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당신을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 해서 삶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2018/07/26 by 전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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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가족

철학자 헤겔[1]의 아침 의례 중 하나는 신문 읽기였다. 일기에 “조간 신문을 읽는 건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라고 썼을 정도다. 나도 매일 국내외 저널을 챙겨 보는 편이다. 헤겔은 세상사를 보며 신(=역사이성)의 행보를 읽었다는데, 나는 새로 접하는 단어나 표현에서 변화의 단서를 찾곤 한다. 최근 알게 된 단어로 ‘뉴티클(neuticles)’이 있다. 반려동물 주인이 수컷의 민망한 모습을 피하려 거세 수술을 하고선 그 녀석의 우울증이나 허전함을 달래주기 위해 시술하는 실리콘 보형물을 뜻한다. 그 단어가 소개된 장문의 뉴욕타임스 기사엔 요즘 미국인이 ‘털 없는 아기’에게 들이는 각종 ‘케어(care)’ 비용이 웬만한 사람의 생활비 수준을 넘었을 뿐 아니라 점점 기괴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새로 접하는 단어나 표현에서 세상 변화의 단서를 찾곤 한다. 최근엔 '뉴티클9거세된 반려동물용 인공 고환-' 이란 영단어를 통해 점점 기괴하게 변해가는 펫 문화의 기저를 돌아보게 됐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날 국내 한 일간지 특집 기사 주제도 반려동물이었다. 어느 매체 할 것 없이 언젠가부터 주변에 갖가지 펫(pet) 사진과 동영상, 관련 정보가 차고 넘친다. 나홀로족과 비혼(非婚)족, 딩크(Double Income, No Kids)족에 이어 딩펫(DINK+pet)족까지 늘어난 세태의 반영일 것이다. 생명윤리철학자 피터 싱어[2]는 동물권(animal rights)을 옹호하면서 인간의 공감 능력이 다른 생명체로 확장되는 도덕적 진화의 단계로 설명한 바 있다. 반려동물 문화의 확산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행여 인간끼리의 반목과 소통 능력의 퇴화가 그 방향으로 치닫는 건 아닌지 간혹 의심스럽다.

“위 아 더 월드” 노래하던 휴머니즘은 어디 갔을까

인종, 문화, 성별, 국가 등등 다양한 이유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렇잖아도 연일 뉴스 면을 장식하는 게 난민[3] 이야기다. 유럽 난민 사태에 이어 미국 국경 봉쇄로 인한 가족의 생이별 사연이 전해지더니 제주도에서도 예멘 난민이 쟁점으로 등장했다. 여기에 각종 ‘혐오’까지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외국인 혐오, 남녀 간 혐오, 각종 소수자 혐오…. 상대는 다 같은 사람과 사람이다. 한때 “손에 손 잡고”며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를 노래하던 휴머니즘은 어디 갔을까. 최근의 이런저런 표면적 균열이 자동화에 따른 ‘잉여 인간론’과 합쳐지며 사람들 마음 근저에서 일기 시작한 자기 정체성의 위기로 이어진 건 아닐까.

전통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어떤 초월적 기반에서 찾았다. 동서를 막론하고 신화나 종교, 형이상학적 해석이 삶의 의미를 뒷받침했다. 근대 이후 ‘탈(脫)주술화’와 함께 세속 사회가 도래한 후엔 민족과 국가 이념이 대중의 정신적 공백을 메웠다. 그 와중에도 인간 존엄성의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제였던 이성적 인간상은 19세기 들어 다윈(“인간도 동물이다”)과 니체(“신은 죽었다”), 프로이트(“인간은 리비도[4]다”)의 연타로 기울기 시작했다. 급기야 전후 유럽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주체의 해체’와 ‘인간의 죽음’을 앞당겨 말했다.

오늘날 신경과학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다. 뇌는 모듈의 조합처럼 시시각각 다양한 일을 분담, 협력해 처리한다. 즉 각 영역이 오케스트라 연주자처럼 ‘자아 교향곡’을 연주할 뿐이다

그래도 그땐 어디까지나 담론의 한 갈래였다. 지금은 더 근본적 차원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사변이 아니라 실험과 증거를 토대로 한 과학의 여러 연구 결과는 사람들의 기본 관념을 통째로 흔들고 있다. ‘자아’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자아를 찾고 있는 사람 모습

우린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얼굴 너머의 자신을 확인한다. 이런 자아 위에 누적되는 자신만의 체험과 기억을 더해 고유한 ‘나’가 유지된다. 하지만 오늘날 신경과학에 따르면 우리 뇌에 자아란 실체는 없다. 뇌는 모듈(module)의 조합처럼 시시각각 다양한 일을 분담, 협력해 처리한다. 각 영역이 오케스트라 연주자처럼 ‘자아 교향곡’을 연주할 뿐, 자아는 결국 뇌가 만들어내는 허구의 주인공이다.

