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한국 엔지니어 지망생에게 건네는 두 가지 당부

2 주소복사

삼성전자 뉴스룸이 직접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덧 이 칼럼이 여섯 번째다. 해서 오늘은 과학자나 기술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길 몇 가지 묶어보려 한다.

#1. “대학 학벌이 얼마나 중요하냐”고 물어본다면

난 1993년 경남과학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서울과학고 수석에 간발의 차이로 뒤져 전국에선 2등이었다고 한다. 과학고 진학 후엔 매달 카이스트(KAIST) 입시 본고사와 같은 형식의 월례고사를 봤는데 졸업할 때까지 1등만 했다.

2학년을 마치면 내신 성적 순(順)으로 60명 중 20명가량은 무(無)시험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원서를 쓸 때 티오(TO)[1]가 몇 장이나 배정될지 몰라 커트라인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조마조마해했다. 난 당시 담임 교사에게 “무시험 전형에서 빠지겠다”고 말했다. “어려운 양보를 했다”며 감탄한 분도 계셨지만 몇몇 동기는 “잘난 척도 별 희한하게 한다”며 내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다(대학 입시가 걸린 일이라 아무도 대놓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 친구를 끔찍하게 생각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저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는’ 정도로 부담 없이 꺼낸 말이었을 뿐이다. 900점 만점에 평균이 500점쯤 나올 때 내 점수는 늘 750점이 넘었기 때문에 150점짜리 과목 하나쯤 건너뛰어도 넉넉히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시험 당일 아침, 동문 선배들이 출정식을 벌여주고 고사장 직전까지 따라온 학부모들이 일제히 기도하는 광경을 마주하니 그제서야 좀 긴장이 됐다. 오전 시험을 끝낸 후 ‘절대 떨어지진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후 시험 땐 긴장이 풀렸는지 깜빡 졸다 감독관이 깨워줘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고도 20등 안에 들어 당시로선 거금인 100만 원을 장학금으로 받았다. 그 일을 두고 주변에선 “돈에 눈이 멀어 무시험 원서를 안 썼다”는 얘기도 돌았던 것 같다.

입시에 관한 한 재수 없을 정도로 천재였지만 한편으로 난 스스로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되기엔 결정적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 역시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단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고사하고 호기심이 부족했다. 기계·전자 제품을 뜯어보고 싶단 생각조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유행했던 과학 상자니 만능 키트니 하는 것들도 매뉴얼 따라 하기에만 급급했다. 책에 없는 걸 시도해보려는 노력 따윈 없었다.

그때 이미 생각했던 것 같다, 입시 성적은 나보다 한참 떨어져도 그런 분야에 호기심 있던 친구들이 더 뛰어난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도 그랬다. 획일화된 입시로 채 스무 살도 안 된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좋은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될 자질과의 상관관계는 더더욱 ‘제로(0)’에 가깝다.

아주대에 부임해보니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바람에 더 좋은 학교에 못 가고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런 학생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줬다. “네가 재수해서 서울대나 연·고대(연세대·고려대)쯤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라. 그게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로 후회하지 말고 실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 사실이 그랬다. 라이선스 하나로 먹고 사는 분야에서나 학교 간판 평생 따지지, 엔지니어는 회사 들어가서 6개월만 지나면 어느 학교 출신인지 볼 필요가 없다. 그 정도 일 시켜보면 실력이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당신은 한국에서 나름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으니 그런 얘기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IBM 연구소에 막 취업했을 즈음 난 학벌 때문에 제법 주눅이 들어있었다. 당시 매니저는 예일대, 시니어 매니저는 하버드대, 디렉터는 버클리대 출신이었다. 팀 동료 넷은 각각 스탠포드대,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 Zurich), 캘리포니아공대(Caltech),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나왔다. 반면, 내 모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국내에서나 잘난 척하지 미국인 중에선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부서 차원에서 뭔가 중요할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그 쟁쟁한 학교 출신들이 전부 옆 팀에 근무하던 트로이(Troy)란 친구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반도체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려면 집적 회로(IC)와 패키징, 통신 아키텍처 등의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알고 보니 트로이는 세 분야의 역량을 두루 갖춘 실력자였다. 대학원에서 회로 설계를 공부한 그는 졸업 후 모토롤라에 입사해 통신 시스템을 연구했고, IBM에 와선 패키징 분야를 공부했다. 이후 전체 시스템 성능을 분석할 수 있는 인하우스(in-house) 도구를 혼자 만들었다. IBM 입장에서 절대 놓쳐선 안될 인물이었던 셈이다. 모르긴 해도 트로이의 연봉은 디렉터는 물론, 임원(VP)보다 높았을 것이다. 내가 IBM을 퇴사할 때 제일 아쉬웠던 점도 더 이상 트로이에게 배울 수 없단 사실이었다.

