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전직 임원 4부작 릴레이 인터뷰 ‘힘내라, 삼성전자’!_① 이지섭 전(前) 삼성전자 부사장

2014/09/24 by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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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시작하며

삼성전자에는 ‘전자사랑모임(e-CLUB)’이라는 퇴직 임원 중심 커뮤니티가 있다. 삼성전자는 학연·지연 등 특정 계파 중심의 분파 활동을 사내 법규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지만, 전자사랑모임은 예외다. 1999년 결성된 이 모임에는 670여 명의 퇴직 임원이 활동 중이고 점점 활성화되고 있다.

친목 모임을 표방한 이 커뮤니티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모임의 회원 한 명 한 명에게는 1969년 창립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우뚝 서기까지 45년간의 삼성전자 성공 드라마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전자를 있게 한 요체는 무엇이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보완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전자사랑모임 멤버 4인이 말하는 삼성전자의 과거와 미래를 오늘부터 4주에 걸쳐 연재한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한 민자연사연구소 입구. 그가 30여 년간 수집한 희귀 광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한 민자연사연구소 입구. 그가 30여 년간 수집한 희귀 광물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36년간 근무한 ‘뼛속까지 삼성맨’
이제까지의 성공은 잊어라… 소비자 감성 읽는 ‘감성경영’이 숙제”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무려 36년간 삼성맨으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974년 삼성그룹 공채 14기로 입사해 2010년 63세의 나이로 퇴직했다. 초기 5년 제일모직 근무 기간을 빼고 1979년부터 31년간 삼성전자에서 일했다. 삼성전자의 발전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산증인이라 할 만하다.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 입사해 전자레인지를 처음으로 생산하고,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제품을 만들던 이름 없는 회사가 당당히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존폐 기로에 있던 컴퓨터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부활하게 된 결정적 순간마다 그는 한가운데에 있었다.

 

삼성전자 45년 역사 중 31년간 근무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는 ‘민자연사연구소’에서 이 전 부사장을 만났다. 퇴직 후 오랜만의 인터뷰라는 그에게서는 설렘과 열정이 전해졌다. 인터뷰 전, 여러 차례 관련 자료를 보내고 끝난 후에도 추가 자료를 보내는 과정을 통해 철두철미함을 엿볼 수 있었다. 30여 년간 삼성전자 제조 현장 지휘자로서 몸에 밴 방식이었다.

민자연사연구소는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온갖 희귀 광물과 화석들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30여 년 전부터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한 점 두 점 수집한 광물이 3000점에 이르는데, 그중 1000여 점을 전시했다. 연구소 명칭은 둘째 아들 이름 ‘민(玟·옥돌)’ 자와 광물을 뜻하는 ‘미네랄(mineral)’에서 따 왔다.

고만고만한 개인박물관을 상상한 사람들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규모와 수준에 입이 떡 벌어진다. 평범한 광물은 없다. 쉽사리 만나기 힘든 희귀 광물만 엄선했다. 노랑, 빨강, 초록, 파랑의 형형색색 광물 결정체들은 자연 그대로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다. 지질박물관 등에서 본 광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너비 3m, 높이 2m에 이르는 고생대의 해백합(海百合) 화석이며 모양이 완벽하게 보존된 게·거북이·공룡알 화석 등 사진으로조차 만나기 힘든 실물 화석들도 있다. 그의 수집 광물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전 세계 희귀 광물 수집가가 모이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200여 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다. 얼마 전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디자인, 자연에서 답을 찾다’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광물들과 이지섭 전 부사장. 이곳에 전시된 희귀 광물은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유일한 동양인 회원이다▲ 이곳에 전시된 희귀 광물은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이다. 그는 ‘미네랄 컬렉터 심포지엄’의 유일한 동양인 회원이다

“1980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희귀광물을 보고 반해버렸습니다. 금속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광물에 대한 지식이 많은 편이었지만 차원이 달랐습니다.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더군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 둘 수집을 시작했고, 퇴직 후 서서히 박물관을 준비해서 얼마 전 오픈했습니다. 이곳은 중간 과정입니다. 용도에 대해서 구상 중입니다. 개인박물관을 차리라는 분이 많지만 정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광물들이 기초과학 연구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혹은 관련 재단을 가진 큰 기업과 손을 맞잡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전 부사장은 퇴직 후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호서대학교에서 7학기째 정규 과목을 맡았다. 삼성전자 재직 당시 경험을 살려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강의하고, 경우에 따라서 취업 상담도 해준다.

