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나는 소설 ‘속죄(Atonement)’가 무섭다

2015/07/14 by 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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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방법원 판사


 

문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속내 깊숙한 곳을 파헤쳐 보여주곤 한다.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 세상의 민낯은 전형적이지 않다. 작가들은 뻔하고 예측 가능한 것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불가해하며, 모순 덩어리인 인간 마음의 꿈틀거림을 묘사하는 데 몰두한다. 관찰의 재료는 주로 작가 자신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을 스쳐갔던 온갖 미묘한 감정과 충동들 말이다. 질투∙선망∙욕정∙열등감∙우월감∙증오∙살의…. 자신을 주어로 해 털어놓긴 어려운, 날것의 내면적 충동에 상상력을 더해 증폭하고 변형시키며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창조해낸다.

 

때론 실제 팩트보다 더 '팩트 같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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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은 문학 말고도 있다. 6하 원칙이 지배하는 신문 기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 방식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 치중한다. 반면, 내면의 동기는 돈∙욕정∙복수심 등으로 유형화해 쉽게 추정하곤 한다. 대중은 복잡한 사건을 쉽게 이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놈인지, 누구에게 분노하면 되는지 결론부터 알려주길 성마르게 재촉한다.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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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볼 때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 기사처럼 몇 마디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한 팩트(fact)의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 기사보다 ‘주관적 내면 고백 덩어리’인 것 같은 문학이 실제 인간들이 저지르는 일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잦다. 작가는 최소한 ‘나 자신’이란 실제 인간의 심층적 내면 세계를 관찰해 쓰기 때문이다(물론 좋은 작가의 작품에 해당하는 얘기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Ian R. McEwan)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좋은 작가다. 그의 2001년 작품 ‘속죄(Atonement)’는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 영화 ‘어톤먼트’(2007)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진실과 오해, 속죄, 문학의 본질 등 여러 실타래를 촘촘히 짜 넣은 작품이지만 직업병(?)은 어쩔 수 없어 나는 ‘재판의 오류 가능성’이란 측면에 주목하며 읽었다. (이제부턴 소설 내용이 상세히 나오니 스포일러가 달갑잖은 분이라면 주의하시길 바란다.)

 

그날 밤, 롤라를 겁탈한 남자는 누구였을까?

1930년대 중반의 영국, 어느 날 밤 저택 정원 풀밭에서 15세 소녀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 당한다. 유일한 목격자는 롤라의 사촌인 13세 소녀 ‘브리오니’. 브리오니가 나타나자, 강간범은 서둘러 도망쳤다. 브리오니는 롤라에게 다가가 범인이 누구였는지 묻지만 롤라는 망설이며 대답하지 못하다가 “손으로 눈이 가려져 있어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브리오니는 당시 주변이 어둡긴 했지만 가정부 아들 ‘로비’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주변 어른들과 출동한 경찰에게 자신이 강간 현장에서 로비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결국 로비는 체포돼 재판을 받고 투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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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과 경찰은 브리오니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브리오니와 로비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고, 거짓 증언을 할 만한 원한 관계도 없었다. 브리오니는 비록 어리지만 작가를 꿈꾸는, 관찰력 있고 똑똑한 소녀였다. 결정적으로 (매우 간접적이긴 하지만) 로비의 성향을 의심할 만한 증거도 제시했다. 로비가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 노골적이며 외설적인 성희롱 메시지로 가득한 편지는 어쩐지 수상했다. 심지어 둘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DNA 검사법이 개발되기 훨씬 전인 1930년대, ‘목격자 브리오니’의 진술은 로비의 범죄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였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브리오니가 말한 것과 달랐다. 롤라를 강간한 건 당시 저택에 손님으로 와 있던 청년사업가 ‘마셜’이었다. 게다가 마셜은 강간 이전에도 롤라에게 접근, 성적(性的) 행동을 시도했다. 당시 롤라의 팔에 상처가 났고 마셜 얼굴에도 할퀸 자국이 남았지만 롤라는 무슨 이유에선지 “동생들이 낸 상처”라고 둘러대며 마셜을 보호했다. 친척 집에 얹혀 지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우면서도 허영심이 많았던 롤라는 몇 년 후 마셜과 결혼한다. 마셜에게 당한 강간으로 충격을 받긴 했지만 큰 부자였던 마셜에게 품어온 호감 때문에 브리오니의 거짓 증언에 눈 감았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한편, 브리오니가 로비를 범인으로 단정한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실리아가 로비 앞에서 속옷 차림으로 분수대에 뛰어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게 시작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로비가 “언니에게 전해주라”며 건넨 편지를 몰래 뜯어봤을 때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노골적이고 뻔뻔하며 외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걸 보고 경악하기도 했다. 저녁 땐 서재 구석에서 언니를 덮치며 ‘공격’을 가하다 브리오니에게 들키자 황급히 그만두는 로비의 모습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아무런 악의 없이 타인의 삶을 파멸시키다

