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3부작 특집 인터뷰 ‘삼성전자 여성과학인을 만나다’_②장은주 기술원 무기소재랩 마스터
13년 뚝심 연구 끝 ‘나노크리스탈’ 꽃 피운 ‘작은 거인’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물리학자 뉴턴 경(Newton, Sir Issac). 어느 날,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달걀이나 삶아 먹을까?’ 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달걀을 넣은 그는 얼마 후 다 익은 달걀을 기대하며 냄비 속을 들여다봤다. 그가 냄비 속에서 발견한 건 끓는 물에 담긴 자신의 회중시계였다.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의 집중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어딘가 허술하고 세상사에 뒤처진 과학자의 모습’을 희화화할 때 종종 쓰이는 사례이기도 하다.
‘상아탑 속 과학자’의 편견에 도전하다
사람들이 ‘과학자’를 떠올리며 흔히 갖는 이미지 역시 ‘회중시계 달걀’ 에피소드 속 뉴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인 연구 분야에만 몰두할 뿐 세상사나 이해관계와는 어딘가 동떨어진 모습 말이다. 특히 학위 취득 후 대학이나 연구소로 직행한 이들에 대해선 “연구실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덧씌워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준 높은 과학 교육은 대개 상아탑 안에서 이뤄진다. 자연히 이들 교육은 현실과 유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고급 인력일수록 응용 측면의 효율성은 떨어진다’는 편견 역시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 과학자의 순수한 열정과 제품 상용화를 향한 현실 감각을 겸비, 지난 2013년 삼성전자 기술원 최초로 ‘여성 마스터’ 자리에 오른 장은주 마스터
삼성전자가 지난 2009년부터 채택해오고 있는 ‘마스터(master)’ 제도는 과학자를 둘러싼 이 같은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 설계됐다. 마스터로 선발되면 ‘해당 분야 기술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핵심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 취지로만 따지면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그에 맞게 예우해준다’는 점에서 독일의 마이스터(Meister·匠人) 제도와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주류 학교 교육과 동떨어져 개인 차원의 기술 세계를 지향하는 ‘독일 마이스터’와 달리 ‘삼성전자 마스터’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등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삼성전자에 입사, 특정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이에게 주어지는 지위다. 모든 연구 성과는 ‘삼성전자’란 큰 틀 속에서의 협업 형태로 측정, 축적된다. 요컨대 삼성전자 마스터는 △일정한 기초를 공유하고 △전체 구도의 일부를 이루며 △연구 성과가 제품(혹은 콘텐츠) 형태로 소비자와 연계된다는 점에서 ‘폭넓고 탄력적이며 실제적인’ 인력 운용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상당히 성공적이다. 삼성전자에선 올해 신규 선임 인력을 포함, 총 57명의 마스터가 근무 중이다.
기술원 최초 여성 마스터 된 ‘나노 전문가’
지난 2013년 새롭게 마스터로 선임된 11명 중 여성은 딱 한 명이었다. 장은주 기술원 무기소재랩(lab) 마스터가 그 주인공이었다.
자타공인 ‘나노 소재 구조설계와 합성·제조 최고 전문가’인 그는 입사 이후 줄곧 ‘나노크리스탈(Nano Crystal, 크기에 따라 다른 색채를 내는 수십 나노 크기의 반도체 결정구조)’ 과제 한 우물을 파왔다. 최근 출시된 삼성전자 SUHD TV는 친환경 나노크리스탈 기술이 적용된 프리미엄 TV로 기존 액정 표시 장치(LCD)에 자체 발광 기능이 탑재된 나노크리스탈 필름을 적용, 최고의 색 재현력과 화질을 구현한다. 나노 소재 활용 디스플레이 개발에 매진해온 장은주 마스터는 이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공로를 인정받아 마스터로 선정됐다.
“요즘은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SUHD TV 매출 추이를 지켜봅니다. 기술원 연구과제에서부터 출발한 기술이 실제 제품에 적용돼 세상 빛을 봤다는 건 정말 꿈 같은 일이에요. 그것도 프리미엄 제품군에! 출시 직후 시장 반응이 좋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실제 판매 실적으로 연결돼야 해 내내 맘 졸이고 있답니다.”
