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시장경제 기반 흔드는 ‘분노의 용어’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실제로 언어는 존재가 머무는 곳이며,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언어는 소통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 인간이 언어를 부리는 게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부린다.
납품 단가 ‘후려치니’ 하청업체 ‘죽어난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용어는 오도된 정책을 낳는다. 이른바 ‘경제 민주화 1호 법안’으로 국회를 통과한 하도급법개정법률이 전형적 예다. 하도급법개정법률의 주요 내용은 납품단가 부당 인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후려치기·비틀기 등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논리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징벌적 배상이 정당화되려면 가해 행위가 ‘의도적’이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해당 행위를 적발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납품단가 인하는 의도적 가해 행위가 아닐뿐더러 숨기거나 은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사적자치(私的自治)’ 영역인 협상에 ‘정당과 부당’의 잣대를 대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납품업체 쪽 입장은 간명하다. “납품단가를 무작정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품 제조에 소요되는 원자재 가격이 오른 경우 이를 납품단가 책정에 반영해 달라는 요구도 못 하느냐”는 얘기다. 말하자면 ‘납품단가 원자재가격 연동제’쯤 되는 셈이다. 통상적인 ‘물가연동제’를 생각하면 언뜻 합리적 요구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흔히 ‘부품 가격은 대기업이 결정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부품의 가치는 부품이 들어가서 생산되는 최종 소비재에 대한 소비자들의 가치평가로부터 역산(逆算)된다. 원자재 가격이 상승할 때 부품 가격을 올릴 수 있으려면 소비자가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최종 소비재에 대한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는 최종재 소비에 따른 효용이 증가하지 않는 한 지불 의사를 높이지 않는다.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을 때 그만큼 부품 가격을 올려줘야 한다’는 주장은 최종재 수요가 원자재 가격 상승과 동시에 증가해 최종재 가격이 올라가지 않는 한 옳은 상황 인식이라고 볼 수 없다. 계약은 구속력을 갖는 사적자치다. 원자재 가격이 올랐으니 납품단가를 올려달라는 주장은 ‘공적 규제’로 사적자치를 대체하라는 것과 같다. 그런 논리라면 ‘최종재 가격이 떨어지는 경우, 납품단가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한다.
납품단가연동제는 ‘납품단가 지지 규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면 납품업체는 어떤 불확실성도 짊어지지 않게 되며 기업가정신은 실종된다. 기업가정신은 “원자재를 포함한 생산 요소들을 구매해 재화를 만든 다음, 이를 소요된 비용보다 더 비싸게 누군가에게 팔 수 있음을 기민하게 판단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때” 발휘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납품단가연동제는 납품업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한편에선 “납품업체에 적정 이윤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윤은 누가 ‘보장’해주는 게 아니다. 한 납품업자가 정상치 이상의 ‘초과 이윤’을 얻고 있다면 반드시 그 납품업자보다 싼 가격에 부품을 납품하겠다는 경쟁업자가 나타난다. 이때 단가를 후려치는 주체는 제조업자가 아닌 ‘또 다른’ 납품업자다. 이 과정을 거쳐 납품업체엔 겨우 먹고살 만큼의 ‘쥐꼬리 이윤’만 남겨진다. 이게 진짜 정상 이윤이다. 경쟁은 기업의 체질을 강화시키며 지갑을 여는 ‘소비자 후생’을 증진시킨다.
‘골목상권 대(對) 대형마트’만큼 불필요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말은 없다. 골목상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틀린 용어다. 상권은 골목이 아닌 ‘소비자의 발걸음’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골목은 장소일 뿐이다. ‘피자(pizza) 골목’은 피자집이 많이 몰려있는 골목을 의미한다. ‘골목상권’보다 ‘근린상권’이 맞는 말이다. 대형마트도 단순히 외형이 크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대형할인 양판점’ 또는 ‘대형할인 마트’로 불려야 한다. 특정 공간을 전제할 필요가 없어진 ‘해외 직접구매’나 ‘모바일상품권 판매’ 등은 골목상권과 대형마트에 적용되는 2분법적 시각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장 ‘의인화’하는 시각 경계해야
시장은 특정인에게 특정 재화를 사전에 할당하지 않는다. 또한 잘못된 기대와 계산에 기초한 의도는 예외 없이 처벌한다. 따라서 시장을 ‘탐욕’이나 ‘권력’과 짝지어 생각하는 건 오류다.
시장은 ‘의인화’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순환출자를 통한 가공자본은 ‘탐욕적 재벌’의 전형적 예로 지적된다. 이때 가공자본은 실체가 없는 ‘유령 자본’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보자. ‘갑(甲)’이 은행에서 100원을 빌려 김밥집(A)을 개업했다. 그는 장사가 잘되자 A를 담보로 은행에서 80원을 빌려 분점(B)을 냈고, 분점 영업 역시 잘돼 B를 담보로 은행에서 60원을 빌려 제2의 분점(C)을 개업했다. 이 단계에서 갑은 C를 담보로 40원을 빌려 A에 출자한 후, 40원을 은행에 상환했다. 대중은 이 같은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뿐더러 갑을 오히려 ‘수완 좋고 유능한 사업가’로 인식한다.
위 사례의 김밥집을 계열사로 치환하면 ‘A사→ B사→ C사→ A사’ 등 원(圓) 모양의 순환출자 구조가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유능한 사업가’는 ‘탐욕스런 재벌’로 변한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위의 설례(說例)에서 갑이 분점을 낼 수 있었던 건 시장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시장 테스트를 통과한 기업이 작은 자본으로 여러 개의 기업을 지배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순환출자는 자본이 부족했던 시대에 다양한 신규 산업에 진출하면서도 자본을 절약할 수 있게 한 ‘제도적 대체재’였다. 순환출자는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일반적 기업조직(출자)의 한 형태다. ‘(가공자본으로서의)유령자본’이 아니라 ‘간접자본’이 맞는 개념이다.
시장의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의 선택’에서 나온다. 소비자가 제품을 사고 투자자가 자금을 대는 건 그 기업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시장 권력은 ‘경쟁력’의 다른 이름이며, 경합 관계에 있는 경쟁자를 이기지 못하면 언제라도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노키아와 소니의 몰락은 기업의 경쟁력이 ‘상수(常數)’가 아니란 진실을 엄혹하게 보여준다. 시장 권력이 일자리를 만드는 경쟁력의 원천인 셈이다.
‘시장경제 수레바퀴’ 멈추지 않게 하려면
시장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분노의 용어는 시장경제의 기반을 허문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은 존재하지 않고 타인만 존재하는 ‘타인화’ 현상을 초래한다. 내가 일감을 따내지 못한 것은 누군가에게 일감을 몰아주었기 때문이고, 납품단가가 낮은 것은 상대방이 부당하게 가격을 후려쳤기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 진위를 따질 겨를도 없이 “크고 강한 것은 부당하다”라는 인식이 고착된다.
기업은 기업생태계 속에서 존재한다. 가치사슬(value chain)은 기업과 기업 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하청과 원청 간의 중층구조가 가치사슬이다. 소비자와 생산자도 시장생태계 안에서 ‘경쟁을 통한 협력’ 관계를 유지한다. 시장은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질서의 장(場)’인 동시에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 포착의 장’이다. 분노와 증오의 용어를 제어하지 못하면 시장경제란 수레바퀴는 언젠가 멈춰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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