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3부작 특집 인터뷰 ‘삼성전자 여성과학인을 만나다’_③유미영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 상품소프트웨어개발팀 상무<연재 끝>
“치킨집·세탁소 사장도 소프트웨어 알아야 하는 시대, 곧 온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다(Software is eating the world)!” 지난 2011년 마크 앤드레센(Marc Andreessen) 당시 넷스케이프(Netscape) 설립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엄청난 시장 자본을 끌어들이는 현상을 빗댄 이 말은 오늘날 IT 담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다. 유미영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 상품소프트웨어개발팀 상무와의 인터뷰 도중 가장 자주 등장한 얘기도 ‘앤드레센식(式) 예언’과 비슷했다. “소프트웨어가 곧 미래다!”
▲인터뷰 직후 ‘인터뷰보다 고단한’ 사진 촬영이 시작됐다. 삼성 SUHD TV를 배경으로 한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유미영 상무는 사무실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사진작가의 거듭된 요청도 마다하지 않던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프트웨어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무릎쯤이야!”
소프트웨어?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
지난 11일, 약속 시각보다 약간 일찍 수원디지털시티 내 삼성전자 VD사업부 상품소프트웨어개발팀 사무실을 찾았다. 낯선 방문객을 맞은 건 유 상무의 집무 공간 한쪽 벽면을 장식한 대형 스케줄 보드였다. 1주일 내내 오전 8시부터 저녁까지 크고 작은 일정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제품 론칭 시기가 대부분 봄이어서 매년 연말부터 이맘때까진 정신없이 바쁘네요.” 부드럽고 편안한 인상의 그는 활짝 웃었지만 빠르고 억양이 분명한 말투에서 풍기는 ‘포스’는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도 오전 7시부터 계속 회의가 이어졌어요. 일이요? 많을 수밖에 없죠.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은 여러 내·외부 협력자들과 호흡을 맞춰가야 하거든요.”
정보통신(IT)산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은 그야말로 ‘꽃’ 같은 분야다. 인간 소통 방식의 변화에서부터 문화 전체의 혁신을 이뤄내고, 그 물결 한가운데서 변화의 방향을 설정하며, 인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하드웨어들을 새 시대에 어울리는 언어로 표현하는 도구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사용되는 전자제품은 대다수가 소프트웨어로 작동된다. 과거 기계가 인간의 힘을 더해야 작동하는 개념이었다면 오늘날 기계는 거의 대부분 전자 제어 장치에 의해 가동된다. 그리고 이 장치를 움직이는 게 바로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는, 쉽게 말해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동작으로 코드화(code化)하는 일’이죠. TV를 예로 들어볼까요? 전원을 켜고 볼륨을 조절하고 모드를 ‘TV’에서 ‘인터넷’으로 전환해 동영상을 관람하고…. 이 모든 걸 구현하는 게 소프트웨어라고 보면 됩니다. 단순히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만이 소프트웨어는 아니란 얘기죠. 큰 기업을 경영하든 세탁소를 운영하든 소프트웨어가 문제없이 작동해야 비로소 일이 돌아갑니다. 소프트웨어에 돈이 몰리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얼마 전 치킨가게 배달부 알선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치킨가게 사장은 이 앱 덕에 배달부를 쉽게 구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 앱을 활용해 일자리를 편리하게 찾는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작 돈을 버는 이는 누굴까요? 바로 이 앱을 만든 소프트웨어 전문가예요. 꽤 흥미로운 현상이죠?”
▲유미영 상무는 “요즘은 세상만사가 소프트웨어에 의해 움직이고 돈을 버는 분야 역시 결국 소프트웨어”라며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늘고 있는 만큼 더 많은 청년 공학도가 소프트웨어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진입 장벽이 꽤 높은 분야다. 이를테면 전자제품 관련 소프트웨어는 해당 제품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활용,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일이므로 문외한이 도전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만약 그 제품이 정밀하고 복잡한 기능과 사양을 갖추고 있다면 그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유미영 상무는 “바로 그 때문에 소프트웨어 관련 일이 기피되는 경향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앞으론 소프트웨어가 거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런 만큼 이 분야 인력 양성은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영어·수학에 앞서 소프트웨어 언어와 소프트웨어적 사고방식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미래 사회에 엄청난 가치를 안겨줄 테니까요. 그런 토대가 확실히 갖춰지려면 모든 인구가 어려서부터 기본적 소프트웨어 지식과 발상법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굵직한 프로젝트 도맡아 매번 성공시켜
유미영 상무는 지난 2000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줄곧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근무해왔다. 지난 15년간 그가 거쳐온 행보엔 누구도 쉬이 이루지 못했을 업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유난히 변화가 잦은 IT업계에서 시의적절한 성과를 내놓기란 결코 간단찮은 일이다. 하지만 유 상무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여럿 성공시키며 매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유미영 상무는 지난 2004년 TV 업계 흐름을 바꿔놓은 ‘디지털 TV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일약 주목받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TV 업체들도 선보이지 못한 초대형 TV를 세계 최초로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현장 한복판에 유 상무가 투입됐다.
“그때 아날로그 TV가 처음 디지털 TV로 전환됐어요. 디지털 TV 개발엔 엄청난 투자가 필요했죠. 성공 가능성도 자신하기 어려웠고요. 경영진의 의지와 발 빠른 실행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팀원들에게 목표의식을 고취시키며 팀워크를 다졌고, 그 덕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2007년, 유미영 상무는 또 하나의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다. 보급형 디지털 TV용 플랫폼을 개발하는 일이 그것. 성패를 결정하는 키워드는 ‘슬림화(slim化)’였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수많은 보급형 디지털 TV의 해외 출시가 지연돼 막대한 매출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 이때도 유 상무는 예의 그 추진력을 발휘해 맡은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운(運)이 따랐는지 신규 플랫폼을 도입할 때마다 관련 업무를 맡게 됐어요. 이번 시즌 삼성 TV에 탑재된 타이젠(TIZEN) 플랫폼의 경우, ‘플랫폼 전면 교체’ 결정이 난 게 지난해였거든요. 10년간 쓰던 플랫폼을 버리고 불과 1년 만에 전혀 새로운 플랫폼 개발을 완료, 보급 단계까지 나아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개발자들이 굉장히 노력을 많이 기울였어요.”
