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소설 ‘28’에 대한, 삐딱하지만 애정 어린 감상문

2015/12/09 by 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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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소설 28에 대한 삐딱하지만 애정 어린 감상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국내 최고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보세요. 매주 화요일 투모로우 블로그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판사


 

소설 일변도의 책벌레였던 소년 시절과 달리 나이 먹어선 인문∙사회∙자연과학 유(類)에 치우친 독서를 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 소설은 몇몇 작품 외엔 잘 읽지 않는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작가 작품을 몇 편 읽어보려 했지만 대개 초반부의 벽을 못 넘기고 덮게 되곤 했다. 신선한 설정과 매력 있는 캐릭터를 눈 앞에 들이밀고 있긴 한데 어쩐지 잘 몰입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낯선 세계를 ‘디테일이 살아 있게’ 그려내다

소설이기만 하면 지루하든 쓰레기 같든 마냥 재밌게 읽었던 소년 시절엔 독서 외에 별다른 즐거움이 없었기 때문에 좀 더 관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 많지 않은 여유 시간을 놓고 경쟁이 여간 치열하지 않다. 웹서핑(web surfing)을 하면 좋은 기사와 동영상, 사진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다. IPTV만 틀어도 개봉 시기를 아쉽게 놓친, 좋은 영화가 줄줄이 떠오른다. 한때 좋아했던 미드(미국 드라마)도 점점 그 우선순위가 밀리는 모양새다. 짧은 시간에 빠져들지 못하는 소설을 ‘꾹 참고 몰입될 때까지 기다리며 읽을’ 관대함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

나름 유명하다는 작가의 작품 몇 권을 펼쳤다 덮었다. 그러다 정유정의 ‘28’(은행나무)을 만났다. 이 책은 좀 달랐다. 일단 도입부의 ‘알래스카 개썰매’ 에피소드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세계 속 얘기가 실감나게, ‘디테일(detail)’이 살아있게 묘사됐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28의 모습.
사진 출처: 은행나무/출처가 명기된 이미지는 무단 게재, 재배포할 수 없습니다

이문열식(式) 사변적 독백도 탐독하던 소년 시절과 달리 이젠 방구석에 앉아 협소하고 익숙한 얘기만 늘어놓는 책은 곧장 덮게 된다. 수 십만 부씩 팔리는 ‘힐링(healing)’ 유 자기계발서를 펼쳤다 몸서리치곤 이내 덮어버리는 이유다. 하나마나 한 소리의 나열 같다.

어느새 꽤 나이가 든 나는 미지의 것, 구체적인 것에 끌린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정보’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나이 먹은 후엔 소설을 덜 읽는다. 어쩌다 읽는 소설이 대부분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과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와 존 그리샴(John Grisham) 작품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보다 차라리 당장 가지도 않을 여행서, 그것도 감상으로 점철된 종류 말고 여행지의 역사∙문화 등 정보가 많이 담긴 쪽에 훨씬 눈길이 간다. 말하자면 ‘정보편향적 독서’인 셈인데 사실 이것도 좀 슬픈 일이긴 하다. 한때 나도 분명 ‘쓸데없는 세계’에의 몰입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존재였는데 말이다.

 

모호한 메시지와 평면적 캐릭터는 ‘옥의 티’

‘28’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새로운 세계를 최대한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발로 글을 쓰는’ 작가의 성향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실제로 작가의 철저한 취재와 자료 수집이 소설 전반의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참 성실한 작가란 생각이 들었다. 한 작품을 위해 몇 년을 투자하기도 하는 전업작가의 위대함을 마주한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익숙한 묵시론적 재난물의 세계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에서부터 좀비 영화들, 한국 영화 ‘감기’(2013), 미드 시리즈 ‘워킹 데드’(2010~)까지…. 그런데 ‘28’은 대충 묘사하다 멈출 선에서 좀 더 나아간 디테일 덕분에 익숙함을 탈피할 수 있었다. 수의사와 간호사, 119 구조대, 심지어 개의 생태까지 모든 묘사가 생생하다.

묵시론적 재난물의 세계를 다루는 소설

이런 점에서 감탄을 거듭하며 읽어나갔다. 그런데 중반부터 생생한 세부 묘사의 ‘약발’에 적응해선지 몰입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처절하고 극적인 이야기다. 입체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는 캐릭터도 다수 등장한다. 그런데도 작중 인물이 처절해하는 만큼 내게 처절한 감정이 전이되진 않았다. 그저 담담하고 냉정하게 책장을 넘기게 됐다. 왜일까?

전반부의 장점,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의 힘은 ‘28’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갈고리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독자를 몰입시키는 건 스토리의 힘, 캐릭터와의 정서적 교감이다. 그런데 ‘28’은 지옥도의 생생한 묘사만 연속될 뿐이어서 어느새 지친다. ‘그래서 어쩌라고?’란 물음표가 자꾸 떠오른다.