▲ 장은주 마스터가 이끄는 삼성전자 기술원 무기소재랩 연구실은 나노크리스탈 기술이 적용된 SUHD TV, 그리고 제품의 품질을 조금이라도 더 업그레이드시키려는 기술원 임직원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나노크리스탈 소재는 반도체의 선명한 색 순도(純度)를 유지하면서도 발광 효율이 높은 게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크기에 따라 색상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디스플레이 소재와 확실히 차별화된다. ‘자연색에 가까운 화면을 구현하는 TV’에 대한 소비자 요구가 날로 높아지는 현시점에서 나노크리스탈 기술의 가치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나노크리스탈 기술은 2002년 당시 기술원 차원에서 착수했던 원천기술 개발 과제였어요. 처음엔 연구원이 저 하나였는데 과제의 목표와 일정에 따라 점차 투입 인력이 늘며 규모가 커졌습니다. 10년 이상 끌었으니 동일 기술군을 개발하는 과제치곤 상당히 오래 걸렸죠. 초반만 해도 가시적 성과가 나오기엔 한참 이른 단계였지만 기술 자체에 대한 안팎의 관심이 워낙 컸습니다. 기술원은 물론이고 사업부 쪽 관심도 커 다양한 응용 분야를 시도하며 기초 실력을 닦을 수 있었어요. 경쟁사에 비해 빠른 기술 진입과 이른 사업화 결실 등의 성과는 그 결과였죠.”
장은주 마스터는 요즘 협력 업체들이 나노크리스탈 디스플레이 소재 양산 공정을 갖출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소재는 필름 형태로 TV에 적용되는 만큼 해당 필름을 생산하고 속성을 개선하는 일도 장 마스터의 몫이다.
벼랑 끝 서니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오기 생겨
13년간 한 가지 기술에 매달리기. 예사 집중력으로 도전하긴 어려운 일이다. 사실 연구원인 그에게 중요한 건 ‘기술 개발’이지 ‘(해당 기술이 탑재된) 제품 출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의 꿈은 점차 ‘소비자(의 실생활)’로 향해 갔다.
“제 원래 꿈은 ‘경쟁자들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자’ 정도였어요. 하지만 점차 욕심이 생겼고 이내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품 완성도를 높여보자’고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아무리 훌륭한 연구도 결국 사람들의 실생활에 혜택을 제공해야 유의미한 거니까요. 다행히 제 연구 결과가 제품 출시로 이어지고, 프리미엄 제품군에 적용됐으니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룬 셈이에요. 기술 구상 단계에서부터 출발, 제품 양산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기술원발(發) 프로젝트로 한 사업의 생태계(ecosystem)를 완성한 데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부디 잘 팔려야 할 텐데….”(웃음)
▲ 나노크리스탈 기술이 적용된 삼성 SUHD TV는 기술원에서 출발한 과제가 실제 제품 탄생으로 이어진 최초 사례다. 장은주 마스터는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맡은 과제를 반드시 성공시키고픈 절박함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그의 연구 인생엔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 분기점은 지난 2011년 하반기에 찾아왔다. 나노 소재를 적용한 디스플레이 개발이 완료되기 직전이었다. 사업화 여부를 고민하는 단계에서 문제가 터졌다. 소재에 포함된 카드뮴이 환경 오염 이슈에 휘말린 것. “논란을 없애기 위해 친환경 소재로 변경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어요. 제품화 직전 단계에서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장 마스터와 연구원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소재 개발을 끝낸다 해도 과연 사업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주변에서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큰 상황. 그 순간,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다. “벼랑 끝에 내몰리고 보니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패했을 경우도 생각해봤어요. ‘왜 잘 안 됐을까?’ 자책하며 후회하는 제 모습이 보이더군요.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끝끝내 미련이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맘을 다잡았죠. ‘지금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모두 해보자.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그러자 오히려 힘이 나면서 맘이 편해지더군요.”