▲인터뷰 직후 유미영 상무는 사무실에 있던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전 그리 좋은 리더가 아니어서 팀원들의 고생이 많을 거예요. 워킹맘이다 보니 회식도 자주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후배들과 이런저런 면담은 되도록 많이 하려 노력합니다. 저와 면담을 원하는 후배라면 언제든, 누구든 대환영이에요!”
휴직 고민하는 ‘워킹맘 후배’ 향한 조언
유미영 상무가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 VD사업부 상품소프트웨어개발팀 구성원 중 여성 인력 비중은 약 20%. 다른 부서에 비하면 꽤 높은 편이지만 책임자급 여성은 많지 않다. 상품소프트웨어개발팀의 경우, 여성 임원은 유 상무가 유일하다.
“소프트웨어 업무는 여성이 특기를 잘 살릴 수 있는 분야예요. 소프트웨어 개발이란 게 결국 여러 요소를 종합하는 일이고, 여성이 이 부문에 특히 강하니까요. 하지만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버티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갓 입사한 친구들은 제 말의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을 거예요. 저 역시 수석연구원 5년차까지만 해도 ‘버틴다’는 말은 능력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에게도 회사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한창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심각하게 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끝끝내 휴직 없이 버텼고 지금 위치에 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휴직 여부를 망설인 핵심이 ‘육아’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절 힘들게 했던 건 회사 문제였죠. 대인 관계 등이 이리저리 얽히며 일이 맘대로 안 풀릴 때 받는 스트레스를 육아나 교육 등 개인 문제로 돌리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거예요. 어느 순간, ‘갖가지 핑계를 대며 진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죠.”
요즘도 그는 휴직을 고민하는 여직원들과 면담할 때 일을 쉬려는 ‘진짜 이유’가 일인지, 육아인지 꼭 물어본다. “그런 질문을 받은 후배들은 대부분 스스로도 그 부분이 혼란스러웠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회사 일로 받는 스트레스와 집안일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는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가끔은 의도적으로라도 회사 일의 부피를 키워 육아 스트레스를 회사 문제 이상으로 크게 느끼지 않도록 해보세요.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어느새 본인만의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 겁니다.”
▲유미영 상무의 가족사진. 1남 1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는 “한창 아이들을 키울 땐 힘들어 휴직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출산휴가 외엔 쉬지 않았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내가 빠질 수 없는 판’ 만들어지게 하라
유미영 상무에 따르면 오늘날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은 상당 부분 열악한 환경을 버티고 또 버텨온 선배들 덕에 갖추게 된 것이다. “저도 직장 생활 하며 엇비슷한 고민에 휩싸인 여성 선후배와 동료들을 여럿 만났어요. 특히 아이들이 자라면서 심각하게 퇴사를 생각하거나 실제로 사표를 쓰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악물고 버티는 사람이 한두 명씩 늘면 상황은 조금씩 나아져요. 힘들어도 서로 위안을 얻고 용기를 내 함께 가는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예전에 비하면 요즘 직장의 업무 환경은 ‘일하는 여성’에게 상당히 친화적인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육아 휴직을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고 휴직 후 복귀해서도 본인의 업무를 큰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다. “회사 일과 가사,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도 가능한 한 휴직보다는 탄력 근무제 활용 등 업무 유연화로 해결하는 게 낫다”는 게 유미영 상무의 지론이다. 업무는 아무래도 일정 기간 공백이 생기면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고, 회사 분위기도 점차 여성 임직원이 휴직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유미영 상무의 오늘을 있게 한 핵심 경쟁력은 뭘까. 그 자신이 꼽은 첫 번째 키워드는 ‘기술적 리더십’이다. 본인의 업무 분야에 대해선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내가 빠질 수 없는 판’이 만들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술 수준이 뛰어나면 자연히 좋은 아이디어도 나옵니다. 뭘 하려고 하는지, 그러려면 뭘 바꿔야 하는지, 새로운 걸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결과가 조직에 이식되면 고스란히 성과로 남게 되죠.”
▲유미영 상무는 “직접 겪어보니 기회도 결국 버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더라”며 “회사 일이 힘들 땐 업무량을 조정해서라도 끝까지 버티는 게 답”이라고 조언했다
소프트웨어 개발도, 골프도 관건은 ‘기본기’
유미영 상무는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을 종종 골프 레슨에 비유한다. “골프 처음 배울 땐 무조건 세게, 막 치면 멀리 나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힘으로만 골프채를 휘두르면 코스가 조금만 바뀌어도 적중률이 확 떨어지죠. 반대로 좀 더디더라도 처음부터 정확하게 자세를 배우면 어떤 상황에서든 공을 멀리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개발도 마찬가지다. “프로세스가 조금만 새로워져도 개발자들은 낯설어합니다. 눈앞의 고비를 좀처럼 넘지 못하죠. 그럴 때마다 전 개발자들에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기본기를 익히라고, 코스가 바뀌면 예전 습관을 과감하게 버린 후 새로운 자세를 배우라고, 그래야 50미터 나가던 공을 100미터까지 내보낼 수 있다고요. 팀원 전체가 그런 자세로 합심한다면 어떤 고비든 거뜬히 넘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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