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운동, 웹보다 더 크게 확산될 것”
#1 “아이 옷, 손수 만들어 입혀요”
“어렸을 적 엄마는 브랜드를 중시했어요. 외할머니가 가끔 제게 수입 브랜드 아동복을 사주셨거든요. 그때마다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면서 목 뒤에 붙은 라벨을 제게 보여주며 교육시키던 기억이 생생해요. ‘이거 어린이 피** 가**이야. 엄청 비싼 명품이란다. 알았지?’ 하지만 전 어쩐지 그런 옷들이 입기 불편하고 잘 맞지도 않는 것 같았어요. 당시 제 친구 중 엄마가 옷감을 끊어 직접 만들어주는 옷을 입고 다니는 애가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부럽더라고요. 뭐랄까, 훨씬 더 정감 있고 특별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요? 엄마가 된 지금도 전 되도록 아이 옷을 직접 만듭니다. 요즘은 가정용 재봉틀이 워낙 잘 나오고 옷감이나 부자재, 옷본 같은 것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요. 재봉에 자신 없다 해도 문제 없습니다. 마무리(finishing) 작업만 전문으로 해주는 서비스도 있거든요. 뭣보다 아이가 엄청 좋아해요. 아이 옷 만들기, 요즘 제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임진화(37, 주부)
#2 “컴퓨터 디자인, 왜 전부 구리죠?”
“학창 시절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에 꽂혔었어요. 그때마다 늘 생각했죠. ‘왜 컴퓨터 모양은 늘 거기서 거기일까?’ 컴퓨터와 친해질수록 머릿속에 새로운 컴퓨터 디자인이 떠올랐어요. 형광 LED 튜브나 색감∙질감 좋은 플라스틱 판 같은 것 몰딩해 보기 예쁘고 음악도 나오고 시각적으로도 역동적인,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장난감 같은 컴퓨터 말이에요. 지금 전 서울 용산 근처에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해 컴퓨터 리퍼비싱(refurbishing)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사양에 재밌는 모양까지 갖춘 컴퓨터를 완성하면 그 자체로 정말 뿌듯하죠. 하지만 제 웹사이트에 올린 컴퓨터를 소재로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을 거쳐 컴퓨터가 새 주인을 찾아가면 너무 즐겁습니다. 물론 돈벌이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고요.”
박호원(34, 컴퓨터 조립 자영업자)
#3 “조카 신발 DIY로 선물해줬어요”
“조카에게 사주고 싶어 인터넷에서 예쁜 모양을 골라 주문했어요. 도착한 패키지를 열어보니 완성품이 아니라 재료가 들어있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했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어렵지 않을 거 같아 한 번 만들어봤죠. 그랬더니 언니가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조카의 첫 신발을 내 손으로 만들어줬다는 게 뿌듯했고 가격 대비 품질도 괜찮아 앞으로도 이런 제품을 자주 이용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김경민(32, 회사원)
최근 소비 문화 변화 양상이 예사롭지 않다. 유명 회사 제품일수록 선호하던 추세에서 탈피, 사용자 스스로 제조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제품이 점차 호평 받고 있는 것. 사실 이런 변화는 비단 국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일명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의 한 단면이다. 이때 메이커는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기성 제품으로 구입하는 대신 손수 만들어 쓴다. 경우에 따라선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3개 사례 속 등장인물이 전형적 메이커들이다. 그리고 (이미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전부 밀레니얼 세대에 속한다. ‘포스트 대량 생산기’로도 불리는 21세기, 왜 ‘내 손으로 물건 만드는 사람’들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는 걸까?
이미 어엿한 시장 형성… 5년 전 미국서만 1억3500만 명 활동
전통 사회에서 물건 만드는 일은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밀집한 마을에 집중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산업 사회에 들어선 이후 해당 작업은 사실상 전문 제조업장에 국한됐다. 그런 의미에서 메이커와 관련 플랫폼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현상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인터넷 덕분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각만 같으면 서로 연결되는 일이 쉬워지면서 인간 DNA 속 ‘공작 본능’이 다시금 구현되기 시작한 걸까?
메이커의 수(數)적 규모와 관련, 최근 통계를 찾으려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3년 미국 종합 일간지 USA투데이에 실린 반도체 제조 기업 아트멜(Atmel) 자체 조사 결과가 그것. 이 보도에 따르면 2013년 현재 미국을 무대로 활동 중인 메이커는 1억3500만여 명이다. 해당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 성인 수의 약 57%다. 물론 여기엔 자기 집 지하실에서 친구 몇몇과 머릴 맞대고 뭔가 뚝딱거리며 만들어내는 ‘비공식 메이커’가 누락돼 있다. 실제로 2016년 미국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 칼럼니스트 스티브 올렌스키(Steve Olenski)는 “올해 메이커 수는 (USA투데이에 보도됐던 3년 전보다) 훨씬 더 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메이커는 더 이상 옛날처럼 공방이나 공장 같은 ‘일정 장소’에 모이지 않는다. 그들이 적극 활용하는 건 단연 온라인 플랫폼. 물론 상당수 프로젝트는 온∙오프라인 복합 구조를 띠고 있으며, 이런 공간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로 통칭된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전 세계에 분포한 메이커스페이스는 1400개소에 이른다. 10년 전(2006)에 비해 10배 증가한 수치다.