(자아의 기반이라 할) 의식 자체에 대한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있다. 의식 역시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회로의 작동이다.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독특한 현상이란 점에서 다를 뿐이다. 물리적 입자에서 그런 게 생겨날 수 있는 이유마저 이른바 ‘창발(emergent)’ 현상으로 설명된다. 가령 같은 물 입자라도 딱딱한 고체와 축축한 액체, 가벼운 기체 등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다. 맥스 테그마크[5]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는 “물리 현상인 의식이 비물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파동이나 연산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행복에 만족 않고 한사코 ‘의미’ 찾는 이유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 기반이 약해지는 것과 별개로 인간의 물리적 능력은 가파르게 신의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을 길들인 인류는 이제 자신의 심신마저 맘대로 바꿔놓을 기세다

신(神)에 닿아있던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 기반이 모래성처럼 흘러내리는 와중에 인간의 물리적 능력은 가파르게 신의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사실 이 자체가 아이러니다. 자연을 길들인 인류는 이제 자신의 심신마저 맘대로 바꿔놓을 기세다.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과 무작위변이는 비자연적 선택과 작위적 변이로 바뀌었다.

신이 사람을 빚는 모습에서 사람이 나를 설계해가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애니메이션

멕시코 미래학자 겸 사업가 후안 엔리케즈(Juan Enríquez)는 ‘우리 자신을 진화시키기(Evolving Ourselves)’라는 대담한 책에서 ‘지적 설계론’을 이야기한다. 원래 지적 설계론은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절충해 내놓은 이론이었지만 이제 설계의 주체는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었다. 바야흐로 미래 운명이 점점 우리 손에 좌우되면서 정작 우리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 뭘 기대하고 바라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21세기 벽두에 제출됐던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Transhumanist Declaration)’은 인류의 전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1장[6]에서 “인류는 미래에 과학과 기술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예견하건대 여러 가지 인간의 상태를 재설계하는 일이 현실화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상태란 노화의 불가피성, 지적 능력에서의 제약들, 인간이 선택하지 않은 인간 정신의 특성, 고통, 지구란 행성에 갇혀 있는 제약 등을 포함한다”라고 한 데 이어, 7장[7]에선 “트랜스휴머니즘은 모든 지각력(sentience)을 갖는 존재-그것이 인공지능이건, 인간이건, 포스트휴먼이건, 동물이건 간에-의 웰빙을 옹호하며 근대 휴머니즘의 많은 원리를 아우른다”고 선언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우린 흐름을 거슬러 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떠밀려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은 죽을 때까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과학철학자 반 프라센[8]은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세기마다 우린 스스로가 누군지 재해석해야 한다. (중략) 지금까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안목을 갖고서 우리 자신이 누군지 해석해야 한다. 이건 영원하면서도 끝없이 새롭게 되돌아오는 과제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이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한사코 ‘의미’를 찾는 이유에 대해 “끝없이 변하는 삶 속에서 안정과 지속성을 찾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삶은 변화인데 여기엔 변화의 과정을 늦추거나 중지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따르며,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스콧 피츠제럴드[9]의 묘비명에도 새겨져 있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닮았다. “우린 흐름을 거슬러 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떠밀려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과학의 시대’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 해법은 ‘공감’

다정하게 서있는 4명의 사람

사실 고전 철학의 출발 지점도 다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지식이 ‘자신을 아는 것’이라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이 ‘나는 모른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일찌감치 인간 존재의 불확정성을 꿰뚫어본 셈이다. 우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묻고 답하면서 함께 자신을 만들어갈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지식이 '자신을 아는 것'이라 했지만,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실이 '나는 모른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일찌감치 인간 존재의 불확정성을 꿰뚫어본 셈이다

허망한가. 과학적 휴머니즘의 주창자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10]는 최근 펴낸 책 ‘지금, 계몽주의(Enlightenment Now)’에서 이렇게 답한다. “지혜를 향한 첫걸음은 ‘우주의 법칙은 당신을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렇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중략) 인간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신을 염려한다. 당신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는 뜻이 아니라-인간의 공감 능력이 수십 억 이방인에게까지 퍼질 정도로 강하진 않다-당신의 존재가 그들만큼이나 우주적으로 중요하고, 우리 모두는 우주의 법칙을 활용해 번영을 누릴 조건을 향상시킬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이 말을 난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의미로 이해했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Georg W. F. Hegel.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2] Peter A. D. Singer. 호주 출신 철학자. 미국 프린스턴대학 인간가치센터 석좌교수 겸 호주 멜버른대학 응용철학∙공공윤리학센터 명예교수. ‘생명윤리학’ ‘동물의 권리’ ‘효율적 이타주의자’ 등의 저서가 있다
[3] 難民. 전쟁이나 재난 따위를 당해 곤경에 빠진 백성
[4] Libido. 사람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성욕이나 성적 충동
[5] Max Tegmark. 스웨덴 출신 물리학자 겸 우주학자. 지난해 ‘라이프 3.0’(원제 ‘Life 3.0: Being Human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을 펴냈다
[6]원문(“Humanity stands to be profoundly affected by science and technology in the future. We envision the possibility of broadening human potential by overcoming aging, cognitive shortcomings, involuntary suffering, and our confinement to planet Earth”) 참조
[7] 원문(“We advocate the well-being of all sentience, including humans, non-human animals, and any future artificial intellects, modified life forms, or other intelligences to which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advance may give rise”) 참조
[8] Bas van Fraassen. 네덜란드계 미국 철학자.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9] F. Scott Fitzgerald(1896~1940). 미국 소설가
[10] Steven Pinker. 미국 심리학자 겸 대학(하버드대) 교수. 1998년과 200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by 전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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