기술이 낳은 혜택의 불평등이다. 기술 발전에 관해 이제껏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돼온 견해는 “기술 비용은 낙수(落水)[7] 효과 덕에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그 결과, 평균 생활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였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숨가쁜 기술 진보 수혜 격차는 부(富)의 불평등 심화와 맞물려 갈수록 분명한 차이를 낳고 있다. 이런 현상을 방치할 경우, 경제 불평등은 자칫 기술 때문에 항구적·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빈부 격차에 대한 분노가 커져가는 건 그런 전망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셋째, 기술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협이다. 사실 이 현상은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연관돼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정보 유통 체계를 바꿔놓았다. 언론 독과점은 깨진 지 오래. 바야흐로 만인(萬人) 미디어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은 기술을 ‘자유와 해방의 첨병’으로 떠받들었다. 언로(言路)가 확대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은 순식간에 ‘정보 홍수’에서 ‘가짜 뉴스’로 옮겨갔다. 오늘날은? 일명 ‘탈(脫)진실 시대’다. 정보의 신뢰 하락은 공동체 신진대사에 치명적이다. 그 결과를 지금 세계가 앓기 시작했다.

넷째, 기술은 인간 정체성마저 위협할 기세다. 성형수술이나 항우울제 차원이 아니다. 이젠 두뇌 개선, 나아가 유전 형질 개량까지 언급된다. 이런 움직임은 늘 난치병 치료에서 시작되지만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곧장 개량과 증강으로 이어진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유전자 가위’라 부르는 건 의미심장하다. 기질과 성향까지 색종이처럼 쉬 오리고 붙일 수 있게 됐단 뜻이기 때문이다.

현대 인류, ‘첨단기술’이란 이카루스 날개 달다

켈리는 인간 확장으로서의 기술을 논하며 그게 야기할 선택과 가능성의 무한 확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자율적 기술 이면의 산업 논리는 간과한다. 중요한 건 모든 기술 뒤에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자리 잡고 있단 사실이다. 실제로 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끄는 건 어느 한 세력의 작용일 수 없다. 엔지니어의 아이디어와 기업의 의사 결정, 정부의 정책 수립, 유권자의 여론 생성이 고루 작용한 결과다.

기술이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해답이 기술의 혐오나 배격이 돼선 안 된다. 오히려 섬세하고 사려 깊은 기술을 궁리, 개발하는 게 현명한 대처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 엔지니어 다이달로스(Daedalus)는 아들 이카루스와 크레타섬을 탈출하며 날개를 활용했다.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만든 날개였다. 출발 전 그는 이카루스에게 두 가지를 경고했다. “태양열 때문에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너무 높이 날진 말라”는 게 하나, “바다 물기에 날개가 무거워질 수 있으니 너무 낮지 않게, 하늘과 바다의 중간으로만 날아라”는 게 다른 하나였다.

밀랍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사람

현대인의 운명 역시 밀랍 날개로 하늘을 날아야 하는 이카루스의 그것과 닮았다. 그들에겐 ‘기술’이란 이름의 날개가 주어졌으며, 일단 그걸 접거나 꺾지 않고 날아야 한다. 기술이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해답이 기술의 혐오나 배격이 돼선 안 된다. 오히려 좀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기술을 궁리, 개발하는 게 현명한 대처일 수 있다. 테크마니아(technomania)와 테크포비아의 협곡을 무사히 지나려면 오랜 기술을 다시 소환해야 할지도 모른다. 쓰기와 읽기를 통한 ‘생각하기’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 번 칼럼에선 그 얘길 해보려 한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Charles R. Darwin(1809~1882). 영국 생물학자로 진화론과 자연선택설을 주장했다. ‘종(種)의 기원’ 등의 책을 썼다
[2]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의 약자
[3] 원제 ‘The Unabomber Manifesto: 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4] 1811년 영국 중∙북부 섬유 공업 지대 노동자를 중심으로 진행된 반(反)자본주의 운동
[5] techphobia.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라고도 하며 ‘진보된 기술이나 복잡한 기기에 대한 공포나 비호감’을 일컫는다
[6] 스티글레르는 올봄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대담집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문학과지성사)에서 “임금으로 교환되는 노동은 진정한 앎을 파괴하므로 사라져야 하며, 보수와 무관하게 앎을 키우는 ‘기여 소득’을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7] trickle-down effect.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투자 확대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저소득층 소득 증가에까지 기여하게 되는 현상

by 전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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