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환경 속 ‘아날로그 인간’의 꺼지지 않는 기억을 보다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 드라마다. 잠시 복기해본다. 때는 그리 머지 않은 미래. 이유는 알 수 없다. 지구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사람들은 땅 밑에 산다. 밀폐된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삶은 뿌연 대기만큼이나 무미건조하다. 자욱한 미세먼지 탓에 다들 방독면에 판초를 쓰고서야 밖을 나선다. 계속된 가뭄에도 비는 오지 않고 인공강우 실험마저 실패를 거듭한다.
인간은 어디에 있어야 인간인가
어디나 온통 인공 환경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전자팔찌를 착용하고 신체지수를 확인한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스크린을 마주하고 말 없이 닥친 일을 처리할 뿐이다. 구내식당에서도 화면만 마주한 채 혼밥을 한다. 간헐적 대화 상대는 인공지능 로봇이거나 가상체다. 다들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사실은 체념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다. 주어진 체계에 순응하지 못하는 ‘오류’ 인간들이다. 첨단 환경에서도 이들은 지난 일을 떠올린다. 엄마의 기억, 아들과의 추억. 이들에게 현재의 무한 반복이란 살 만한 삶이 아니다. 길 위에서 죽더라도 그 길을 나서고야 만다. 물 속에 있어야 물고기라고? 인간은 어디에 있어야 인간인가.
엄마에게 듣기만 했던 고래 이야기가 왜 가슴을 뛰게 할까. 창 밖 녹색 풍경, 그 속의 나비마저 벽 TV의 가상체이지만 그 자유로운 날갯짓이 주는 신호는 정확히 살아있던 심장을 타격한다. 바다에 가고 싶어. 다녀오겠습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지상은 거북 등껍질마냥 갈라져 있다. 바다거북도 육지에서 바다로 돌아간 종(種)이던가. 붉은 흙먼지 속을 거북 걸음으로 나서보지만 역부족이다. 하지만 숨어있던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고, 운행을 멈춘 지 20년 된 지하철 전동차가 기적처럼 도착한다. 소풍?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사람들하고 막 김밥 싸 가지고 밖으로…”란 말에 절로 미소가 번지는 이유는 뭘까?
마침내 뿌연 기억 속 해안에 이른다. 출입금지 표지가 붙은 철조망도 그대로다. “고래 보고 싶었는데.” “멸종된 지 오래야.” “알아요.” 이번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사이렌과 함께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고, 병 속 AI 가상 금붕어는 어느새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로 변신, 수면 위를 박차고 오른다. 헷갈린다. 이 역시 디지털 사이버 유토피아일 뿐인가.
바다와 고래가 우릴 자극하는 이유
제목이 왜 ‘고래먼지’일까. 영어론 ‘Ambergris’라고 돼 있다. ‘용연향(龍涎香)’이란 뜻이다. 고래 창자에서 나오는 방향 물질이다. 고래에 관한 거의 모든 걸 담은 소설 ‘모비 딕’[1]에도 용연향이 한 장에 걸쳐 할애된다. 여기선 ‘지독한 부패 물질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없이 매혹적인 향기’라고 소개돼 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 오른 연꽃이라고나 할까.
두 해 전 북극 여행을 갔을 때 고래를 바다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북극해를 가로질러 그린란드 근해를 항해하는 일정이었다. 중간중간 고래가 출몰하는 것도 봤다. 한번 나타나면 주변에 하얀 물보라가 일면서 매끈한 검정색 등이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러다 꼬리를 보이며 깊이 자맥질하기도 했다. 올라올 때마다 내뿜는 숨(breath)은, 아이들의 그림에서 보곤 하는 분수 모양 물줄기는 아니었다. 그저 분무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물보라에 가까웠다. 그 추운 바다 속에서도 유영하는 모습이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부러웠다. 북극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늘고 있단 사실은 알고 있을지.
바다와 고래는 왜 이토록 우리를 자극하는가. 과학자들은 약 25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추측한다.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구는 구(球)형의 기체 덩어리였다. 식으면서 액화했고 용융 덩어리로 변했다. 그후 지각층은 몇 백만 년에 걸쳐 고체로 굳었고 지각이 식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세기 동안 계속된 비는 해양 분지로 흘러 들어 바다가 됐다. 바다에서 유기물이 생겨났고 구름층이 걷히면서 태양빛으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식물과 식물을 먹이로 하는 동물, 동물을 먹이로 하는 동물이 각각 등장했다.
동물 중 일부가 뭍으로 올라온 건 약 3억5000만 년 전이었다. 그래서 인간 몸엔 아직도 해양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혈관 속 나트륨·칼륨·칼슘 성분비가 바닷물과 비슷하고, 석회질로 된 우리의 골격 역시 칼슘이 풍부했던 캄브리아기 바다 유산이다. 또 인간은 저마다 어머니의 탯속 ‘작은 바다’에서 생을 시작한다. 배아 발생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도 아가미 생명체에서 육상 생명체로 진화해온 과정을 되풀이한다.
