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모방과 창의는 ‘뫼비우스의 띠’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간단한 퀴즈 하나. 동물 중 흉내를 가장 잘 내는 종(種)은? 상당수가 ‘비교적 지능 높은 유인원’으로 알려진 원숭이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정답은 ‘인간’이다.
지난 1983년 8월 15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은 ‘What Do Babies Know?(영아들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란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게재했다. 이 지면에 소개된 아동심리학자 앤드루 멜조프(Andrew Meltzoff) 미국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연구 결과는 상당히 흥미롭다. 논문에서 멜조프 교수 연구팀은 출생 시기가 조금씩 다른 영아들을 대상으로 이색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자가 영아를 안고 그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거나 혀를 내미는 등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것. 놀랍게도 생후 3일 된 아이도 실험자의 입 모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렇게 볼 때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타인의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 최고의 모방 능력을 갖춘 존재다.
흉내는 ‘무심코’, 모방은 ‘일부러’
모방(模倣)은 일반적으로 ‘(모델과 관찰자가 있다고 했을 때) 모델의 특정 행동에 노출된 관찰자가 그에 상응해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모방과 흉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흉내가 ‘아무런 의식 없이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인 데 반해 모방은 ‘선택적(selective)’ 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모방하는 이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행동한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정 수준의 수정도 이뤄진다.
모방은 ‘선택적(selective)’ 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모방하는 이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행동한다.
꽤 많은 이가 모방을 ‘창의(創意)’의 반대 개념으로 알고 있다. ‘모방은 창의와 달라서 그저 기존의 것을 인위적으로 복제하는 데 그치는, 열등한 행위’란 게 이들의 생각이다. 반면, 창의는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 위해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적 아이디어를 동원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심지어 한편에선 ‘모방은 창의적 행동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모두가 모방과 흉내의 개념 오해에서 비롯된 오류다.
적절한 예시는 창의성 발휘의 ‘감초’
모방과 창의 간 관계를 잘 보여주는 실험은 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 심리학과에서도 진행된 적이 있다. 이 실험에서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외계인을 그리게 하고 몇몇 예시 그림을 제시했다. 참가자의 상당수는 외계인의 주요 특징을 표기할 때 연구진이 보여준 예시 그림을 모방했다. 예시 그림이 더 많이 제시될수록 참가자들이 그리는 외계인 종류도 늘었다. 뿐만 아니라 초기 디자인을 보여준 후 “이를 더 보완해보라”고 하자 한층 독창적이고 수준 높은 디자인이 완성됐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모방의 가치가 예시 활용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크리스티나 셸리(Christina Shalley)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 교수 연구팀은 ‘창의적 대상을 모방할수록 창의적 문제 해결이 보다 수월해진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해당 실험 참가자들은 업무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창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를 3개 집단으로 구분, 첫 번째 집단엔 아무런 예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집단엔 일반적 예시를, 세 번째 집단엔 창의적 예시를 각각 제공했다. 그 결과, 가장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아낸 건 세 번째 집단이었다. 창의적 예시가 주어질수록 이를 모방하고 발전시켜 한층 더 나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였다.
요컨대 창의성의 측면에서 본 모방은 단순히 관찰된 타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바탕으로 타인의 행동 중 일부를 취사선택하고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선택적 모방’은 애초 관찰 대상이었던 타인의 행동과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전혀 새로운 특성과도 합쳐진다. 창의성을 ‘보다 많은 아이디어의 창출’로 볼 때, 사람은 타인을 모방하며 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샘 월튼 월마트 창립자의 성공 비결은?
성공적 모방의 사례는 꽤 여러 분야에서 어렵잖게 발견된다. 오데드 센카(Oded Shenkar)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피셔칼리지 교수 연구팀이 혁신적 경영학 모델을 비롯해 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연구한 결과, 모방은 실제로 모든 경우에서 발전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조사 대상 혁신 사례 중 97.8%가 모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48개의 혁신적 물건과 34개의 경영 사례(혹은 발명품)가 모방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문화예술 분야 전문가 중에서도 “100% 순수하게 새로운 방법만 내세울 필요는 없다”며 모방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모방을 잘하는 사람은 해당 분야의 우수 사례를 다방면으로, 구체적으로 연구한다. 그 덕에 시작은 ‘모방’이었지만 ‘창의’로 매듭지어지는 사례도 많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월마트 창립자 샘 월튼(Sam Walton, 1918~1992)은 1962년 첫 번째 매장을 열기 전 미국 최초 할인점 코벳(Korvette’s)을 포함, 페드마트(FedMart)·케이마트(Kmart) 등 당시 미국 전역에 분포한 할인점을 방문해 경영진을 만났고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기적으로 할인점에 가 앉아 있었다. 그곳이 곧 내 연구실이었기 때문이다. 할인점 종사자들이야말로 우리 일을 더 많이, 잘 알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역시 몇 년 전 이마트 영업 담당 임직원들과 해외 선진 할인점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정 부회장 일행은 미국 아칸소주 벤턴빌(Bentonville)에 위치한 월마트 본사를 찾아 재고 보충 시간 등 다양한 영업·유통 전략을 배우고 익혔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이마트는 미국·일본·유럽 주요 할인점의 유통 원리를 따 와 한국 실정에 맞는 이상적 할인점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래야 모방의 결과에 자신만의 가치와 철학을 담아 진정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은 세간의 인식처럼 나쁜 게 아니다. 생각만큼 단순하지도 않다. 흉내 내는 작업엔 가치나 철학이, 생각과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하지만 모방은 다르다. 흉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흉내 낼 때보다 훨씬 나은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잘 모방하려면 세상만사에 호기심을 갖고 눈여겨보고 따라 해보며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모방의 결과에 자신만의 가치와 철학을 담아 진정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칠 수만 있다면 모방이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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