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칼럼] 제4화. “내 영역에선 말뚝귀, 그 밖의 영역에선 팔랑귀가 되자”_서국정 마스터 편

201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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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뉴스룸이 제작한 기사와 사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마스터칼럼4편 "내 영역에선 말뚝귀, 그 밖의 영역에선 팔랑귀가 되자" 서국정 마스터(생활가전사업부 선행개발팀)

서국정 마스터

변하는 게 많은 요즘 세상에서 냉장고는 제게 참 매력적인 가전제품입니다. 그 안에서만큼은 집 앞 텃밭에서 따온 채소의 신선함도, 멸치조림에 담긴 엄마의 따뜻한 마음도 지킬 수 있으니까요.

물론 냉장고가 예의 그 매력을 유지하려면 일정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장 온도와 습도부터 일정하게 유지돼야 하죠. 전 삼성전자에서 25년간 일하며 ‘신선도 보존’이란 과제에 끊임없이 도전해왔습니다. 힘들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노(No)”입니다. 오늘 제 글은 아마도 그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제1장.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서국정 마스터▲서국정 마스터는 틈틈이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 신규 논문이 게재된 학술지를 찾아 읽는다. “옛 성공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틈틈이 공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 제게 “입사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다면 전 아마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매 순간”이라고 답할 겁니다. 여느 엔지니어가 그렇듯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땐 기쁘고 그게 아닐 땐 속상합니다.

제게 입사 직후는 유난히 희비가 교차했던 시기입니다. 1991년 삼성전자에 들어와 처음 배정된 조직은 ‘독립만세’ 냉장고 연구팀이었습니다. 독립만세 냉장고는 삼성전자가 1995년 3·1절을 맞아 출시한 제품이었는데요. 세계 최초로 냉장실과 냉동실에 별도 냉각기를 설치한 게 특징이었습니다.

제가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여러 선배가 독립만세 냉장고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후발주자였던 저 역시 1주일에 두세 번씩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선배들의 연구를 도왔습니다. 실험 결과가 특히 궁금한 날엔 누구 하나 강요하는 이 없어도 약속이나 한 듯 다들 ‘회사에서의 1박’을 감행했죠. 운이 좋았는지 독립만세 냉장고의 성공적 출시로 전 1995년 ‘자랑스런 삼성인상’의 전신인 삼성그룹기술상(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습니다.

냉장고 실험은 결과가 도출되기까지 유독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전기전자 분야 실험은 회로만 잘 설계하면 곧바로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냉장고는 기본적으로 (온도 차 이용이 필수인) 열에너지 시스템이거든요.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할 때도 안정적 운전점까지 도달하려면 최소 8시간이 소요되죠.

늦은 시각, 조용한 사무실에서 실험 결과 용지에 하나하나 찍히는 수치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실험 결과가 입력되면서 특정 패턴에 대한 예측도가 높아졌고, 그게 곧 다음 실험 설계에 도움이 됐습니다. 말 그대로 선순환이었죠.

성공이 늘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기존에 검토한 기술 경험은 추후 발전의 원동력이 돼야 하는데, 종종 엔지니어에게 ‘스스로 만든, 하지만 넘기 어려운 벽’으로 작용하기도 하거든요. 이전 실험과 똑같아 보이는 실험을 수행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값을 얻는 경우가 딱 그렇습니다. 원인을 침착하게 분석해보면 과거에 굳이 통제하지 않았던 변인, 이를테면 부품 소재의 물성(物性)이나 가공 정도 등이 미세하게 변하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경우일 때가 잦습니다. 과거 경험에 매몰된 엔지니어는 바로 그 부분을 놓칩니다. 결과를 예단하거나 쉽게 좌절하는 실수를 범하는 거죠.

엔지니어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어쩌면 과거의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 요즘도 학계에서 발표되는 각종 학술지를 찾아보며 제가 진행했던 실험 결과를 반추하곤 합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엔지니어가 항상 맘속에 간직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제2장. 긍정 정신이 낳은 기록들

후배들과 소통하는 서국정 마스터▲서국정 마스터는 사내에서 ‘격의 없이 토론하기 좋아하는 선배’로 통한다. 실제로 협업과 소통 능력은 그가 꼽는 연구자의 핵심 덕목이다

제가 회사에 몸담으며 개발에 관여한 냉장고 중엔 ‘세계 최초’ 수식어를 달고 있는 제품이 꽤 많습니다. 독립만세 냉장고가 기존 제품과 차별화된 비결은 처음으로 기기 한 대에 두 개의 냉각기를 장착한 데 있었습니다. 냉각기가 하나밖에 없었던 이전 냉장고에선 냉장실과 냉동실이 냉기를 함께 쓰다보니 냉장실 김치 냄새가 냉동실 얼음에 배는 경우도 허다했죠.

