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원 칼럼] 作作하는 그녀_④봉사하는 즐거움<上>학창 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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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직원 칼럼 作作하는 그녀 4편 봉사하는 즐거움<上> 학창 시절 이야기 개성 넘치는 임직원 네 명이 매주 색다른 주제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우리 삶 가까이 있는 IT와 일상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안녕하세요. ‘작작(作作)하는 그녀’ 이연희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소프트웨어 개발자’에서 ‘칼럼니스트’로 변신, 여러분과 만난 지 벌써 넉 달이 흘렀네요. 첫 칼럼을 보낼 때만 해도 ‘내 얘기에 몇 명이나 관심 가져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요. 예상치 못한 조회수와 댓글, 응원 메시지에 무척 놀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그리고 다음 회차엔 ‘봉사활동’에 관한 얘길 들려드리려 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 드릴 대학교 시절까지의 경험담은 학생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학부모님과 예비 부모님들도요.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그냥… 봉사가 하고 싶어서요”

제 학창 시절의 3대 키워드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전 단연 책과 컴퓨터, 그리고 봉사활동을 들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제가 ‘꿈’을 주제로 강연할 때 늘 얘기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셋 모두 제가 꿈을 꾸고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책에 관한 얘긴 첫 번째 칼럼에서 들려드렸으니 이번엔 봉사활동 얘길 좀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삼성투모로우 독자 여러분은 봉사활동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사전에서 봉사의 의미를 찾아보면 ‘공공의 이익이 달린 일을 자기 의지로 행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왜 봉사활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전 이렇게 답할 겁니다. “봉사가 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얼마 전, 주말을 활용해 가까운 곳으로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담당자에게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더니 “수용 가능 인원이 정해져 있어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러곤 이어진 질문. “취업 준비생이세요? 아니면 회사 진급 때문에 (봉사 기록이) 필요하세요?” 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저 봉사활동 시간이나 기록 같은 것 없어도 되는데…. 그럼 봉사할 수 있나요?” 그러자 그 담당자의 눈은 의구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 그러세요(그런데 왜요)?” “그냥 봉사가 하고 싶어서요.”

봉사활동을 하는 여성과 한 아이가 같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올해 봉사활동 도중 만난 어린이와 함께 포즈를 취했습니다. 발그레한 두 볼이 참 예쁜 아이죠?

 

봉사활동?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습관’

전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비교적 쉽게 봉사활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 나고 자란 동네에서 10년 이상 통장 일을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성실의 아이콘’이었던 아버지에게 동네 청소는 일상이었습니다. 일이 있어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방문했다가도 일손이 필요하다, 싶으면 △봉투 붙이기 △전단 돌리기 △예비군 안내 통지문 배포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 팔 걷어붙인 채 적극적으로 나서셨습니다.

봉사에 관한 한 어머니도 만만찮으신 분이었죠. 하루는 학교를 다녀왔는데 어머니가 김장을 200포기씩이나 담그고 계신 거예요. 담그는 김에 동네에 어렵게 사시는 분들께도 나눠드린다고요.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동생이 길에서 3000원을 주워왔는데 어머니는 그 돈에 당신 돈을 더해 동생이 직접 학교에 기부하도록 하셨습니다. 동생이 본인 손으로 어려운 이를 도우며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이런 부모님 아래서 자란 덕분에 전 일찌감치 ‘타인을 돕는 일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당연한 생활 속 습관’이란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고교 시절, 봉사 동아리 단장이 되다

네 명의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여름, 전 동생과 함께 ‘청소년평화봉사단’ 자격으로 일본 북규슈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현지 학생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다양한 교류 활동을 펼쳤죠. 당시 캠페인을 진행하며 우리가 만든 슬로건이 일본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친해진 친구들을 훗날 집으로 초대해 홈스테이를 한 기억도 있죠.

그때 겪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일본 속 한국’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찾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묵념하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사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었죠.

고교 진학 후, 전 봉사 동아리 단장이 되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복지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그곳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고 장애인 친구들과 놀며 그들의 식사 준비를 도왔습니다. 주 1회 인근 독거노인 댁을 찾아 그분들과 담소를 나누고 책을 읽어드리며 마사지를 해드리기도 했죠.

1주일에 하루,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새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분들과 꽤 많은 정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전 빨대 꽂힌 요구르트 용기를 보면 고교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요. 봉사하러 간 할머니 댁에서 절 기다리고 계시던 할머니가 정성껏 챙겨주시던 게 바로 그 요구르트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분들은 서툰 저희들의 손길도 마냥 너그럽게 받아주셨습니다. 손이 서툰 친구의 마사지도 “시원하다”며 받아주시다 결국 어깨 근육이 뭉쳐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던 할머니도 계셨죠.)

 

봉사 잘 해야 대학도 잘 간다고요?

