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이성계의 성공과 맥베스의 실패에서 배운다

2015/03/27 by 김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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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조선 창업주 이성계와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의 주인공 맥베스는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다 성공한 군인이었고, 야심가였으며, 국가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성공했고 맥베스는 실패했다. 둘 사이엔 어떤 간극이 있었던 걸까. 이성계의 성공과 맥베스의 실패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교훈은 뭘까.

 

맥베스: ‘마녀 예언’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비극적 최후 맞아

우선 맥베스 얘기부터. 스코틀랜드 코도 영주가 노르웨이 국왕과 짜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던컨 왕의 친척인 맥베스 장군은 뱅코 장군과 함께 반란을 제압한다. 돌아가는 길, 세 명의 마녀를 만난 맥베스는 자신이 코도 영주 자리를 얻고 스코틀랜드 왕이 되리란 예언을 듣는다. 마녀들은 “뱅코의 후손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스코틀랜드의 성

가슴이 벅차오른 맥베스는 부인에게 마녀의 예언 내용을 알려주고 왕의 암살을 모의한다. 한편, 던컨 왕은 맥베스를 코도 영주로 임명하고 반란 제압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맥베스의 성을 방문한다. 거사를 앞두고 주저하는 맥베스와 달리 부인은 결단을 재촉한다. 결국 맥베스는 두 보초에게 많은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후 잠든 왕을 직접 죽인다.

이튿날 아침, 맥베스는 두 보초에게 국왕 살해 누명을 씌운다. 모든 일이 맥베스의 음모란 사실을 직감한 맬컴 왕자는 파이프 영주 맥더프와 함께 도망친다. 맥베스는 맬컴에게 ‘국왕 시해 주모자’의 죄상(罪狀)을 덮어씌운 후 왕좌에 오른다. 하지만 ‘장래 왕은 뱅코의 후손’이란 마녀의 마지막 예언이 떠올라 불안에 시달린다.

맥베스는 자객들을 고용해 뱅코를 죽이지만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죽이는 덴 실패한다. 초조해진 맥베스는 마녀들을 다시 찾아가 새로운 예언 세 가지(‘맥더프를 조심하라’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자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한다’ ‘버남 숲이 던시네인 언덕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맥베스는 몰락하지 않는다’)를 듣는다. 새 예언을 들은 맥베스는 맥더프의 부인과 아들을 죽인다. 맬컴과 맥더프는 복수를 다짐하고, 영국 왕의 군대와 노섬벌랜드 영주 시워드의 도움을 받아 맥베스를 왕좌에서 몰아내는 전쟁을 일으킨다.

한편, 맥베스의 아내는 막상 왕비가 되자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믿고 자신을 이길 자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해 맞서 싸운다. 하지만 예언의 효력은 차례로 깨진다. 맥베스는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한 병사들이 던시네인 언덕에 오른 걸 보고 ‘버남 숲이 던시네인 언덕으로 움직였다’고 여겨 낙담한다. 그런가 하면 적장(敵將) 맥더프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이 아니라 ‘배’를 찢어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결국 맥베스는 맥더프에 의해 참수되고 맬컴이 왕좌에 오른다.

 

이성계: 불리한 출신 성분 극복하고 ‘500년 장수기업’ 일궈

고려 말의 무장(武將) 이성계도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가슴속 야망’을 안고 있었다. 고려를 인수, 합병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는 꿈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조건은 맥베스에 비해 한참 처졌다. 무엇보다 그는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100여 년간 원나라 지배 아래 있던 철령 이북 지방의 토호(土豪)였다.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에 중국이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틈을 타 이 지역을 수복하려 했다. 드디어 고토(故土)를 되찾은 공민왕은 1361년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했다. 이자춘은 동북 지방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궁궐에 나란히 서 있는 대신들

아버지의 노력으로 고려 중앙 정계에 등장할 기회를 잡은 이성계는 타고난 무예와 용맹심으로 이내 두각을 나타냈다. 코도 영주의 반란이 맥베스에게 기회가 됐듯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청년 이성계에서 무장으로서의 본인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려 정권의 일원이 된 후 이성계의 활약상은 실로 화려했다. 1361년 박의(朴儀)의 반란을 진압했고,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탈환했다. 이듬해엔 원나라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엔 원나라의 사주를 받은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또 동북 지방에서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남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불패(不敗)무장’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다.

이내 그의 주위엔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고려는 국운이 다해가고 있었고 새 세상에 희망을 품고 있던 신진사대부들은 대중적 인기와 실력, 자금력을 두루 갖춘 ‘절호의 대선 후보’를 얻게 됐다. 이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을 때, 그의 쿠데타를 지지한 세력이 이 신진사대부들이다.

조선시대 왕좌입니다.

이성계는 1392년 왕위에 올라 개국했고 이듬해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꿨다. 맥베스의 인수 합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성계는 적대적 인수·합병(쿠데타)을 통해 경영권(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뒤이어 새로운 기업(역성혁명)을 창조하고 그 소유권까지 손에 넣었다. 더구나 그 기업은 ‘500년 장수기업’이 됐다. 맥베스와 이성계, 비슷한 배경을 지닌 두 무장이 시도한 인수·합병의 결과는 왜 전혀 다르게 나타났을까.

 

이성계의 성공 요인 1_네트워킹: 연합과 제휴

왕의 사촌이자 귀족이었던 맥베스에 비해 출신 성분이 한참 처지는 이성계가 변방의 시골 무인에서 왕좌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조직적으로 기획된 ‘네트워킹(networking)’의 힘이다.