2002년 박사 학위를 따고 회사로 복귀한 직후엔 ‘지펠 콰트로’ 냉장고를 만들었습니다. 2005년 출시된 지펠 콰트로 냉장고는 기기 한 대당 냉각기 수를 4개까지 늘린 기술로 주목 받았습니다. 냉각기 수를 늘리면서도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데 성공한 게 주효했습니다. 지펠 콰트로 냉장고 개발 성과는 2006년 제게 생애 두 번째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선물했습니다. 이 제품은 그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 당시 국내 생활가전 제품 중 최초로 최고혁신상을 받기도 했죠.
 

냉장고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컴프레서(압축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서국정 마스터▲냉장고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컴프레서(압축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서국정 마스터. 그는 책상 위에 다양한 회사의 컴프레서를 올려놓고 수시로 살피며 공부한다

2014년 1월엔 대용량(1000L) 냉장고를 역시 세계 최초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제게 주어진 과제는 ‘기존 냉장고 외관은 그대로 둔 채 내부 공간만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냉장고 두께가 얇아지면 에너지 효율은 나빠지게 마련인데요. 이처럼 상충되는 두 가지 요구사항의 중간 지점을 찾아낸 공로로 전 그해 세 번째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긍정적 사고방식입니다. 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망설임 없이 “한 번 해보자”고 말하는 동료가 있으면 무척 의지가 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체득했습니다. 연차 낮은 후배가 낸 의견이라고, 옆 팀 사람이 낸 아이디어란 이유로 팔짱 끼고 의심부터 한다면 제가 개발한 냉장고는 단 한 대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또 하나, 남의 말은 경청하되 자신의 아이디어만큼은 과감히 꺼내놓고 소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시스템과 요소기술 전문가의 관계를 예로 들어볼까요? 요소기술 전문가는 시스템 전문가에 비해 특정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시스템 전문가는 각각의 요소기술을 100% 수준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노력해야 하죠. 그러려면 두 전문가의 끊임없는 소통은 필수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크고 작은 마찰을 견뎌낸 소통일수록 신뢰가 두터워진다고 믿습니다. 본인 기술에 애착이 있다면 다른 팀에도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호소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제3장. 잘 모를 땐 일단 ‘경청’을

서국정 마스터▲냉동공학 분야에선 내로라하는 연구 성과를 보유한 그이지만 요즘도 잘 모르는 인접 학문 관련 지식이 필요할 땐 기꺼이 ‘팔랑귀’가 돼 주변 사람들 얘길 경청한다

제가 냉장고에 빠진 건 대학 시절입니다. 졸업할 무렵 ‘냉동공학’ 수업에서 냉매 활용법을 배운 게 화근(?)이었죠. 평소 물리와 화학을 좋아했던 덕분에 강의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실험 결과가 제가 생각한 대로 나와주니 더욱 애착이 가더라고요. 곧장 관련 연구실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땄고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나름 공학 분야에서만 한 우물을 파온 저도 전기공학 분야엔 무척 취약합니다.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가전제품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다보니 가끔 전기공학적 지식이 필요할 때가 있죠. 비단 전기뿐 아닙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이 쏟아지는 요즘 세상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럴 땐 남의 얘길 경청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칼럼을 쓰겠다고 결심한 후 고심 끝에 만들어본 좌우명에도 그런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내 안의 영역에선 엄격하게 책임지는 말뚝귀, 내 밖의 영역에선 유연하게 도전하는 팔랑귀.’ 협업과 소통을 중시하는 제 연구 스타일을 요약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귀를 가장 크게 열어야 할 대상은 소비자입니다. 소비자의 불편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수용하려 노력하는 게 맞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소비자가 원하지 않으면 사장(死藏)될 수밖에 없거든요.

누가 냉장고 엔지니어 아니랄까 봐 저희 집엔 냉장고가 세 대나 있습니다. 결혼할 때 산 800L 냉장고에 제가 개발한 대용량 냉장고까지 더해지면서 집 한쪽 벽이 온통 냉장고로 채워졌죠. 요리 욕심 많은 아내 덕에 ‘냉장고는 개수와 무관하게 있는 대로 꽉꽉 찬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글을 마치며 냉장고의 본질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문득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냉장고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험 하나에 매달려 밤새고 뿌듯해 했던 열정도, 저와 함께 밤낮없이 양질의 기술을 고민하는 후배들의 치열한 고민도 제 맘 속 냉장고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내 안의 영역에서는 엄격하게 책임지는 말뚝귀, 내 밖의 영역에서는 유연하게 도전하는 팔랑귀

서국정 마스터는

부산 해운대에 살며 백사장으로 출퇴근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고 3 시절, 육군사관학교를 가려다 공대를 추천하는 형의 권유로 진로를 틀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냉동 분야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줄곧 냉장고 에너지 효율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딴 후 회사로 복귀, 2011년 12월 마스터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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