 

‘수성’이 아니라 ‘리셋’이 필요한 시점

최근 예년에 못 미치는 삼성전자의 실적을 두고 우려의 시선이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위기설을 운운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지섭 전 부사장은 “위기는 있기 마련이며 삼성전자는 그때마다 잘 헤쳐나갔다”며 “이번 역시 낙관적으로 본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게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를 수성하기 위해 더 힘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수성(守成)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는다”며 이렇게 답했다.

“삼성전자가 이룬 성과는 대단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수성이 아니라 ‘리셋(reset)’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은 잊어야 합니다. 성공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였지만 후배들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입니다. 우리보다 후배들이 더 힘들 겁니다. 선두주자를 빨리 따라가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선두주자가 더 힘들죠.”

‘감성경영’. 그가 삼성전자를 향해 던진 애정 어린 조언의 요체다. 그는 감성경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긴 논리를 폈다. 감성경영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경영철학이 바로 ‘합리주의’다. 합리주의는 꼭 필요하지만, 이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는 ‘감성’이라는 것이다.

고생대 화석 해백합 앞에서 이지섭 전 부사장의 모습.▲ 고생대 화석 해백합 앞에서. 너비 3m, 높이 2m에 이르며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

 

삼성맨은 ‘너무 합리적’인 게 단점

“‘합리주의’는 ‘사업보국’ ‘인재제일’과 더불어 삼성그룹의 창업이념 중 하나입니다. 이 세 가지에 삼성의 철학이 응축돼 있습니다. 사업보국은 국가와 인류의 차원입니다. 삼성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틀 자체가 크고 숭고하면 이루려는 열망이 강하고 성공 확률도 높습니다. 인재제일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합리주의는 정도를 지키면서 무리하지 않는 철학으로, 문제 해결의 나침반 역할을 했습니다.

퍼스트 무버에게 필요한 자질은 탐험가 정신과 창의성인데, 이 두 가지는 삼성의 DNA에 이미 녹아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필요한 가치는 ‘감성’입니다. 세계의 부(富)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부유해질수록 본질적 가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 즉 감성이지요. 소비자의 감성을 읽지 못하면 앞으로 어려워질 겁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삼성의 창업이념의 하나인 합리주의 말인데요, 물론 필요하지만 너무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만 찾다 보면 감성을 놓치기 쉽습니다. 사실 삼성에 있는 분들은 그게 어렵습니다. 감성경영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지가 삼성전자의 숙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멜트 GE 회장의 감사패와 편지

이지섭 전 부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품질관리의 달인’이었다. 삼성전자 재직 당시 전자레인지, 컴퓨터, LCD 등 여러 사업부를 두루 거치면서 품질 관리와 생산 효율성 향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 사례를 남겼다. 이 성공들은 삼성전자의 비약적 발전의 토대가 됐다. 2010년 퇴직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 후배들에게 ‘품질로 승부하자’는 책자를 남겼다. 누가 시키거나 권유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쓴 것이다. 8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품질을 강조했다. 불량품이 생겼을 때 피드백 하는 방법, 품질관리의 사각지대 등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책자에 있는 몇 문장만 보자.

“전 조직이 명품을 만든다는 확고한 조직 철학이 있어야 한다”

“제조업의 핵심은 낭비 없이 양품(良品) 만들기”

“숙련자와 미숙련자의 차이는 질의 차이가 아니라 속도의 차이여야 한다”

“열심히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라”

 

하나를 만들어도 오차 없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각오, 그 각오를 전 사원이 공유하는 것. 그것이 그가 품질관리 담당으로서 강조한 제조업의 정신이었다. 이 철학은 실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천안 IT센터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TFT(Thin Film Transistor) LCD는 거래업체인 도시바가 실시한 검사에서 불량률 0.01%를 기록했다. 일반적인 불량률이 1%인 점을 감안하면 기적에 가까운 수준이다.

지난 1991년 삼성전자 전자레인지를 납품 받은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은 전자레인지사업부에서 컴퓨터사업 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이 전 부사장에게 “성공을 빈다”는 메시지가 담긴 카드와 함께 직접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멜트 회장은 또한 박경팔 당시 삼성전자 사장에게 “나는 특히 이지섭 부장의 뛰어난 업적에 깊이 감명받았다. 1983년 처음 만난 후부터 그는 품질관리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지구본에 불을 비추고 있는 이지섭 전 부사장.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에 입사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성공 드라마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흑백 TV를 만들던 시절에 입사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성공 드라마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미국·일본에 이어 전자레인지 만드는 나라”

그는 품질관리의 기본을 제일모직에서 배웠다. “제일모직에서 받은 품질관리 교육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삼성은 1970년대부터 사원교육을 잘 시켰죠. 덕분에 생산관리, 품질, 신뢰 등에 대한 개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또 하나, 주란 박사(Dr. Joseph M Juran)의 책을 밤마다 읽었습니다. ‘품질관리의 바이블’ 같은 책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원서입니다.”