돼지 살(殺)처분의 끔찍함에 충격 받은 작가가 죽어간 동물들의 진혼을 위해 인간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둘러 엄숙히 제물로 바치는 것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지옥도의 묘사는 앞서 언급한 영화나 미드 등 다른 매체로 인해 이미 익숙하다. 새롭지 않다. 지옥도는 배경에 그치게 두고 작가가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읽혀야 할 것 같은데, 잘 잡히지 않았다.

엄청 새로운 이야기일 필요도 없다. 심지어 ‘사랑만이 희망이다’ 따위의 손발 오그라드는 메시지라도 좋다.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의 장점이 ‘진부한 메시지를 약간이라도 참신하게 양념한 후 전달함으로써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악마성을 비관해 살처분 당한 동물들처럼 멸종 당해 마땅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차라리 한 발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악마성을 보다 냉정하게 묘사했어야 한다.

씨앗 하나를 위해 많은 손이 모여 그것을 피우고자 한다.

‘28’은 ‘동해’(사실 그조차도 억압적 가정의 희생자다)를 제외하면 선량한 주인공들이 그리스적 비극 속에 처절하게 고통 받는 구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적 비극성에 관한 고전으로 읽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역시 재난영화에 익숙한 패턴대로 무능하고 비인간적인 정부 권력이 운명에 해당하는 ‘바이러스’보다 더 큰 비극 제공의 원천으로 점점 더 부각된다. 고전적 비극성을 훼손한 채 익숙하고 구체적인 분노만 소환하는 모양새다.

좀 더 가지치기를 해 투박하고 우직하게 한 가지 중심으로 얘길 밀어 붙였으면 어땠을까? 인간에 대한 희망이든, 인간에 대한 냉소든, 인간의 운명적 비극성이든, 시스템에 대한 분노든 간에 말이다.

묘사도 너무 세다. 초반에 죽은 개 머리를 밟아 신발에 눈알이 붙는 지독한 묘사에서부터 곳곳에 끔찍한 장면이 예의 그 뛰어나고 구체적인 묘사력으로 그려진다. 센 양념을 범벅하면 혀는 마비된다. 밋밋한 와중에 한 번 머리를 강타하는 센 묘사가 있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초반부터 달려대니 나중엔 그조차 심드렁해진다.

극작가 이현화의 연극 ‘카덴자’를 본 기억이 난다. 암전됐다가 조명이 0.5초간 고문 받던 여주인공을 잠깐 비춘 후 꺼지는데 상반신 누드다. 뭐, 세세히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섬광같은 누드가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비극적 희생자, 그로테스크함 모두. 처음부터 벗고 설쳐선 얻을 수 없는 효과다. 결국 그 연극은 누드를 가장 효과적으로 쓴 연출의 예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의사가 청진기를 벗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캐릭터의 감정선에 잘 설득되지 않는 점도 아쉬웠다. 특히 ‘윤주’가 ‘재형’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그렇다. 무성의하게 표현하면 ‘서로 옥신각신하다 죽도록 고생하고 보니 어느새 당신밖에 없더라’ 하는 갑작스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 중엔 ‘좀처럼 몰입되지 않는 캐릭터’ 재형이 있다. 소설 도입부, 쉬차를 늑대에게 던져준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갖게 된 폐쇄성, 그리고 개에 대한 헌신…. 머리론 알겠는데 가슴으로 잘 설득되진 않았다. 그저 끝까지 까칠하고 내성적인 의사 선생으로만 느껴진다. 윤주처럼 와락 끌어안고 싶어지질 않는다. 독자가 좀 더 재형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낄 장치를 친절하게 배치했어야 할 것 같다. 독자라면 누구나 소설 속 주인공에게 호감을 갖고 싶으니 말이다.

소설 중 가장 설득되는 감정선은 사람이 아닌 개의 것이었다. 특히 ‘스타’에 대한 ‘링고’의 절절한 애정과 집착, 그로 인한 복수심은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감정이었다.

 

영화 못잖게 ‘몰입감’ 갖춘 한국 소설 더 많아지길

안경, 펜, 노트, 타자기, 그리고 구겨진 종이

이래저래 투덜거리긴 했지만 모두 아쉬움에서 부린 까탈일 뿐이다. 2년 3개월간 한 작품을 위해 노력했다는 작가가 존경스럽다. 갈수록 우리 문학이 독자의 외면을 받고 있는 시대, ‘대중 소설’이란 레테르(label)에 연연하지 않고 영화처럼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정유정 같은 작가야말로 고마운 존재다. 북유럽 소설, 일본 소설만 찾지 말고 올겨울엔 우리 작가의 최근 작품도 한번 찾아 읽어보시길 권한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by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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