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한국 축구와 함께 ‘불멸의 로맨스’를

2014/10/10 by 최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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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우리 어릴 땐 축구밖에 없었다. 아니, 축구밖에 몰랐다. '화랑' '충무'로 나뉘었던 대표팀 축구 말이다. 기성용의 'EPL', 류현진의 'MLB', 김효주의 'LPGA'…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이런 낯선 영어 약자들은 원소기호보다 더 생소했다.

브라질 월드컵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난 여름 국민들의 새벽잠을 설치게 했던 브라질 월드컵으로 상황을 'RW'(ReWind, 돌려 감기) 해보자. 양대 포털 집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 대(對) 러시아전 인터넷 중계의 '동접자(동시 접속자)’ 수는 300만 명에 달했다.

동접자 수의 '끝판왕'으로 불리던 류현진 등판 경기의 평균치가 30만 명에서 35만 명이었고 최고치는 70만 명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의 상품성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역시, 아직도, 여전히, 그래도 우리에겐 국가대표 축구다.

 

월드컵 부진, 그리고 격동의 3개월

브라질 월드컵 부진 이후 한국 축구는 격동의 3개월을 겪었다. 홍명보라는,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 엘리트를 한순간 '무덤'으로 보냈고 '히딩크 마술'의 1등 공신인 이용수 세종대 교수를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재선임했다. 울리 슈틸리케(Uli Stielike)라는 용병 감독을 영입하고 중남미 강팀들과 '명예 회복 경기'도 훌륭히 치렀다. ‘16세 코리안 메시(Messi)' 이승우의 환상적 골 퍼레이드는 기분 좋은 ‘덤’이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아니 한국 축구의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언제든 대표팀 축구에 '올인'할 수 있는 관심과 애정, 충성도까지 충만한 '잠재 고객'이다.

이젠 대한축구협회가 나설 차례다. 국가를 대표하는 경기력뿐 아니라 방송 중계, 콘텐츠, 서비스 정신, 사용자 경험, 공익활동까지 모든 것을 '국가대표급'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리그 없인 월드컵도 없다

지난 8월 초 미국 프로축구연맹마케팅(SUM) 실무자들과 하루 종일 릴레이 미팅을 진행했다. 시간대와 팀을 달리해 회의실을 찾은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리그 없인 월드컵도 없다(No league, no World Cup)". 프로축구 리그가 튼실하지 않으면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이란 비전도 꿈꿀 수 없다는 그들만의 확고부동한 '축구 만트라(Mantra·주문)'였다.

축구 경기장에 축구공이 놓여져 있습니다.

창피했고 한편으로 부러웠다. 국내 프로축구 리그인 K리그 사무국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몇 개 구단은 차마 ‘프로’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냉정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모든 측면에서 업그레이드가 시작돼야 한다."

나름 신선한 고백이다. 그 동안 우리 축구계는 덮고 감추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집단이 운영해 왔다. K리그의 중장기 로드맵을 보면 살짝 흥분까지 될 만큼 참신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많다. 문제는 대다수 국민이 그 로드맵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프로축구 리그의 투자와 발전 없이 월드컵에서 성공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다. 국가를 대표하는 ‘팀’ 이전에 국가를 대표하는 ‘리그’부터 자리 잡아야 한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건 곧 세계시장 어디에 내놔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란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정한 '국가대표'다.

국가를 대표하는 ‘팀’ 이전에 국가를 대표하는 ‘리그’부터 자리 잡아야 한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건 곧 세계시장 어디에 내놔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란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정한 ‘국가대표’다.

 

월드컵 시즌조차 불편한 축구 시청환경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코리아 풀(pool)'이라고 해서 지상파 방송 3사가 합동으로 동시에 방영해야 한다는 관행이 있다. '보편적 시청권'이란 정책이 오히려 '시청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역설적 상황으로 인해 국민들은 무조건 3개 지상파 채널에서 축구를 봐야 했다.

축구 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의 모습

지상파 방송사의 대형 스포츠 중계는 시청률 합계가 60%를 넘기면 '초대박'이라고 한다. 나머지 40% 국민의 '선택권'은 누가 보호해줄까? 이 와중에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지상파 방송 3사는 500억 원이 넘는 누적 적자를 기록했다. ‘축구를 사랑하고 시청자들을 생각한다’는 지상파 방송 3사의 K리그 중계 횟수는 1년에 10회도 버겁다.