1979년 삼성전자로 옮긴 그는 제품의 원리 하나하나를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일본 제품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이름 없는 작은 회사였다. 내수용 제품이 대부분이었고 수출용이라고 해도 대부분 중동·아프리카 등 틈새시장이 그 대상이었다.

그가 꼽는 삼성전자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발 빠른 시장 진입’이다. 세계 시장의 흐름을 재빨리 읽고 주저 없이 뛰어든 것. 이를 빼고 삼성전자의 성공을 논할 수 없다. “최고 경영자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환경 변화가 있을 때마다 적절한 리더십이 과감하게 개입돼야 하죠.”

전자레인지를 만들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후반,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를 만들 역량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과감히 제품 생산에 도전해 성공했다. 이는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신호탄이 됐다. 몇 년 후 대한민국은 해외에 “미국·일본에 이어 전자레인지 만드는 나라”로 소개됐다. 이 전 부사장은 당시 전자레인지 제조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979년 당시 저는 과장이었습니다. 전자레인지 제조를 위해 신입사원을 뽑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타사 제품을 해체해가면서 전자레인지의 원리를 파악했습니다. 처음부터 품질관리를 엄격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오차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미국 제이시페니(JCPenny)에서 5000대를 수주하게 됐는데, 미국에서 실시한 오차 측정 계측기 바늘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측기 오작동을 의심할 정도였죠.”

삼성전자가 생산한 제이시페니 전자레인지는 “품질 좋고 저렴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 모델이 10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제이시페니 역사상 드문 히트작이 됐다. 이후 GE 등 세계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삼성전자에 손을 내밀었다. 삼성전자 전자레인지의 성공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1989년 1월호)에도 실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OEM 브랜드로서였다. 전 세계 전자레인지 공급량의 20%를 생산해냈지만, ‘삼성전자’ 브랜드를 내건 제품이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컴퓨터 사업, 존폐 기로에서 회생하다

컴퓨터사업부·LCD사업부에 재직할 때에도 그는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그가 “위기는 늘 있기 마련”이라고 여유 있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 컴퓨터 사업이 존폐 기로에 놓인 1992년부터 1993년 사이 그는 제조라인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생산성을 3배 높임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1998년 LCD사업부 제조 책임자로 근무할 당시에는 80%에 달하는 제조원가를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려 대형 패널 제조능력 업계 1위로 뛰어오르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제조업의 위기는 업계 공통의 위기다. 1990년대 초반에는 컴퓨터 업계 전반이 위기였다. 대만 등에 밀려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제조회사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값싼 STN(Super Twisted Nematic)에 밀려 TFT LCD 업계 전체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위기 때마다 삼성전자는 이를 극복했음은 물론, 오히려 더 큰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 비결이 뭘까.

이 전 부사장은 ‘구성원 간 비전 공유’를 그 주요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위기 때마다 그는 관련자들과 머리를 맞댄 발상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해결 방법을 찾아 나갔다. 뻔한 회의가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 발상의 전환을 거듭하는 회의를 했다. “당연한 말 같지만 ‘한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무조건 하라’가 아니라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재경영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동기 부여’와 ‘역량의 극대화’입니다. 박사라고 다 일 잘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할 때 역량이 극대화됩니다.”

그가 온양 반도체 공장장으로 재직할 당시 ‘설비 유지관리’를 뜻하는 ‘메인터넌스(maintenance)’ 부서의 명칭을 ‘생산기술’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고졸 출신 엔지니어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포상할 사례가 생기면 현장으로 달려가 직원들에게 직접 혁신 사례를 듣고 토론한 후 두둑한 현금을 건넸다. 이는 직원들이 신나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인터뷰 중인 이지섭 전 부사장.  36년간 삼성맨으로 지낸 그는 “어딜 가나 삼성만 보인다”고 했다. 그에게 삼성전자란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36년간 삼성맨으로 지낸 그는 “어딜 가나 삼성만 보인다”고 했다. 그에게 삼성전자란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지나친 찬사도, 지나친 질책도 독(毒)

대학 졸업 직후부터 36년간 삼성맨으로 살아온 이지섭 전 부사장. 그에게 “당신에게 삼성전자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열정”이란 짧은 답이 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삼성’이란 두 글자만 보인다는 것. 이러한 주인의식과 애사심을 가진 사원 한 명 한 명이 삼성전자의 주춧돌이 됐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대단합니다. 잘될 때는 엄청나게 칭찬하지만, 이익이 조금이라도 줄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처럼 염려하죠.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위기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삼성전자는 이겨나갈 겁니다. 조직도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찬사도, 지나친 질책도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심 어린 응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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