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 추억을 선물한 사람들 ①천박미 전 이사와 ‘최초 컬러 TV’
대다수의 한국인이 흑백 TV를 시청하던 1976년 6월, 삼성전자는 자체 기술력으로 최초의 컬러 TV(모델명 ‘SW-C3761’)를 만들어 수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내에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건 4년이 흐른 1980년이었죠. 그리고 지난해 7월, 이 귀중한 물건이 S/I/M에 도착했습니다. 기증자는 다름아닌 ‘국산 최초 컬러 TV’ 개발의 주역 천박미 삼성전자 전 이사였습니다.
사무실서 쪽잠 가며 개발… 파나마∙미국 등 수출 ‘개가’
국립과학연구소에서 개발자로 근무하던 천 전 이사는 1975년, ‘컬러 TV 개발’의 임무를 부여 받고 삼성전자(당시 전자설계실)에 입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TV 시장의 ‘대세’는 흑백 TV였는데요. 하지만 국산 기술로 흑백 TV를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생산 기술은 물론, 주요 부품까지 전부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심 끝에 삼성전자는 국내 자본과 기술력으로 컬러 TV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발상의 전환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천박미<위 사진> 전 이사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 보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며 “늦은 밤까지 책을 붙잡고 연구에 몰두하다 아예 집에 있던 이불을 연구실로 갖고 와 잠을 청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천박미 전 이사가 기증한 삼성전자 최초 컬러 TV(모델명 ‘SW-C3761’)
천 전 이사를 비롯한 개발팀 전원이 부단히 노력한 끝에 1976년, 마침내 국내 첫 14형 컬러 TV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갔던 흑백 TV와 달리 SW-C3761 모델은 삼성전자의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컬러 방송이 시작되기 전 파나마∙미국∙일본 등과 수출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며 국익 창출에도 기여했습니다. ‘삼성전자’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해외에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죠. 이후 국내에서도 컬러 방송 시대가 열리며 판매량은 고공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SW-C3761 모델 개발 당시 천박미 전 이사의 모습(사진 가운데)
당시 우리나라는 집집마다 100볼트와 220볼트 전압이 혼재돼 있었던 데다 전력 사정도 좋지 않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전기를 많이 쓰는 저녁엔 전압을 떨어뜨리고 전기를 덜 쓰는 한밤중엔 전압을 올리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천 전 이사는 “서로 다른 전압의 콘센트를 꽂는 바람에 제품이 고장 날 때가 잦았는데 SW-C3761 모델은 수입 제품과 달리 한국의 특수 상황을 고려해 개발된 덕에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찔한 시행착오도 이젠 모두 추억… “잘 간직해주세요”
시장 데뷔는 성공적이었지만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천 전 이사에 따르면 가장 큰 위기는 첫 수출 직후 찾아왔습니다. “수출 국가 중 한 곳이었던 파나마에 도착한 TV가 위아래 화면이 뒤바뀐 채 송출되는 거예요. 브라운관 TV의 경우 전자계 편향으로 화면이 나타나는데, 당시만 해도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계 방향이 달라진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죠. 우리나라는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었고 파나마는 남반구 국가였으니 화면이 뒤바뀔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결국 천 전 이사는 제품을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대신 현지에서 기기를 하나하나 뜯어 고쳐 판매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 ‘모든 제품은 수출국 환경에 맞춰 제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전혀 쓸모없는 경험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팀원들과 함께한 천박미 전 이사(사진 윗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오른쪽에 세워진 제품은 삼성전자가 만든 19형 컬러 TV입니다
삼성전자가 최초 컬러 TV를 선보인 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신입사원은 어느덧 회사를 떠났고, 전 세계에 ‘컬러 영상 시대’를 열었던 컬러 TV는 낡은 골동품이 됐죠. 취재진이 찾아간 천 전 이사의 집 거실, 컬러 TV가 놓였던 자리는 손주들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기념이라 갖고 있었는데 ‘버리는 게 좋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젊은 날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담긴 녀석이라 차마 버릴 순 없더군요. 고심 끝에 S/I/M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누구든 이 물건을 보는 사람이 절 비롯한 당시 개발자들의 열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창고에 보관 중이던 또 다른 컬러 TV 제품과 함께 포즈를 취한 천박미 전 이사
하얗게 센 그의 머리칼만큼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최초 컬러 TV 개발에 쏟던 의지와 열정만큼은 그의 기증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누구보다 꼼꼼하고 섬세한 손길로 완성된 천 전 이사의 첫 컬러 TV가 S/I/M에서 다시 한 번 의미 있는 행보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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