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특집 5부작 인터뷰 ‘나와 디지털’_② 이문웅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2014/12/10 by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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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은 영상 6500개 디지털로 변환, 전국 대학 인류학과에 ‘조건 없는 기증’
“내게 디지털은 지식 공유의 신세계”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반사적 관심을 보이며 남보다 먼저 구매해 쓰는 사람이 얼리어답터라면 이문웅(73)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얼리어답터가 아니다. “전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 애 쓰는 편은 아닙니다. 그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해가다보면 어느 단계에서 우연히 좋은 방법을 알게 되거나 적절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생겼을 뿐이죠.”

두 대의 모니터를 뒤로 하고 앉아 있는 이문웅 명예교수의 모습입니다.▲안국동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문웅 명예교수. 그는 영상 편집 작업을 편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두 대의 모니터를 사용하고 있다

 

1977년, 애플 복제품으로 PC에 눈 뜨다

그의 말과 달리 이 명예교수의 학문적 궤적에서 디지털기기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한 1977년, 그는 난생처음 개인 컴퓨터를 장만했다. 서울 청계천시장에서 산 애플Ⅱ 복제품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제품이 나오면 청계천시장에 복제품이 쫙 깔리던 시절이었다. 단순히 원고 타이핑 용도로 구입한 제품이 그의 디지털 라이프 첫머리를 장식한 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진 초창기 한글 소프트웨어인 ‘세종한글’ ‘아래한글’ 등을 사용했다. “그땐 청계천시장에 설명서도 없이 딱 한글 소프트웨어만 나왔었습니다. 거기에 ‘오류가 발생하면 개발진에게 연락해 달라’며 전화번호가 같이 적혀 있었어요. 한국인들이 또 문제가 있으면 가만히 참고 있지 않잖아요. 쓰다가 뭐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당장 개발자 이찬진씨한테 전화해서 알려주곤 했죠. 그런 즉각적 사용자 피드백 덕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이 명예교수는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 급속도로 디지털화(化)된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고스란히 지켜봐 온 학자다. 그런 그가 꼽는 정보통신기술 발전의 원동력은 ‘댓글 달기’ 등 즉각적 사용자 반응. “수많은 사용자가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교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문화·기술 발전이 촉진돼 왔다”는 지적이다. “개개인의 의견이 거침없이 개진되는 사회에선 문화의 흐름, 또는 다양한 요소 간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조합과 종합이 더 잘 이뤄집니다. 그게 발전적 항목인 경우, 우린 ‘혁신(innovation)’이라고 부르죠.”

그에게 디지털 세상은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시작됐다. 2006년 정년퇴임하기 전까지 교수로 재직했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서 연구실 내 개인용 컴퓨터를 들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전 어느 순간 딱 디지털 세상을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거나 한 기억은 없습니다. 원고지에 글을 쓰다 타이핑을 하니 좀 더 편하더군요. 편지로 보내던 메시지를 이메일로 대체하니 훨씬 편리했고요. 비디오테이프에 모으던 영상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니 물리적 부피가 줄어드는 건 물론, 전송도 훨씬 편리해졌어요. 디지털카메라는 필름카메라보다 사용이 편리할 뿐 아니라 화질도 뒤지지 않죠. 매번 제게 더 편리한 걸 쓰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연구 인생의 ‘동반자’ 된 디지털 기기

지난 12월 2일 삼성투모로우가 이문웅 명예교수의 연구실(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을 찾았을 때, 그는 현지 조사에서 촬영해 온 영상을 본인의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하고 있었다. 영상 작업에 최적화된 그의 컴퓨터 책상 위엔 태블릿PC 한 대, 스마트폰 두 개, 보이스레코더, 외장형 하드디스크(이하 ‘외장하드’), 노트북 등 디지털 기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장비는 오로지 ‘연구용’이다. 실제로 이 명예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지털기기를 철저하게 ‘학문적 도구’로 사용해 오고 있다.

이문웅 명예교수가 평소 사용하는 핸디캠으로 촬영하는 모습입니다.▲이문웅 명예교수가 ‘현지 조사 시 영상 촬영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핸디캠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인류학의 본질은 타인(others)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 우리(we)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이가 사는 모습을 다양하게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겨 좀 더 많은 이에게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죠.”

1988년, 이 명예교수는 생애 최초로 VHS 비디오카메라를 마련했다. 이후 거의 모든 현지 조사 시 영상 촬영을 병행했고, 그렇게 축적한 자료를 차곡차곡 보관해 왔다. 처음엔 비디오테이프를 썼지만 디스켓·CD·외장하드 등을 거쳐 지금은 유튜브 계정에 올려둔다. 그는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전공 관련 영상 자료 하나 만들려면 천문학적 예산이 들었다”며 “요즘은 연구자가 맘대로 찍고 편집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된 거냐”고 말했다.

 

서울대 최초 ‘영상인류학 강좌’ 개설

이문웅 명예교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줄곧 자신이 공유하고 싶은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 편집하는 방식으로 인류학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일명 ‘영상인류학’적 접근법이다. 당시는 (인류학 분야 선진국인) 미국에서조차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영상인류학이 상용화되지 않던 시기였다. “교수는 전공 관련 유망 분야가 떠오를 때 비록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 해도 최선을 다해 연구, 학생들이 그 분야를 스스로 개척하도록 유도하고 안내하는 사람”이란 그의 학자적 소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명예교수가 서울대 최초로 개설한 영상인류학은 2006년 그가 퇴임할 때까지 매년 직접 강의해 왔으며, 이후 김홍준 영화감독이 물려받아 이끌고 있다. 강의는 두세 명의 수강생이 팀을 이뤄 각각 15분 내외의 영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재는 대부분 학교를 포함, 사회 저변에서 취한다. 각각의 작품이 곧 대한민국 현대사의 단면인 셈이다.