고래는 인간만큼이나 별종이다. 5000만 년 전쯤 육지 생활을 청산하고 바다로 돌아간 포유동물 중 일부의 후예다. 일찌감치 땅에서 물로 선회해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전략 덕에 살아 남은 종(種)이다. 그들의 선조는 뭍의 경쟁을 피해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바다로 향했다. 어떤 생각 끝의 선택이라기보다 내몰림, 이른바 ‘환경압’의 결과였을 것이다.
애당초 바닷속을 누비던 생명체가 뭍으로 나온 것 역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였을 것이다. 어쩌다 넘겨다본 수면 위, 땅 위 먹이가 좋아 보였던 걸까. 최근 접한 다른 가설의 설명도 흥미롭다. 바닷속은 시계(視界)가 어둡다. 고래를 비롯한 해양 동물의 청각이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내다본 물 밖 세상은 경이로웠을 것이다. 그 세상의 유혹에 못 이겨 힘겹고도 위험한 낮은 포복의 걸음마를 시작했을 수 있다. 그때부터 인간은 시각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눈이 주요 정보원으로 자리 잡았다. 언어를 얻은 후엔 급기야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 본다. 지금 그 시선은 어딜 향하는 걸까.
레이철 카슨[2]은 본래 해양동물학자였다. 그가 암으로 세상을 뜨기 두 해 전 펴낸 환경 보호의 고전 ‘침묵의 봄(Silent spring)’ 이전 책들도 바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품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배를 만들어 미지의 항해에 나서는 건 무의식적으로나마 제 혈통을 깨닫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아직도 마지막 홍적세 빙하기에 이은 간빙기 단계에 있다. 앞으로도 몇 천 년간 세계 기후는 상당히 따뜻해지고서야 다음 번 빙하기로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심상찮은 단기적 기후 변화다.
‘김밥 싸서 가는’ 소풍 같은 행복
지난 1일 인천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총회가 열렸다. 여기서 채택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를 보면 두렵다.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피해를 막으려면 지구 기온 상승을 1.5℃로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보고서 내용을 실현하려면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최소 45% 줄여야 한다. 전망은 밝지 않다.
이날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 미국 예일대 교수의 책 제목은 ‘기후 카지노(Climate casino)’다. 인간이 기후 변화를 놓고 아슬아슬한 도박을 벌인단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통계 자료를 들어 지구온난화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 영향이 인간 생활에 심각한 위협이 될 거란 사실을 분석해 보여준다.
카지노라고 하면 일확천금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러시안 룰렛 같은 것이다.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돌려가면서 방아쇠를 당겨 가는 꼴이다. 문제는 자칫 운이 없는 어느 한 명이 아니라 모두가 공멸할 수 있단 사실이다. 물론 지금 먼저 피해가 닥친 곳에서 보듯 약한 고리부터 신음소리가 커질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는 곳도 난민 사태와 궁극의 파국을 피할 순 없다.
‘고래먼지’에 나오는 스틸 도시락 속 김밥은 디지털 환경 속 아날로그 인간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김밥 싸서 함께 밖으로 놀러 가는 것. 우리의 행복이란 그런 소풍 같은 것 아닌가. 다가오는 디지털 미래의 가상 화면엔 과거 바다에서 떠밀려 온 것들이 현재의 해변을 어지럽히듯 현재의 부유물이 떠다닐 것이다. 비동시적인 것의 공존은 정도를 더해갈 테고, 대화는 기억의 연결고리가 닿는 사람끼리만 이어질 것이다. 그 속에서 고래먼지는 명멸하는 디지털 가상 화면이거나, 아날로그 인간의 꺼지지 않는 기억일 것이다.
모비 딕을 끝까지 쫓아간 에이해브 선장은 적도 태평양 해상에서 일전을 앞두고 절규한다. “고래를 추적하는 이 투쟁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왜 지치고 마비된 팔로 노를 젓고 작살을 잡고 창을 던지는가? 지금 에이해브는 얼마나 더 부유해지고 더 좋아졌는가?”
한때 유기체가 가득한 생명의 수프였던 바다는 이제 인간이 버린 핵폐기물과 플라스틱들로 죽음의 인공물 수프가 돼간다. 카슨은 ‘우리를 둘러싼 바다’ 개정판 서문을 이렇게 마쳤다. “처음 생명체를 탄생시킨 바다가 이제 그들 가운데 한 종(種)이 저지르는 활동 때문에 위협 받고 있다니 참으로 얄궂은 상황이다. 하지만 바다는 설령 나쁘게 변한다 해도 끝내 존속할 것이다. 정작 위험에 빠지는 쪽은 생명 그 자체다.” 1961년 글이다.
[1] 원제 ‘Moby Dick(白鯨)’. 미국 소설가 H.멜빌이 1851년 발표한 장편소설. 머리가 흰, 큰 고래 ‘모비 딕’ 때문에 한쪽 다리를 잃은 사내의 복수담이다
[2] Rachel Carson. 미국 해양생물학자. 합성살충제 오염 문제를 다룬 ‘침묵의 봄’으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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