▲ 장은주 마스터는 “나노크리스탈 기술 개발은 내 연구 인생 최대의 보람이었다”며 활짝 웃었다
일단 목표를 ‘사업화’로 정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주문을 거듭한 끝에 그는 결국 ‘카드뮴 프리(free) 친환경 나노크리스탈 소재’를 TV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친환경 나노크리스탈 탑재 TV가 처음 완성됐을 때, 장은주 마스터는 연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당시 경험으로 전 인생의 큰 획 하나를 그었어요. 오랜 시간 노력했고, 그 결과물이 좋은 제품에 포함돼 소비자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된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죠.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CES) 출장 갔을 때 SUHD TV 부스 앞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몰라요. 몇십 번을 보고 또 봐도 그렇게 좋더라고요.(웃음) 훌륭한 제품을 완성해준 사업부와 선명한 컬러가 돋보이도록 영상을 제작해준 분들께도 마냥 고마웠답니다.”
롱런 비결? 위기도 기회로 돌리는 긍정의 힘
“전 원래 ‘걱정이 팔자’였던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 걱정부터 앞섰죠. 그런데 여러 번 구석에 몰리고 보니 오히려 ‘결국엔 잘될 것’이란 믿음이 생겼어요. 그러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제 성격도 꽤 긍정적으로 바뀌었어요. 워낙 내성적이었던 터라 ‘여장부’ 스타일이라 할 순 없지만요.”(웃음)
장 마스터의 곁엔 늘 그를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다. 뭐니 뭐니 해도 1등 공신은 남편인 배종욱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난 부부는 누구보다 서로의 일을 잘 이해해주는 ‘친구’이자 ‘멘토’다. “남편은 제가 자기 걱정 안 하게 해주는 걸로 절 도와줘요.(웃음) 제일 좋은 건 전공이 비슷해 서로의 일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어떨 땐 제가 하는 일에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해요. 기사나 관련 글을 찾아 스크랩해주기도 한답니다.”
다소 무뚝뚝한 성격의 중학교 2년생 딸도 SUHD TV 광고가 전파를 타기 시작한 후부터 엄마 직업을 부쩍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요즘은 중학교 교과서 수준이 워낙 높아져 나노 소재가 벌써 등장하더라고요. 엄마가 나노 소재 연구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무심하더니 요즘은 좀 달리 보는 눈치예요.(웃음) 소재 연구 개발 분야는 그 특성상 일반인에게 다가갈 만한 ‘포인트’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 기술이 탑재된 제품 실물이 나오니 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쉽고 사회에 뭔가 기여하는 것 같아 무척 보람 있습니다.”
▲ 중국 베이징 여행 당시 만리장성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가족은 장은주 마스터의 오늘을 있게 한 ‘든든한 지원군’이다
기회는 ‘힘들어도 끝까지 가는 자’의 몫
장은주 마스터를 인터뷰하는 내내 ‘작은 거인’이란 말이 떠올랐다. 겸손한 말투와 타인을 치켜세우는 화법 뒤엔 자신의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체구에 숨어 있는 오기와 끈기, 책임감을 통해 언뜻 ‘삼성전자 여성 인력의 모범 답안’이 보이는 듯했다.
인터뷰 말미, 장 마스터에게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연구원으로서 독보적 성과를 이뤄낸 비결’을 물었다. “솔직히 후배들을 보며 정말 많이 배웁니다. 뚜렷한 집념, 독창적 해결력…. 회사 일이란 게 그래요. 자주 힘들고 의지와 무관하게 안 풀리는 경우도 허다하죠. 그래서 중도에 좌절하거나 일터를 떠나는 사람도 많고요. 저보다 훨씬 똑똑한 친구들이 스스로 일을 그만둘 땐 정말 안타까워요. 본인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만큼 결과를 살려내지 못한 것 같아서요.”
‘회사에서도 얼마든지 개인의 성장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무슨 일이든 좀 더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일단 시작해보길 권합니다. ‘이곳을 떠난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멋진 기회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가장 중요한 건 ‘성공하지 않아도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긍정적 자신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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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작 특집 인터뷰 ‘삼성전자 여성과학인을 만나다’_①장세영 무선사업부 선행요소기술그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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