(자료 출처: 미국 통계청)
메이커 운동의 규모와 함의를 짐작할 수 있는 얘긴 이 밖에도 꽤 많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메이커페어(Maker Faires)는 메이커가 손수 만든 아이템을 갖고 나와 오프라인 공간에서 교류하는 이벤트다. 2012년 이후 개최된 행사 수만 400여 개. 메이커 전문 미디어 ‘메이커’에 따르면 메이커페어는 “가족과 더불어 참여하기 좋은 이벤트”인 동시에 “발명∙창의성∙유용성, 그리고 메이커 운동 축하 페스티벌”이다
2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Bay Area)와 뉴욕에서 열린 플래그십 메이커페어의 총 참가자 수는 21만5000명. 그중 베이에어리어 행사는 44%, 뉴욕 행사는 61%가 해당 도시를 난생처음 방문한 사람이었다. 메이커페어에 ‘관광 수요를 촉진,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순기능이 있단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다
3
백악관도 2014년부터 매해 메이커페어를 개최한다. 행사 첫해 슬로건은 “오늘의 DIY는 내일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다!”였다. 메이커 운동의 경제적 잠재력이 함축된 표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아메리카회사(Corporate America)’란 개념도 등장했다. 혹자는 “미국인의 메이커 잠재력 전체가 회사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4
메이커를 지원하는 크라우드펀딩 규모는 2015년 50억 달러 선이었고, 2025년이면 930억 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만들기’가 곧 ‘놀이’인 인간…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 사이
메이커가 만드는 물건은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물건을 망라한다. 글 서두에 언급된 의류나 컴퓨터 같은 일상 용품은 기본. 로봇과 의료기기, 소프트웨어처럼 전문적 산업 지원 용품도 포함된다. 물론 메이커가 만드는 제품 중 평범한 건 드물다. “과연 메이커 작품!”이란 평가를 받으려면 콘셉트는 비록 간단해도 창의적 아이디어에 재미 요소가 더해져야 한다, 이제부터 소개할 제품들처럼.
‘도크포드(Dorkpod)’<아래 사진 참조>는 지난해 3월 미국 버지니아주(州) 레스턴(Reston)에서 열린 ‘노바 메이커페어’ 당시 사랑 받았던 제품이다. ‘늘 뭔가에 꽂혀 진지하게 탐구하지만 실생활에선 어딘가 부족하고 어수룩한 사람(dork)’과 ‘다리(pod)’를 뜻하는 영단어가 합쳐진 명칭처럼 겉보기엔 엉성해도 꽤 실용적인 1인용 탑승 장치다. 역시 버지니아주 샬롯츠빌(Charlottesville) 소재 메이커스페이스 팅커스미스(Tinkersmiths)가 (간단히 조립해 쓸 수 있는) 재료 상태로 제공한다.
(출처: 도크포드 공식 홈페이지)
‘윌그리드(Willgreed)’는 두 명의 메이커가 함께 운영하는 메이커스페이스로 ‘전기를 공급 받을 수 있는 원천 개발’에 집중한다. 이들은 2016년 호주 메이커페어 당시 화분 속 흙에 장치를 연결, 토양 박테리아가 내는 전기 에너지로 가동되는 휴대전화 충전기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아직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커넥티비티’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아이템이었다.
일본 디자인 팀 ‘파티(Party)’는 말 그대로 ‘일상을 파티처럼 즐겁게 보내자’는 의미로 메이킹 작업에 몰두한다. 2016년 이들이 도쿄 메이커페어에 출시한 아이템 중 ‘운전 모자’란 게 있다. 아빠가 아이를 목말 태울 때 쓰는 헬멧인데, 꼭대기엔 핸들 모양 플라스틱 장치가 달려있다. 이 모자를 쓰면 아빠 어깨에 올라탄 아이에게 안전한 손잡이가 생길 뿐 아니라 핸들을 돌려 아빠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도 있다.
초기 메이커는 개인적으로, 혹은 두세 명이 팀을 이뤄 활동했지만 최근엔 비교적 큰 정부나 회사 조직 내에서 마치 동호회처럼 활동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여가 시간에 빵을 구워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나눠주는 삼성전자 사내 제빵 동호회 ‘달콤빵’이 대표적 사례. 미국항공우주국(NASA) 임직원은 자원봉사 시간에 시민들을 초대해 실험실 내 간단한 소재를 활용, 로봇이나 비행접시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사람은 지적 수준의 차이로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지만 ‘두 손을 써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란 점에서도 확연히 앞선다. 유인원과 사람의 경계를 구분할 때 ‘호모 사피엔스(지적 인간)’와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가 종종 함께 쓰이는 건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행동은 ‘인간이 처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축적돼온 유전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인간을 동물과 구별할 때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란 개념도 쓰인다. 놀 줄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의 특성이란 얘기다. 사실 이제껏 학계에선 아는 것과 만드는 것, 노는 것 등 세 가지 특성이 ‘인간에게 공존하긴 해도 별개로 드러난다’고 간주돼왔다. 하지만 최근 IT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사이에선 “세 가지 특성이 통합적으로 구현되는 활동이 점차 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메이커 운동이 그 대표적 활동 유형인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알고 놀며 만드는 일. 그리고 이 모든 게 통합된 활동 패러다임으로서의 메이커 운동. 이처럼 전혀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가는 동력은 뭘까?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과 기업은 이런 현상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음 회차에선 이 질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보려 한다.
TAGS메이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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