다양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한 남성이 손으로 컨트롤하고 있습니다.

코도 영주의 반란을 진압한 맥베스처럼 이성계도 고려 말 수많은 외침(外侵)을 막아 공을 세웠지만 맥베스와 달리 중앙정부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신진사대부 세력 역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고려 보수파에 대항할 힘이 필요했고, 이들이 이성계를 주목했다.

실제로 사료에 따르면 정몽주가 동북면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를 방문했고, 정도전 역시 수시로 이성계의 막사를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이 두 사람을 통해 이색, 권근 등 신진사대부 핵심 세력과 네트워크를 형성해나갔다. 맥베스의 던컨 왕 암살이 ‘나홀로 쿠데타’였던 데 반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연합과 제휴의 산물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의 옛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이성계의 국민적 인기와 군사력을 십분 활용했다. 위화도회군은 최영 등 고려 조정 내부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지만 사대부 세력의 적극적 지지로 무마됐다. 이성계는 인수·합병 대상(고려 조정)의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인맥과 세력을 조직적으로 넓혀갔다.

반면, 맥베스의 인수·합병 과정은 결정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연구원은 “변화를 위한 전략엔 그것을 실행하고 유지할 만한 아키텍처(architecture, 조직적 힘)가 필요한데 맥베스에겐 그게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던컨왕을 암살한 후 맥베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지지자 겸 2인자인 뱅코를 제거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마녀의 예언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결국 맥베스가 합병한 정부는 그 구조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잉글랜드로 도망간 맬컴 왕자는 맥더프·시워드 등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맥베스의 인수·합병은 내부 세력과의 거래나 네트워킹 과정이 생략됐을 뿐 아니라 위험 감소 노력과 우호 지분 확보 전략 또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성계의 성공 요인 2_학습: 불확실성의 최소화

맥베스 부부는 초조한 나머지 합병 이후 상황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했다. 준비 부족 상태에서 급하게 왕권을 떠맡아 인수·합병의 정당성(legitimacy)을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키지 못한 채 큰 불확실성을 안고 경영을 맡아야 했다.

특히 맥베스 부인은 피인수 기업의 최고경영자만 제거하면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제 손안에 들어올 거라고 착각했다(“당신은 오늘 밤의 큰일을 제 수완에 맡기세요. 이 일로 우리는 모든 앞날에 종횡무진 절대 지배권을 갖게 될 겁니다”<맥베스 1막 5장>). 하지만 부부에게 정작 필요했던 건 성급한 거사 추진이 아니라 인수·합병 이후 상황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학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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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 입성한 이후 장기간의 분석과 학습을 통해 사림파·훈구파·친원파 등의 정치 계보를 파악하고 그들의 ‘힘의 균형’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다. 친원 세력인 이인임 등을 몰아낼 땐 훈구파 최영과 힘을 합쳤으며, 위화도회군 이후 정권 교체기엔 점진적 개혁파인 정몽주와 연합했다.

이성계의 학습조직은 고려왕조 세력의 근원과 취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정권 획득 후엔 전제개혁을 통해 사전(私田)을 폐지함으로써 고려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한편, 차기 정부의 조세 기반을 든든히 했다. 또 원·명 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진단, 오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인수 조직에 대한 학습이 결여된 맥베스는 안팎 정치에 모두 둔감했다. 정부 요인을 모아 연회를 베풀던 중 자신이 죽인 뱅코의 유령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는 등 거듭된 이상 행동으로 구성원들의 신뢰를 잃었다. 잉글랜드 등 이웃 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소홀히 해 적대자들이 외부 세력과 연합하게 하는 우를 범했다.

 

이성계의 성공 요인 3_조직의 창조적 변화 선도

맥베스 지지 집단은 그 기반이 취약했다. 그가 인수한 국가 역시 기존 던컨왕의 시스템을 답습, 재생산할 뿐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 맥베스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행한 조치는 뱅코와 맥더프 가족을 살해한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이후 역성혁명 이전에 이미 전제 개혁을 실시해 조선 건국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건국 후엔 새 왕조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새 왕조의 경영 기조를 공표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해 법 제도를 마련했으며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지어 관료제를 확립했다. 또한 사병 혁파를 통한 병권 집중, 병제 개혁 등 국방력 강화와 군사제도 정비에도 힘을 쏟았다.

Change management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식회사 조선’의 최고경영자(CEO)는 조직 구성원을 ‘딴마음 품을 시간이 없을 정도의 미시적 불안정성’ 상태로 몰고 갔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의 책 ‘자기창조조직’(삼성경제연구소)에도 등장하는 ‘미시적 불안정성’은 자기 창조 조직의 절대적 조건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시적 수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능력이 발휘되면 조직 전체는 이를 토대로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고 거시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이성계는 고려라는 피인수 기업 구성원들이 기왕에 가졌던 ‘루틴(routine)’을 파괴하기 위해 전제 개혁과 수도 이전을 단행했다. 그의 조치는 고려왕조에서 배양된 ‘루틴의 수렴성’을 파괴함으로써 정신모형(mental model)을 바꾸려는 기획이었다. 이성계의 창조적 조직 변화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인수·합병의 성공, 장기적으로는 조선 500년의 거시적 안정성으로 이어졌다.

가슴속에 품었던 큰 야망을 실행에 옮긴 두 경영자 맥베스와 이성계의 상반된 모습은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던진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 승리는 목표와 현실의 간극을 치밀하게 경영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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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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