뭔가 맞지 않는다. 바뀌어야 한다. 한 지상파 방송사 축구 해설위원 제안을 받은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K리그 중계 강화’를 수락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리그 없인 월드컵도 없다’ 같은 혁신적 발상이 필요하다.

 

축구 팬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기장?!

K리그와 대표팀 경기 할 것 없이 축구 팬이 경기장을 찾는 일은 너무 불편하다. 언젠가 미국 미식축구 프로구단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마케팅 이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구단의 가장 큰 경쟁사는 다리 건너 연고지를 둔 '오클랜드 레이더스'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놀이공원도, 콘서트도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벽에 걸린 60형 고화질(HD) TV다."

우리 구단의 가장 큰 경쟁사는 다리 건너 연고지를 둔 ‘오클랜드 레이더스’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놀이공원도, 콘서트도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벽에 걸린 60형 고화질(HD) TV다.

 

삼복더위에도 축구 팬을 집밖으로 나가게 할 동인(動因)이 필요하다. 사실 한국 축구장의 현주소는 한심한 수준이다. 주차는 ‘하늘의 별 따기’고 경기장 내 매점은 1970년대 동시상영 극장을 연상시킨다. 화장실은 지저분하고 어딜 가든 기나긴 줄이 이어진다. 좌석은 좁고 불편하며 아이들은 전반전도 끝나기 전에 칭얼거린다. 전광판 정보는 출전 선수 정보조차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주요 장면 다시 보기 기능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삼성 커브드 TV에 축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름지기 축구 중계란 집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켜고 편하게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며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대한축구협회나 한국프로축구연맹 차원에서 가장 시급하게 주력해야 할 과제는 바로 축구상품의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는 일이다. 어떤 방법과 예산을 동원하더라도 이 수많은 불편을 하나씩 제거해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나 한국프로축구연맹 차원에서 가장 시급하게 주력해야 할 과제는
바로 축구상품의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는 일이다.

 

지난 추석날 밤 우리나라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 고양시 일산서구)에서 우루과이와 대표팀 평가전을 치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은 경기 당일 2주 전까지도 표가 많이 팔리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날 밤 경기장엔 무려 4만 명의 관중이 몰렸다. 명절 저녁, 시댁이나 처가에서 '킬링타임(killing time)용 소재'를 찾던 젊은 가족에게 대표팀 경기 관람은 꽤나 매혹적인 일이었던 모양이다.

많은 축구팬들이 축구 경기를 열정적으로 관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적지 않은 며느리나 사위가 ‘대형 축구경기 관람=추석 전통’ 공식이 자리 잡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고양에선 축구 팬의 함성과 초록 잔디의 상쾌함,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선수들의 '미친' 스피드와 거친 숨소리가 어우러져 한바탕 축구 축제가 벌어졌다.

축구장의 불편을 여럿 이야기했지만 '축구경기 현장'의 매력만큼은 어떤 미사여구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믿기지 않는다고? 그 질문의 답은 아래 영상으로 대신할까 한다.

*해당 영상은 사용기한 만료로 삭제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저곳에 가족·친지·친구·동료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가슴이 조금도 요동치지 않는다면 축구란 스포츠는 당신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휘영청 밝은 '슈퍼문(super moon)' 아래 살아 숨쉬는 듯한 태극기를 바라보며 우렁차게 애국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는 돈, 그 이상이다.

 

축구 열기 부활에 모두 동참을

한국 축구가 ‘글로벌 축구 지도’ 위에 당당히 자리매김하려면 선수와 감독은 물론, 대한축구협회·K리그·언론사·후원사·팬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는 졸업할 때가 한참 지났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수십 년간 축구를 ‘B급’으로 여겨 온 미국도 그 질긴 선입견을 버리고 축구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지 않은가. 미국에 비하면 우리는 사정이 한결 낫다. 우리에게 축구는 추억이고 힐링(healing)이며, 무엇보다 ‘불멸의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오늘(10일) 오후 8시 파라과이와, 오는 14일 오후 8시 코스타리카와 각각 친선 경기를 치른다. 감성 자극하는 가을, 이 두 경기가 또 한 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 이 칼럼은 전문가 필진의 의견으로 삼성전자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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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삼성전자 전문가 필진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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