언젠가 트로이와 함께 쓴 논문의 출판이 결정돼 그의 이력(biography)을 요청한 적이 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그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은연중 ‘보나마나 톱스쿨(top school) 출신이겠지’ 생각했던 것도 같다(하지만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내온 이력을 논문에 써 넣던 난 깜짝 놀랐다. 트로이가 나온 대학이 미시간공대(Michigan Technological University)라는, 다소 생소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2.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영어 공부, 적정 수준은?

지난 8월 레니 문 연세대 국제학부 교수가 한 일간지에 칼럼(글로벌 언어로 자리 잡은 ‘엉터리 영어’)을 기고했다. ‘원어민에 근접한 발음을 구사하지 못하면 영어를 못한다고 여기는’ 한국인의 사고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저서 ‘글로벌 언어로서의 영어’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숫자는 원어민보다 비원어민이 3배 정도 많다고 한다. 즉,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사람보다 강한 액센트와 불완전한 문법의 ‘엉터리 영어(broken English)’를 사용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콩글리시, 중국에선 칭글리시, 프랑스에선 프랑그레라고 불리는 영어다. 약 15년 전 통계이니 그동안 진행된 글로벌화와 범세계적 인구 이동의 증가를 감안하면 2017년 현재 그 비율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1년, 뉴욕에서 4년간 직장 생활을 경험한 내 생각도 문 교수와 다르지 않다. 이미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상당수엔 인도·중국 출신 임직원이 많게는 절반 이상 근무한다. 그 밖의 국적 출신도 적지 않다. 한국인이 ‘미국 사람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이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은 표준 영어(norm)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한국 공립학교에서 문법과 독해 중심의 (전통적) 영어 교육을 받았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성문종합영어나 맨투맨영어 같은 교재로 공부했다. 이런 방식의 영어 교육은 한동안 숱하게 비판 받았다. “정작 외국인을 만나면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을 양산해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난 그게 과도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시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교사가 극히 적었단 사실과 교실 환경 등을 고려하면 문법·독해 중심 교육이 유일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내 경험상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를 다닐 때에도 독해와 문법 중심 교육은 꽤 쓸모 있었다. 쓰기나 말하기를 잘하는 비결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적절한 단어를 문법에 맞게 늘어놓으면 된다. 단어를 많이 알면 문장 만들기가 아주 쉬워진다.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모르니 이상한 표현을 만들어내게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는 것이다.

같은 값이면 발음까지 훌륭한 게 당연히 더 좋다. 하지만 그걸 위해 학생이나 학부모가 너무 많은 걸 희생할 필요까진 없단 게 내 생각이다. 나만 해도 영어 발음이 형편없다. 영어는 억양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내 영어는 완전히 모노톤(monotone)이다. 고교 영어 교사인 아내는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한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응용언어학 석사를 받고 뉴욕시립대(CUNY)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한 아내의 발음은 아주 유창하다.

그런데 중국·인도·프랑스·러시아 등 억양 강한 영어는 내가 아내보다 훨씬 잘 알아듣는다. 처음엔 회사에서 많이 접해본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진단은 달랐다. 내 영어 체계엔 억양이나 액센트 개념이 완전히 빠져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낯선 억양의 영어를 들어도 그걸 일단 모노톤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덕분에 별 차이를 못 느낀다, 는 게 아내의 분석이었다.

레니 문 교수는 앞서 소개한 칼럼에서 “한국인들은 콩글리시를 창피하게 여길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글로벌 언어를 쓰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배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대화에선 헤게모니(hegemony)가 아주 중요하다. 내가 미국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땐 정확하게 얘기해도 못 들은 척하지만, 그들이 내게 뭔가 아쉬운 게 있으면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는 표준 영어 발음을 익히려 노력하는 것보다 전공 실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 특히 과학기술자라면 표나 그래프를 보면서 얘기하는 상황이 잦은 만큼 “This shows that...(이 자료는 이러저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미국 회사에서 입사 면접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유창한 발음이 좋은 인상을 주는 데 효과적일 순 있겠지만 채용을 결정하는 건 결국 콘텐츠다.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개인적 소견이며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1] Table of Organization. 인원 편성

Samsung NewsRoom Magazine

구독 신청폼
SAMSUNG NEWSROOM
댓글

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주상훈 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2. 우왕굿 댓글:

    정말 공감되는 글인데요! 결국은 간판이 아닌 실력, 콘텐츠다!

인기 기사

삼성전자 뉴스룸이 직접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단, 워터마크 적용 사진은 제외)

Samsung NewsRoom Magazine

구독 신청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