제자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는 이 명예교수가 2001년 구축, 운영 중인 영상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업로드됐다. 지난해 7월부턴 아카이브 내 클립을 본인의 유튜브 계정 가운데 한 곳인 ‘VA아카이브’에도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생생한 영상을 바로 열어볼 수 있게 됐어요. 1993년 이후 모인 작품 수가 180편을 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채널엔 학생들의 작품이 계속 쌓이겠죠. 그 자체로도 하나의 거대한 현대사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학계에 ‘영상인류학’ 개념을 심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제 모험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문웅 명예교수가 웃고 있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는 퇴임한 후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현지 조사를 진행하며 관련 영상물을 수집, 보관해 오고 있다. 요즘은 거기에 다소 엉뚱해 보이는 관심사가 하나 늘었다. 다름 아닌 ‘자연 재배’다.

“이제껏 전 인류 문명의 긍정적 측면만 바라보고 살아 온 편이에요. ‘문명=참 좋은 것’이란 생각을 늘 했죠. 그런데 나이 들면서 가만히 보니 뭐든 인간의 손이 닿기만 하면 망가지는 거예요. 식물, 바닷물, 공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가고요. 문명에도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4년 전, 그는 유기농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일명 ‘자연농법’에 주목했다. 자연농법이란 화학 비료는 물론, 퇴비도 일절 투입하지 않는 농사법.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는 건 기본이고 쟁기질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농작물을 수확한다. “자연농법이야말로 인류의 건강을 담보할 수 있는 으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줄곧 국내외 자연농업 현장을 탐사하며 제가 관찰, 수집한 정보를 영상과 글로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과 SNS 채널 등을 활용, 직접 방문해 촬영한 국내외 자연재배 농장의 풍경을 보다 많은 이와 공유하고 있다. 해당 페이지의 방문자 수는 15만 명이 넘는다.

 

“평생 쌓은 지식 나누는 게 내 마지막 소명”

디지털 세상은 메모리 걱정 없이 지식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양질의 콘텐츠를 손쉽게 만들고 맘껏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지식 공유’라는 이 명예교수의 소명이 예전보다 한결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 역시 그 덕분이다.

이문웅 명예교수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이문웅 명예교수가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VA아카이브를 포함, 총 5개의 유튜브 계정을 운영 중이다

그는 최근까지 VHS, 6mm 테이프 등의 형태로 보유하고 있던 영상물의 디지털화 작업을 손수 해 왔다. 그 결과, 서울대 재직 당시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수집한 약 6500편의 영상 자료가 모두 디지털 파일로 전환됐다. 비디오테이프로 치면 집채만큼 쌓였을 분량이지만 정보 저장 기술의 발달로 이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드디스크 하나에 담길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자료들을 “인류학 교육 활성화에 써 달라”며 전국 대학 인류학과에 한 세트씩 기증했다.

퇴임 후엔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갖고 있던 서적을 전부 기증했다. 당시 한국학연구원을 개설했지만 한국 관련 자료가 전혀 없던 대학 측 기증 요청에 흔쾌히 응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턴 해외 소재 한국학 연구센터와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이 명예교수의 수집 자료를 요청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지난해엔 한 재단에서 외장하드를 지원 받아 그간 수집한 한국 관련 영상 자료 1500여 편을 복사, 기증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그가 보유한 영상 자료는 거의 다 디지털화 작업이 끝나 누구나 유튜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 모두 ‘지금껏 쌓아 온 지식을 공유하는 게 학자로서 내 마지막 소명’이란 학문적 신념에 따른 행보다. “변화는 결코 혼자 만들 수 없습니다. 다 같이 일으켜 결국 모두 함께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사용자의 적극적 피드백이 빠른 기술 발전을 낳았듯 말입니다.”

이문웅 명예교수의 상반신 프로필사진입니다.

 

“삼성은 비교문화론적 경영 실천하는 기업”

“오래 전 삼성인력개발원 해외지역연수소 초청으로 해외 파견 예정 임직원 대상 특강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담당 직원이 그러더군요. 해외 지역전문가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온 직원들은 약 6개월간 자신들이 경험한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고, 그 결과물은 그룹 해외 지역 문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고요. 삼성 직원들은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필요한 정보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고요. 이 데이터베이스야말로 오늘날 삼성의 성공 신화를 뒷받침한 ‘세계 지역문화 정보 수장고’ 아닐까요?”

이 명예교수는 삼성그룹이 지난 20여 년간 운영해 온 ‘해외지역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대해 “칭찬하고 싶은 제도”라고 말했다. 1990년 도입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삼성은 매년 자사 직원을 해외로 일이 년간 파견, 업무와 무관하게 해당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돌아오게 하고 있다. 지금껏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간 인원은 5000여 명. 삼성은 전 세계 80개국 170여 개 도시에 지역전문가를 파견하는 데 1조 원 이상 투자해 왔다. 2011년 7월 미국 하버드대학이 펴내는 경영학 전문 월간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는 지역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대해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면 해외 지역 문화, 즉 ‘다른 문화(other cultures)’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문화인류학을 공부해 왔기 때문일까요. 다른 나라 문화를 ‘우리 식’이 아니라 ‘그들 식’으로 이해하려는 비교문화론적 시각을 기업 운영에 실천적으로 도입한 삼성의 해외지역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by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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