요즘 고교생 후배들을 보면 대학 진학 시 가산점 등에 끌려 다분히 목적성을 갖고 봉사에 임합니다. 실제로 뉴스 등을 찾아보니 대학에 진학하려면 몇 십 시간 정도의 봉사활동 기록이 필요하더군요. 일부 봉사활동이 ‘연중 이벤트’처럼 돼버린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봉사가 하고 싶다”던 절 이상하게 바라보던 봉사단체 담당자도 이해가 되고요.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저 역시 그간 수행한 봉사활동 기록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600시간이 약간 넘더군요. 하지만 제 경우, 그 목적이 ‘대학 입학’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대학에 입학한 후엔 봉사활동을 아예 끊었겠죠.

혹자는 제게 말합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긴 한데 당최 시간이 안 난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입니다. 제 경우, 너무 바빠 외출이 여의치 않을 땐 녹음이나 문서 작업 등 ‘재택 봉사’ 일감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찾아보면 봉사할 거리는 여기저기 정말 많이 있습니다. 자녀가, 동생이, 친구가 봉사활동에 관심 있지만 적당한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대신 찾아봐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의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치유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전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저도 모르는 새 봉사활동을 찾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죠. 공부하다가, 쏟아지는 과제에 지칠 때마다 봉사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제게 봉사활동은 ‘공짜로 값진 공부를 가르쳐주는 과외 교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왕 할 봉사, ‘내게 도움 되는’ 방향으로!

대학생이 된 후 저도 여느 또래들처럼 어학 시험 점수를 따야 했습니다. 당시 제 선택은 ‘봉사하며 영어 공부하기’! 그때 발견한 게 원어민 영어교실 보조 교사 자리였습니다. 방학마다 늦잠 자는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덜컥 신청했죠. “영어 못해도 된다”는 담당자의 설명도 한몫했고요.

“출석 점검만 하고 다른 교실에서 컴퓨터 하시거나 책 봐도 돼요.” 담당자는 제게 말했지만 전 그냥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기로 했습니다. 초등생 시절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원어민 영어 수업이 꽤 재밌었거든요. 열심히 참여하다보니 영어 실력도 조금씩 늘었습니다. 언젠가부턴 학생과 교사 간 통역까지 맡을 수 있게 됐죠. 물론 초등생 대상이었으니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요. 그 결과, 전 그 달 말 치른 토익(TOEIC)에서 800점 이상의 점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여성이 원어민 영어 교실 보조 교사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입니다. ▲봉사와 영어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해줬던 원어민 영어 교실 보조 교사 봉사활동 당시 모습

원어민 영어교실 보조교사 봉사활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전 학기 중에도 유사한 봉사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결과, 신촌에 위치한 국내 체류 외국인 유학생과 일반인 대상 국제 교류 클럽에서 스태프로 참여할 수 있었죠. 일명 ‘언어 교환 정모(정기모임)’에서 처음엔 다과를 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차츰 적응하며 ‘아이스 브레이커’ 역할로 낯선 이들 간에 형성되는 어색함을 깨는 역할을 맡으며 영어 회화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 여성이 외국인과 사진을 찍는 모습과 건배를 하는 단체 사진입니다. ▲국제 교류 클럽에서 스태프로 참여했던 경험은 제게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줬습니다

직장인이 된 지금도 전 다양한 곳에서 외국인을 만나 소통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또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고 이런 모임엔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죠. 그러니 영어(일본어나 중국어도 마찬가집니다)를 쉽고 재밌게 익히고 싶은 분이라면 꼭 이 방법을 한 번 시도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누군가 제게 “봉사활동으로 대학에 가고 취업도 했느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이 제 대학 진학과 취업에 도움이 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봉사활동은 단순한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실력 향상이나 인적 네트워크 확대, 활동 영역 확장 등의 ‘부수 효과’도 쏠쏠하죠. 어떠세요, 이쯤 되면 봉사활동의 매력도 상당하죠?

 

‘메딕 연희’, 농활 통해 또 한 뼘 성장

학창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했던 사진입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농촌 봉사활동, 줄여서 ‘농활’은 대학 생활의 대표적 낭만 중 하나였습니다. 전 2008년 당시 공과대학 부학생회장 자격으로 단과대학 내 주요 학과(학부)를 따라다니며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계절 농활에 동참했습니다. 전 비상 약통을 담당하느라 ‘메딕 연희’란 애칭으로 불렸죠.

여러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경험하며 도시에선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한 듯 먹는 접하는 과일이나 농작물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도 관찰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마을 어른들과 대화하며 ‘인생’을 배울 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감동 받았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실제로 마을 잔치에 쓰일 전을 굽느라 장장 일곱 시간 동안 프라이팬 앞에 있었던 적도 있답니다.

요즘은 제가 대학에 다닐 때처럼 농활이 활성화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의 문턱 앞에서 소위 ‘스펙’을 채우기 위해 책상 앞이나 학원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며 생긴 현상이겠죠. 하지만 봉사활동은 결코 남에게 퍼주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뛰어들어보면 자신이 들인 시간과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깨닫고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거예요.

다음 편에선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된 봉사활동 경험담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다음 얘기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by 作作하는 그녀(이연희)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Sensor 솔루션 Lab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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