1930년대의 보수적 영국 사회를 살아가던 브리오니의 머릿속에 로비는 ‘위험한 변태성욕자’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상황에서 브리오니는 롤라가 강간 당하는 장면까지 목격했다. 로비와 마셜은 둘 다 키가 컸다. 브리오니가 실제로 목격한 건 ‘어둠 속에서 키 큰 남자가 일어나 도망가는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13세 소녀의 선입견’에 ‘예비 작가다운 상상력’이 뒤섞이는 순간, 도망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로비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실제 재판을 해보면 성인들조차 사실과 의견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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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오니는 단 하나, 어른들의 미묘한 성(性)과 연애 감정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사실 세실리아와 로비는 시쳇말로 ‘썸(some)’을 타는 중이었다. 서로의 육체에 끌리는 미묘한 성적 긴장감 속에서 ‘밀당’도 하고 충동적 실수도 하던 와중이었는데, 그 광경을 브리오니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도리 없는 브리오니는 아무런 악의 없이, 순진한 소녀의 눈으로, 언니를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맘에 젊은 연인들을 지옥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악인들이 계획적으로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선한 보통 사람이, 어떤 악의도 없이, 아니 오히려 정의감으로 용기 있게 나서서 무고한 타인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몰아넣기도 한다.

‘속죄’가 보여주는 인간 인식의 한계는 비단 브리오니에게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로비는 브리오니가 비뚤어진 짝사랑과 세실리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자신을 무고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브리오니가 로비에게 풋사랑을 고백하며 엉뚱한 짓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오니의 시점에서 서술된 부분을 보면 브리오니는 이미 그 감정을 잊은 지 오래다. 브리오니에게 당시 일은 ‘변덕스러운 소녀의 한때 감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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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비에겐 자신이 겪고 있는 부조리와 관련, 뭔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기억 한편에 묻혀 있던 해프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강간 사건의 진범을 자신만의 선입견에 기초해 단정 짓기에 이르렀다. ‘인텔리’인 자신과 달리 육체 노동에 종사하며 저택의 소녀들을 힐끔거리던 일꾼 ‘대니’가 범인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설명을 쉽게 실제 사실로 확신하곤 한다.)

 

'슬플 정도로 불완전한' 인간의 인식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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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판 사례를 연구한 책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김상준, 경인문화사)엔 사무엘 그로스(Samuel R. Gross) 미국 미시건대 로스쿨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2년 발표한 미국의 오판 사례에 관한 실증적 분석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성인 성폭력 사건에서 오판이 발생하는 최대 원인은 ‘목격자(피해자 포함)의 오인 지목’(81%)이다. 예를 들어 1985년 흑인 로날드 코튼(Ronald Cotton)이 백인 여성 제니퍼 톰슨(Jennifer Thompson)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당시 톰슨은 확신에 차 코튼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강간 당하는 순간에도 ‘나중에 꼭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강간범을 세밀하게 관찰한 덕택이었다. 그런데 1995년 DNA 검사 결과, 코튼 아닌 다른 흑인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이처럼 슬플 정도로 불완전하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재판제도는 상당 부분 그 불완전한 인간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속죄’는 법관에게 참 무서운 소설이다. 재판을 할 때마다 ‘나중에 속죄해야 할 일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진실을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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